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비하인드 스토리
불멸의 이순신 비하인드 스토리
과거를 알지 못하는자 미래는 없다.
충격적인 역사 스토리 이순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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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이순신 장군을 영웅화하는데 치중하였으나 이번 작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역사를 추적하여 새롭게 재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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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순신과 조선 국왕 선조와의 심각한 갈등이 적나라하게 표현된다.
선조는 이순신을 잡아 죽이려고 몇번이나 시도하였고, 정유재란이 종전되면 반드시 죽이려고 작정하고 있었다.
이순신도 그러한 선조의 마음을 알고 쿠데타를 일으킬 생각도 하였으나 마지막 순간에는 쿠데타를 포기하고 잠적해 버린다.
대승을 거둔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적탄에 맞아 사망하였다는 역사기술은 거짓이다.
이순신이 그 전투에서 죽었다는 주장이 거짓이라는 근거를 함께 검토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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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최후의 전투 노량해전에서 왜군 함대는 이순신 함대와 도대체 맛 상대가 되지 않았다, 국가와 국가간의 전쟁이라고 말할수 없을 정도로 이순신 함대의 일방적인 승리이었다, 마치 신장 2미터가 넘고 체중 150키로그램이 넘는 씨름선수 김영현이 초등학생을 두드려 패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하여 왜군은 전선 300척 이상이 격침되고 병사들 대부분이 수장되었으나 이순신 함대는 병선 상실이 전혀 없었고, 사망자가 겨우 10 여명에 부상자 100여명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당시 왜군이 수백척의 병선과 병사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일방적인 패전을 한 이유는
(1) 임진왜란에서 수없이 이순신에게 패퇴한 일본군에게는 장수이든 병사이든 가리지 않고 "이순신"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였다. 당시 일본 본토에서는 우는 아이에게 어른들이 "이순신 온다"고 말하면 아이가 울음을 금새 그쳤다고 한다.
이에 비하여 조선 수군은 이순신과 함께 하면 백전백승이라는 불퇴의 신념으로 똘똘 뭉쳐있었다.
(2) 왜군 병선과 조선 병선의 차이 때문이다. 왜군 병선은 바닥이 평편하여 속도가 빠른 반면 갑판이나 측면의 두께가 �았고, 이에 비하여 조선의 병선은 바닥이 V자형으로 되어 있어 기동력이 다소 떨어지지만 안정감이 있고 갑판이나 측면의 두께가 매우 두꺼워서 왜군 병선에게 그대로 돌진하면 왜군 전함은 그대로 동강이가 나버렸다.
몇년전 서해전에서 한국 해군 전함이 북한의 점함에 맞설때 그대로 충동하여 돌파한 작전도 이순신의 전법을 쓴 것이다.
(3) 조선의 함포의 위력은 왜군 함포에 비하여 사거리와 살상력에서 월등하였다. 왜군 함선이 접근하기도 전에 멀리서 조선군 함포를 마구 쏘아대니 왜군으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4) 이순신의 탁월한 전략과 전술이다. 더구나 명나라 수군도 합세하고 있었던 것도 큰 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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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글을 읽으신 분은 중대한 의문을 가져야만 한다.
조선 수군중에서는 노량해전에서 사망한 병사가 겨우 10여명 밖에 안되는데, 직접 왜군과 부닥쳐 싸우지 않고 멀리서 전투를 지휘하는 지휘선에 타고 있던 총 사령관 이순신이 왜 왜군의 총탄에 맞아 사망할수 있었다는 말인가?
더구나 당시 이순신은 전투 중에 항시 착용하였던 갑옷을 입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왜군의 조총탄에 관통되었다고 하는데,
격렬한 전투에 임하는 사령관이 갑옷을 입지 않았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래서 혹자는 이순신이 선조와의 갈등때문에 종전을 앞두고 자결을 하려고 마음먹고 일부러 갑옷을 벗어놓고 왜군이 정조준하도록 유도하여 총탄을 자초하였다는 주장도 하고 있다,
과연 그러한 주장이 사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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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이순신이 거기서 전사한 것이 아니고 살았다면, 이순신은 어디로 잠적한 것일까? 어디가서 어떻게 생활하다가
언제 사망하였는가?
현충사에 있는 이순신 무덤에서 그의 시신이 없다는데 사실일까????
