역사 자료

[스크랩] 우리나라의 고사서가 일본왕실 문고에 소장돼 있다.

스타도나 2009. 7. 24. 21:49

일본황실이 소장하고 있는

단군사(원조선),고구려사,고려사(요사,금사,원사,청사)

 

한민족사는

이조에 의해 50%가 왜곡,조작,축소되었고

일제에 의해 말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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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일황칙령 제 319호로 통감부의 이름을 고쳐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통감으로 있던 육군대장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조선총독에 취임했다. 데라우치는 1910년 11월부터 전국의 각 도, 군 경찰서를 동원해서 1911년 12월말까지 1년 2개월 동안 전국 서적을 색출해서 단군조선관계 고사서등 51종 20여만권의 사서를 수거해서 일본으로 가지고 가거나 불태워 없애고 한국역사를 왜곡하기 위한 전초작업에 착수했다.

1915년 초대조선총독은 취조국이 관장하던 업무를 중추원으로 이관하고 [반도조선사 편찬과]를 설치하고 일인학자와 한국측은 역사학자가 아니고 친일 정객 이완용, 박영효, 이윤용, 권중현, 등 역적을 임명하여 한국의 역사 왜곡 작업에 착수했다. 1922년 12월 훈령 제 64조로 [조선사편찬위원회]의 규정을 새로 제정 공포하고,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위원장으로 15명의 위원회를 조직했다.

일본은 중국 전역있는 한민족관련 사서도 수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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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일인 학자 요시다(吉田東伍) 이케노우치(池內宏) 츠다(津田左右吉), 구로이다 가쓰미(黑板勝美) 경도제국대학의 미우라(三浦周行) 경도제대 이마니시(今西龍) 경성제대 교수 쇼우다(小田省吾) 편찬 실무자 스에마쓰(末松保和) 등 8명의 관계자들이 연 122일 동안 중국을 출장하고, 23년에는 17명이 연 204일 24년 12명이 연 176일 동안 중국을 출장하고 25년 15명, 연 200일 동안 중국 각처를 누비며 조선 사료를 찾아내고 심지어 [광개토대왕 비문]과 [모두루 비문]의 글자를 훼손시키고 돌아왔다.

1925년 6월 일황 칙령 제 218호로 조선사편수회 관제를 제정 공포하고 조선총독이 직할하는 독립관청으로 승격시키고 [조선사편수회] 사무소를 총독부 중추원에 두고 1925년 10월 8일 제 1회 위원회를 개최했다. 총독은 [편찬사 탐방]이란 이름으로 중국 전역에 출장 갔던 탐방자 들이 돌아오자 관계자들을 독려하는 한편 한국의 전국 도, 군, 경찰서 등 관청에 협력토록 강력히 지시했다. 초기의 조선 관계 자료의 수집은 강제 수색 압수가 성과를 거두었으나 수장자들이 비장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서는 대여 형식으로 그 색출 방법을 완화 해야 좋을 것이다. 라고 훈시하고 조선사 편찬지침을 하달했다.

한편 일제는 가장 공명 정확한 조선사를 편찬하기 위해서는 사료가 필요하다는 명목을 붙혀 이번에는 중추원을 앞세워 전국적인 비장사료 수색을 다시 감행했다. 겉으로는 사료 수집을 대여 방식 등의 다소 완화된 태도를 보였으나 실지는 각, 도청, 군청, 경찰서 등이 위압적인 방법으로 수색했다.

한국의 고대사서는 물론 전통문화, 예술, 전기, 열전, 충의록, 무용전, 등 심지어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까지 전부 압수하여 제 2차 수색에서는 압수 범위가 오히려 더욱 늘어났던 것이다. 1928년 7월 18일 중추원에서 열린 조선사편수회 회의록 중에 고문위원회의 주요 발언 내용은 아래와 같다.

◆ 山梨총독 : 앞서 본회는 조선 사료 수집정리와 조선사 편찬의 사명을 가지고 창립되었다. 고문과 각 위원들은 그 취지에 열열이 원조하고, 각 직원들은 를 부지런히 사무에 종사하였기에 상당한 성적을 올리게 된 것이다. 다행으로 생각하는 것은 해가 거듭 될수록 사료는 인멸된다. 사료의 수집은 가장 공정한 조선사를 만들려는 본회 창립 당시와 같이 더욱 절실한 소망일 뿐 아니라 조선 통치상 긴요한 일로 믿는다. 여러분은 더욱 노력하여 이 사업이 유종의 미를 거두도록 노력해 달라.

◆ 池上정무총감 : 본회 사업의 경과를 보면 사료 수집은 예정의 절반이 완료된 것은 여러분들과 일반인들이 귀중한 사료수집과 조선국사 편찬에 호의를 가지고 편의를 제공해 주었기에 참으로 만족한다. 앞으로 1-2년 이면 일반 수집을 마칠 예정이니 여러분은 물론 일반인들도 더 한층 편의를 제공해 줄 것을 간절히 바란다.