다음은 "불멸의 이순신"의 줄거리 요약분이다(본인은 종전에도 이곳에 비슷한 내용의 글을 올린 적이 있으나 이번 글에서는 좀더 구체적이고 충격적인 내용을 상당부분 보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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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진왜란, 정유재란 최후의 노량해전(1598. 11. 18.)에서 이순신(당시 54세)은 왜군의 총탄을 맞고 사망한 것으로 되어 알려져 왔으나 사실은 그것이 아니었다.
당시 조선국왕 선조는 1592. 4. 14. 풍신수길의 명을 받은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하여 서울로 진격해오자 의주에 피란가서 압록강까지 건너서 중국에 망명을 하려고 까지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망명은 못하였고 이로 인하여 신하들이나 백성들로부터 군주로서의 신망을 상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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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에 비하여 백전백승의 이순신은 백성들로부터 구국의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었고, 국왕이 중국땅으로 망명을 하려고한다는 소식을 접한 이순신은 비분강개하여
당장 병선(배)를 이끌고 서해바다, 한강을 거쳐서 한양으로 갈테니, 국왕 선조와 조정 중신들을 몽땅 그 함께 타고 다시 남쪽으로 와서 왜군과 맞서 함께 싸우다가 죽자"고 외친다. 누구라도 도주하려고 하는 자는 내 칼이 목을 칠 것이라고 호통을 친다. 그런 내용을 완곡하게 상소문으로 써서 선조왕에게 올린다.
중신들은 이순신의 충정을 왜곡, 과장하여 국왕 선조에게 "이순신을 대역죄로 잡아들여 참수해야 한다"고 부추기고, 국왕 선조도 "일개 무부 주제에 국왕을 이렇게 심히 조롱할수가 있다는 말이냐?"고 크게 분노한다.
아울러 국왕 선조는 왕권 유지에 가장 위험한 인물로 이순신이라고 지목하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도중에 이순신을 잡아들여 죽이려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그후 명나라 원군이 평양성을 탈환하고 권율장군이 행주산성에서 왜군 3만명을 격퇴시켰다. 이순신이 한산도 해전, 부산포 해전에서 연전 연승하여 일선 170척을 격침시키자 일본군은 보급로가 차단되고 전의를 상실하였다.
그리하여 명의 사신 심유경과 일본군 장수 고니시가 종전 협상을 진행하면서 일본군이 조선에서 철군을 시작하였고, 조선국와 선조도 한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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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협상이 결렬되자, 일본군은 고니시, 가토가 선봉장이 되어서 1597. 1.14.자로 14만명의 군대로 재침을 하였으니 이것이 정류재란이다.
왜군이 첩자를 보내서 간계를 부려서 이순신을 모함게 빠지게 하였고, 이순신은 그것이 왜군의 흉계임을 간파하고 조선조정의 출병명령에 불응하자, 선조왕은 이순신을 척살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한양으로 압송하여 그를 참살할 것을 명하였다.
유성룡 등 신하들의 결사 반대와 백성들의 분노가 무서웠고 더구나 이순신을 죽였다가는 일본군대를 막을 방도가 없다고 생각해서 끝내 죽이지 못하고 귀양을 보내는 선에서 그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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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후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계속 패퇴하자 할수 없이 이순신을 다시 백의종군케 하였다.
이순신은 "전하,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함이 있습니다"라는 유명한 상소문을 국왕에게 올렸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위 상소문에는 이순신의 국왕 선조에 대한 피맷힌 원망이 소름끼칠 정도 무섭게 서려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당시 이순신은 "국왕이 졸렬하고 무지하여 지난 10년동안 내가 피땀흘려 훈련시킨 병사와 힘들게 만들어 놓은 수백척의 병선을 모두 왜군에게 격침당하여 상실하고, 겨우 12척만 남았으니, 조선의 앞날은 풍전등화와 진배없구나. 내가 목숨을 걸고 12척으로 왜군과 맞서 결사 항전을 할 것이지만 만일 실패하면 국왕 선조는 나라를 망친 장본인으로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원망과 경고가 담긴 글이다.
선조는 그 상소문을 읽고는 이순신의 무서운 원망과 경고에 졸도하였다가 3일만에 깨어난다. 몇달 동안 수라를 제대로 들지 못하였다.
그후 이순신이 12척의 병선을 가지고 명랑해전에서 적선 130척을 격침시켰다는 승전보고를 받았으나 선조는 기뻐하지 않았다.
선조는 "저 무식한 무부가 차라리 패전하여 죽기만을 바랄뿐이다"라고 말하였다.
한편 풍신수길이 갑자기 사망하자 일본군이 철군길을 열어달라고 요구하였을때, 선조는 이순신에게 일본군이 철군하겠다고 하니 길을 열어주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 명을 거두어 달라는 상소를 올리고 "일본군대는 한놈도 살아보내지않겠다"면서 부산 앞바다를 명나라 해군과 함께 에워싸고 일본군 병선이 나오지 못하게 포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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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선조는 또다시 이순신이 항명을 하였다고 생각하고, 전란이 이순신의 승전으로 끝나더라도 그를 죽여 없애려고 마음먹었다. 그를 살려두고는 왕의 권위가 서지 않고 왕권이 위태롭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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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이순신도 그러한 선조의 마음을 꿰뚫고 있었다.
어차피 이순신 자신은 최후의 전투에서 승전을 하고 살아남더라도
당장 도성에 압송되어 선조에게 죽임을 당할 운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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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리하여 이순신은 명랑해전에서 적선 130척을 격침시키고, 1958. 11. 18. 다시 노량해전에서 300척을 격침시키는등 왜군을 거의 궤멸시켜서 최종 승전이 눈앞에 이르자 자신의 부관으로 함께 승선해 있던 큰 아들 이회와 조카 이완에게 밀명을 내렸다.
"내가 적군의 총탄에 맞은 시늉을 하면 네가 방패로 내앞을 가리거라.
나는 죽은 것처럼 위장할테니, 네가 내 갑옷을 입고 장군기를 들고 지휘하거라. 내가 죽었다는 사실은 적군에게는 기밀로 하라, 아군에게도 기밀로 하는 척 하면서도 몇몇 장수들에게는 알려지게 하라.
그리고 적군이 모두 패퇴하여 물러간 후에는 소문을 내서 우리 아군들과 백성들이 나의 죽음을 모두 알수 있게 하라.
나의 시신을 넣을 관을 준비해놓고 그 관속에 허수아비를 넣고 물건으로 채워서 나의 체중과 비슷한 무게를 가지게 하라. 가까운 친척들에게도 관을 열어보지 못하게 하고 그대로 장사를 지내서 관을 매장하거라.
나는 충성스럽고 1당 100으로 싸울만한 장수와 병사들 300명으로 구성된 결사대를 비밀리에 선발하여 병선 3척에 분승하여, 오늘밤 그들을 데리고 대마도로 건너갈 것이다"라고 자신이 전사한 것처럼 위장하는 문제와 사후처리에 대한 비밀지시를 내렸다.
당시 이순신은 이 결사대를 이끌고 도성으로 들어가서 왕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할 것인가? 아니면 왕과의 싸움을 피하여 대마도로 갈 것인가를 오래동안 고민하였다.
만일 전자를 택하여 국왕 선조를 죽이고 광해군을 옹립하기로 했다.
그러나 고민끝에 대마도 행을 결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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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그리하여 그 이후 아무도 이순신의 관을 열어보지 못하고 그냥 장사를 지내고 매장하였다.
선조왕은 "큰 공을 세운 이순신을 잡아 죽일 명분이 없어 고민하엿는데, 그가 승전을 하고도 전사하였다니 참으로 다행이다"라고 하였다. 이순신이 국왕 자신을 죽이고 광해군을 옹립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는 소문을 듣고는 그때부터 광해군을 핍박하기 시작한다. 16살 먹은 젊은 여자를 새로운 왕비로 맞이하여 아들 영창군을 얻자, 노골적으로 광해군을 핍박하고 영창을 후계자로 삼으려고 시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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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한편 몰래 대마도로 상륙한 이순신은 손쉽게 대마도를 장악할수 있었다. 워낙 이순신의 이름이 일본인과 대마도인에게 신과 같은 존재, 감히 싸워 이길수 없는 존재로 알려진 데다가
한편 일본 본토의 조정으로부터 군비 수탈을 심히 당한 대마도 민심은 이순신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고,
대마도를 통치하고 있던 대마도주도 당시까지만 해도 일본 본토와 조선에 양다리 외교를 하면서도, 거리상 가깝고 쌀을 얻고 있던 조선에 더 많이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던 터라, 이순신에게 통치권을 스스러 상납하고 자신은 그 수하로 들어가는 것을 영광으로 알고 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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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아울러 임진왜란, 정유재란중에 일본군대에 편입되었다가 패잔병이 되어서 대마도에 숨어 있던 수천명의 일본 장수와 병사들도 이순신이 왔다는 말을 듣고 혼비백산하여 산속에 숨어지내다가,
이순신이 대마도에 살기 위하여 왔고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자 모두 산속에서 나와서 이순신의 휘하 군대에 편입되어 이순신을 숭배하였다.