◆ 黑板勝美 : 나는 다행이 여기에 참석하여 이 자리에 함께 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이 조선사편수회에 나는 처음부터 관여하여 상담에 응해 왔다. 최초에는 10개년에 [조선국사] 편찬을 완성하기로 했으나 [1919년 조선의 독립운동]과 1923년 일본의 지진재앙 때문에 편찬 사업이 연장되어 12년간에 전부 완성하기로 했다.

각 도, 지방에 있는 사료는 물론 일본 지나(중국) 및 만주에 있는 것도 수집하여 가장 공정한 조선사를 편수하는 것이 목적이다. 위원과 고문, 각위의 협력으로 이미 사료 수집도 과반은 마쳤으므로 편수의 체제와 강령을 정하고 그에 따라 편찬을 진전시켜 오늘에 이르렀다. 이 사무가 어느 정도 진전되었을 단계에는 여러분의 기탄없는 의견을 듣고자 하나 실은 자료가 너무도 호환하고 그 수집 정리 및 편찬에 대해 수사관도 상당히 곤란을 받고 있는 실정이므로 충분히 연구하여 우선 편찬이 완성된 다음에 심사를 앙청하기로 하겠다.

일본인의 뜻에 따라

이조인들의 손으로 우리 국사를 편찬케하였고

우리학교에서는 지금도 그것을 사실인양 열심히 배우고 가르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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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조선반도사 』 편찬 실무자 스에마쓰(末松保和) 등 20여명의 일인 학자들과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 신석호, 홍희 같은 식민학자들이 참여하여 조선사편수회가 편찬한 [조선사]는 총목록 총색인 각 1권, 본문 35권 총 2만4천 1백 11쪽, 도판 395매, 그 외 [조선사 사료총간 20종] [조선사사료 집진(集眞) 3질]을 예정 보다 늦은 소화 13년(1938년) 3월에 드디어 [조선국사]가 완료되었다. 사료 수집기간을 제외하고 만 16년이 걸려서 나라를 강탈한 일본인의 손으로 우리나라의 국사가 완간되었던 것이다. 세계 인류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남의 나라를 강탈한 왜적이 우리나라의 국사를 만들어 주었으니 일제는 그 얼마나 고마운 나라인가?

우리 고대사는 이조와 일제에 의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단 2권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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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조선사편찬위원회를 구성했던 1923년(대정 12년)부터 1937년(소화 12년)까지 15년 동안 조선국민으로부터 [차입한 사료의 총목록 종류가 4,950종]이라고 조선사편수회 사업개요에서 밝히고 있다. 또한 일본의 사학자이며 평론가인 하라타사카에루(原田榮)씨가 저서하고 1981년 4월 25일 발행한 [역사와 현대]에 보면 1923년 7월 조선사편찬위원회 구로이타(黑板) 고문이 대마도에 사료탐반을 했을때 한국의 역사와 관계가 있는 문서, 고기록 등이 대주구 번주(藩主:영주) 종백작가(宗伯爵家)에 있는 것을 알고 고문서류 6만 6천 469매 고기록류 3천 576책, 고지도 34매, 등을 은폐 분서(焚書)했다. 라고 밝혀져 있다.

1981년 이면 일본 정부의 고위자들은 한국의 역사왜곡을 잘 알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한국 전역은 물론 중국 전역의 우리나라 고대 사서를 수거 색출 했으니 그 수량이 얼마나 많은 사서를 수탈해 갔는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유구한 우리나라의 고대사는 오직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2권 밖에 없는 사유를 얼빠진 한민족은 명백히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고사서가 일본왕실 문고에 소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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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관헌에게 붙잡혀 일본 황실문고에서 근무하다 해방직후에 귀국한 박창화(당시 56세 이미 사망)씨는 일본황실문고에 우리나라의 고대사 특히 단군관련 사서들이 대량으로 소장돼 있다, 라고 주장하고 박창화씨는 해방 후에 이들 자료를 되찾아야 된다고 정부당국에 수차례 호소했으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죽었다고 한다.

[1998년 9월 26일 한겨레신문 ]

 

 



우리나라의 고사서가 일본황실 문고에 소장되어 있다면 우리 정부는 당연히 일제가 수탈해간 우리나라의 고대사를 되돌려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한국정부는 일본황실문고에 소장하고 있는 자료의 목록을 일본 정부에 요구하고 우리나라 고대 사료의 반환을 촉구해야 마땅할 것이다. 만약에 일본 정부는 조건 없이 순순히 우리나라의 고대사를 되돌려 줄때 한일간의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 져야 한다.

만약에 일본정부가 이에 응하지 않을 때는 상기와 같이 일제가 우리사서를 수탈해간 명백한 증서가 있으므로 일본황실문고에 소장된 [한국의 고대사서를 반환하라]는 제목으로 국제사법 제판소에 제소를 해서라도 되돌려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본 한국정신문화선양회는 일제가 수탈해간 우리나라 고사서의 반환을 일본정부에 요구 할 것을

 

학계 및 정부당국에 피눈물로 호소한다.

 

 

 

KHANKOREA

출처 : 박프로
글쓴이 : 박프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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