또한 정유재란 종전후 이순신의 휘하에 있던 조선수군 부대원들에서도 상당수가 몰래 배를 타고 대마도로 들어와서 이순신과 합류하였으니 그 숫자만도 병사가 3,000명, 그 가족들이 수천명에 이르렀다.
12) 종전 후 일본 본토에서는 다시는 조선반도를 침략할 꿈도 꾸지 못하게 되었으며,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는 대마도의 이순신에게 3번이나 찾아와서 무릎을 꿇고 과거 조선을 침략한 것을 백배사죄하고 아울러 일본 본토의 정권을 이양할 뜻을 밝히고 일본을 통치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한편 조선땅에서는 테자의 지위가 날로 위태롭기만 하던 광해군은 어느날 갑자기 선조가 찰떡을 드시고 급사하자 왕위에 오른다. 후일 광해군은 이순신이 선왕 선조와의 갈등을 피하여 대마도에 건너가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사신을 보내서 조선에 복귀하여 자신이 태평성대를 이룰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하지만,
이순신은 간곡히 사양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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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607년 조선과 일본은 임진왜란, 정류재란 당시에 일본에 납치해간 포로송환 협상을 맺었고 그때 조선에서는 사명대사가 사신이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이 포로를 송환하게 하는데에는 대마도의 이순신의 영향력이 매우 컸다. 당초 도쿠가와는 조선인 포로를 돌려줄 생각이 없었으나 이순신이 송환을 명하자 도쿠가와는 복종하고 송환을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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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또한 1609년 조선은 대마도주와 기유조약을 체결하고 부산포를 개항하고 세견선을 20척으로 하기로 합의하였는데, 이때 대마도주는 대외적으로는 토착 대마도인이었으나 그 배후의 실권자는 이순신이었다.
나중에 일본 본토의 막부 실권자 또는 일본 국왕은 자신들의 딸은 대마도의 이순신의 손자에게 시집보내기를 간청하여 허락받았고, 아들을 얻지 못한 일본 국왕은 대마도의 딸과 사위(이순신 후손)을 불러들여 대권을 잇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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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그후 이순신은 86세에 대마도에서 사망하였고, 그리하여 그의 실제 무덤을 대마도에 있다.
일본 본토의 해군은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매년 이순신의 기일에는 대마도에서 제사를 지내왔고 멀리 부산앞 바다 해상에 와서도 이순신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있다. 그들 일본 해군에게는 이순신이 비록 적장이지만 스승이고 또한 군신(軍神)이기 때문이다.
그후 400년이 지난 후에 일본에서는 다시 조선정벌론이 나왔으니, 그것은 일본 본토인들과 이순신 후손들이 선조왕에 대한 징벌을 하자고 제창한 것이고, 결국 1910년 한일합방을 이루고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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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가 드라마 제목을 "불멸의 이순신"이라고 명명한 이유는
바로 1598. 11. 18.노량해전에서 죽은 것으로만 알려졌던 이순신이 죽지 않고 살아서 대마도를 장악하고 일본본토를 무릎아래 두고 있었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이순신은 대마도에서 사망할때에도 유언으로써 자신에 대한 기록과 서적은 모두 거두어서 자신의 무덤속에 매장하여 세상에 자신이 대마도에서 살아왔음이 알려지지 않도록 하였다.
대마도의 어느 곳 지하에는 마치 중국의 진시황 무덤에 못지 않은 거대한 지하 분묘건조물이 축조되어 있고, 그 안에는 이순신에 관련한 역사서와 유물이 무궁무진하게 매장되어 있다고 한다
저자:세림 임상현
출처:세림의 상수파동클럽(씽크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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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제독의 미스터리 / 박 완
저자와의 대담 석창진님 박 완님 은준용님 이창희님 문형준님 강지영님 박현배님 - 전사(戰死)인가,자살인가,은둔인가
1.서론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
우리 나라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단 한 번이라도 위인전을 읽은 사람이라면, 이 말을 누가 했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즉 임진왜란(정확히 정유재란)의 마지막 해전인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 제독이 적의 유탄에 맞아 돌아가시면서 남긴 최후의 유언이라고 알려져 있는 문구인 것이다. 임진왜란이라는 7년간의 참혹한 전쟁에서 단 한 번의 해전에서도 패배한 적이 없었으며, 결과적으로 의병과 함께 임진왜란 전체에서의 조선의 (상처뿐인) '승리'의 양대 축이 되었으며, 마지막 해전에서 불의의 일격으로 전사할 때까지 장병들의 안위를 걱정하여 마침내 죽은 뒤에도 노량 해전에서의 대승리를 일구어 낸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군 제독. 그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일반적인 호칭은 결코 그에게 영웅(英雄)이라는 칭호에 그치지 않고 성웅(聖雄)이라는 극존칭에까지 이를 정도이다.
하지만 이제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고 위의 문구를 다시 한 번 살펴 보자. 그 분을 포함한 다른 분들에게 정말 죄송하지만, 상스러운 말 한 마디는 해야겠다. 씨바 영화 찍나? 지금까지 안으로는 무능한 왕과 조정 대신들, 밖으로는 적군과 맞서 싸우면서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서 마지막 해전에서 대승리를 눈앞에 둔 상태에서 '정말 재수 없이' 적탄에 맞았으면서도, 인간적인 원한 섞인 단말마의 비명도 아닌 극히 이성적이며 어찌 보면 '성스러운' 유언을 남긴 뒤에 사망이라. 어찌 보면 한국의 위인전의 지나친 영웅주의가 반영된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그리고 이렇게 볼 때 이순신의 전사 장면에 있어서 의심스러운 부분이 한 둘이 아니다. 왜 이순신은 '마지막 해전'에서 전사하였는가? 마지막 해전에서 이순신이 갑옷을 입지 않고 지휘하였다는 주장은 또 무엇인가? 이순신이 전사한 이후의 함대의 지휘를 왜 직속 부하 장수가 아니라 신참인 그의 아들과 조카가 맡았는가? 그리고 왜 이순신은 사망 후 80일이 지난 뒤에야 장례식을 치렀으며, 또 15년 뒤에 묘지를 이장하였는가? 이순신의 전사 장면에서의 이러한 수많은 의문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되고, 결국 이로 인해 이순신의 사망에 있어서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한 상황이다.
현재 이순신의 사망에 대한 설은 크게 3가지로 나뉘어진다. 첫 번째는 이순신은 우연히 전사한 것이 아니라, 자살하기 위해 일부러 전사하려 하였다는 '자살설'이다. 두 번째는 당시 이순신은 전사한 것이 아니라, 친족 및 측근들과의 합의하에 노량 해전에서 몰래 빠져 나와 은둔하여 살아갔다는 '은둔설'이며, 「유물의 재발견」의 저자인 남천우 씨에 의해 제기되었다. 세 번째는 기존의 '전사설'이며, 이에 대해서도 세부 사항에 있어서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는 실정이다.
그 중 내가 이 글을 통해 중점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바로 첫 번째와 두 번째 설에 대한 비판이다. 나 역시 이순신의 죽음에 있어서 후세 사람들의 각색이 상당히 개입하였으며, 그로 인해 그의 진정한 최후의 모습을 규명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첫 번째 설은 그러한 의혹과는 관계없이, 그 자체가 근거로 삼고 있는 사료와 그 현실성 여부에서 큰 약점을 안고 있다. 그리고 「유물의 재발견」의 5장 '이순신과 거북선'에서 한 부분을 할애하여 '이순신의 은둔설'을 제기한 남천우 씨의 주장 역시 그러한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을 나는 지적하고 싶다. 그렇기에 비록 세 번째 설인 '전사설' 역시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의심스러운 점이 많지만, 이 비판과 함께 전사설에 입각하여 당시 이순신 제독의 최후의 모습을 재구성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결론 부분에서 '자살설'과 '은둔설'을 제기한 이들이 그 바탕에 깔아 두고 있는 의식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짐작해 보고자 한다.
2.본론
(1)'자살설'과 그에 대한 비판
'자살설'이란, 이순신은 노량 해전 당시 우연히 전사한 것이 아니라, 전사의 형식을 빌어서 자살하기 위해 갑옷마저 벗어 두고 함대의 선두에 서서 지휘하다가 전사하였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임진왜란 종식 뒤 17∼18세기에 걸쳐 많은 이들이 이에 대해 논한 바 있으며, 그 중 자살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논거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공로 커도 상 못 탈 것 미리 알고서 제 몸 던져 충성 뵈러 결심했던가(心知功大 終難賞志 決身殲 意露肝)(금산군 이성윤[1570∼1620]이 노량 충렬사에 써 붙인 시의 문구).1)
이순신은 한참 싸울 적에 갑옷을 벗고 스스로 적탄에 맞아 죽었다(李舜臣方戰 免甲自中丸以死)(이민서[1633∼1688]가 김덕령 장군의 전기를 쓴 내용 중).2)
그리고 이런 사료들에 근거하여 노병천 씨는 이순신의 '자살설'을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이순신은 사천 해전 당시 어깨 관통으로 고생한 이래 새로이 개발된 방탄 조끼 '환삼'도 벗어 젖히고, 아예 처음부터 갑옷도 입지 않고 삼도수군통제사의 붉은 융복만을 입은 채 아침 8시의 빛나는 태양 앞에서 왜군의 조총 정조준거리 4∼5m 앞에 우뚝 선 것이다. 이것이 필자가 생각하고 있는 이순신 자살설이다(노병천).3)
이들이 주장하는 이순신의 '자살설'의 배경이 무엇인지는 나중에 밝히도록 하자. 그보다는 이들의 '자살설'이 과연 현실성이 있는 주장인가 하는 것을 먼저 문제 삼도록 하겠다. 즉 전사를 가장한 자살을 행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성이 있는 주장인가? 남천우 씨와 마찬가지로 나도 이 주장에 대해서는 극히 회의적이다.
'자살설'이 현실성이 부족한 주장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생각이다. '자살'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죽이고자 하는 의지와, 그리고 그를 실제로 수행하는 행위 이 두 가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단지 갑옷을 벗고 함대의 선두에 서서 지휘하였다는 사실만으로는 반드시 그의 죽음을 불러일으킬 확실한 행위가 되지 못한다. 즉 반드시 일본 수군의 이름 모를 병졸이 그를 쏘아서 맞춰 준다는 보장이 없을뿐더러, 설령 맞는다고 하여 반드시 죽음에 이른다는 보장 역시 없는 것이다. 기함 지휘소의 여러 측근들과 튼튼한 방패, 그리고 부하 장수들의 군함으로 둘러싸인 지휘관의 입장에서, 전사를 가장하여 자살한다는 행위는 자살 행위 중에서는 극히 졸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만약 이순신이 정말 자살하기 위해 함대의 선두에 서서 지휘했다면, 그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부하 장수들의 안위와 전체 해전의 승리마저도 도외시한 무책임한 지휘관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워진다. 기함은 함대의 선두가 아닌 중심에 위치하여, 적의 직접적인 공격을 피하면서 전체 해전의 상황을 파악하여 지휘를 내려야 하는 극히 중요한 장소이다. 그렇기에 기함이 공격을 받는다면 우선 지휘관과 그 부하 장수들의 목숨이 위태로워지고, 또한 기함에 탑승한 수많은 병졸들의 목숨이 위태로워지고, 마지막으로 함대에 대한 지휘력 상실로 인해 전체 해전에서의 승리 역시 보장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위의 이민서가 말한 '갑옷을 벗고(免甲)...'라는 표현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에 대해 최두환 씨는, 이것은 진(晉)나라 장수 선진(先軫)의 고사에서 나온 고사구절의 한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즉 '갑옷을 벗고 앞으로 나선다'라는 의미의 '면주선등(免胄先登)'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는 의미보다는 '용감하게 앞선다'라는 의미를 가진 문구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들에 근거할 때, 나는 '자살설'은 이순신의 사망에 대한 세 가지 가설 중 가장 현실성이 부족한 것으로 간주한다.
(2)'은둔설'의 내용과 근거
'은둔설'이란, 이순신은 전사한 것이 아니라, 미리 친족 및 측근들과 합의하고서 노량 해전 당시에 야음을 틈타서 몰래 빠져 나가 그후 약 16년간 은둔하여 살아갔다는 주장이다. 최근 남천우 씨에 의해 처음 제기된 것으로 보이며, 이 주장을 직접적으로 뒷받침하는 사료는 많지 않다. 다만 남천우 씨는 이순신이 생전에 부하 장수들에게 말했다는 내용과 그가 남긴 시의 문구 중 일부, 이순신이 '전사'한 뒤의 전장에서의 사후 처리 과정, 그리고 이순신의 장례 절차에 대한 의문점 등을 종합하여 이 가설을 제기한 것으로 보인다. 「유물의 재발견」에 수록되어 있는, 이순신의 죽음에 대한 이러한 여러 의문점(즉 '은둔설'의 근거)들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이순신이 부하 장수인 유형(柳珩)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예로부터 만약 대장이 자기가 세운 전공에 대하여 인정을 받아 보려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갖는다면, 대개는 생명을 보전하기 어려운 법이다. 그러므로 나는 적이 물러나는 그날에 죽음으로써 유감될 수 있는 일을 없애도록 하겠다"
②이순신의 시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시의 전문을 올려 보겠다).
아득하다 북쪽 소식 들을 길 없네 외로운 신하 때 못 만나 한이구나
소매 속엔 적을 꺾을 병법 있건만 가슴 속엔 백성 구할 방책이 없네
천지는 캄캄하여 서리 엉키고 산과 바다엔 피비린내 진동하네
말을 풀어 화양으로 돌려보낸 뒤 복건 쓴 처사되어 살아가리라
③조선 수군은 원거리 포격전을 주로 구사하였기에, 야간보다는 주간에 해전에 임하였다. 하지만 노량 해전만큼은 야간에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야음을 틈타 이순신을 도피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④『이충무공 전서』에 부록으로 수록된, 이순신의 조카인 이분(李芬)이 기록한 행록(行錄)의 이순신의 최후의 모습에는 의심스러운 점이 한둘이 아니다. 그 기록에는 이순신이 적의 유탄에 맞아 사망하였을 당시 이순신의 사망을 알았던 인물은 아들 회와 조카 완, 그리고 몸종 김이(金伊)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순신이 사망한 뒤 임시로 함대의 지휘를 맡은 이 역시 이들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참모들과 부하 장수들로 가득한 기함 지휘소에서 함대 사령관이 저격을 당해 사망하였을 때에 그것을 단지 3명밖에 알지 못했다는 점, 그리하여 그 지휘권이 고참 부하 장수가 아닌 신출내기인 아들과 조카에게 돌아갔다는 점은 극히 의심스러운 점이다. 결국 이것은 이분의 기록은 이순신의 은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조작한 것이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⑤이순신은 1598년 11월 19일에 '사망'하여 그 시신은 20일 뒤인 12월 10일에 고향인 아산으로 옮겨진다. 하지만 국가가 장례비용을 부담했음에도 불구하고, 장례는 그로부터 80일이 경과한 다음 해 2월 11일에 치러진다. 그리고 그로부터 15년 뒤인 1614년에 묘지가 이장된다. 이것은 이순신이 노량 해전 이후 은둔하여 장례를 치르기 전까지 새 생활을 정착한 뒤, 1614년에 실제로 사망하여 장례를 치렀음을 보여 주는 증거이다.
(3)'은둔설' 비판
위의 근거들을 살펴 볼 때, 적어도 '은둔설'은 '자살설'에 비해 다양한 근거를 통해 보다 현실성 있는 주장을 펼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를 통해, 우리는 이순신의 죽음에 있어서 깔려 있는 수많은 의문점들이 아직까지 해소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의 5가지 근거로는 이순신의 '은둔설'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나의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이 장에서는 위의 5가지 근거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근거 ①과 ②는 이순신의 '은둔설'에 있어서 심증을 제공하는 근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근거 ①의 경우 평소 이순신이 자신의 삶에 대해 가졌던 관점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근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근거들이 말 그대로 '심증'이며 이것만으로 어떤 구체적인 행위를 했음을 증명해낼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막말로 근거 ①의 경우 이것은 '은둔설'뿐만 아니라 '자살설'의 근거가 될 수도 있으며, 근거 ②의 경우 당시의 한시(漢詩) 등의 문학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이상을 보여 주는 상투적인 표현일 수도 있는 것이다.
단순한 '심증'이 아닌, 이순신의 사망에 얽힌 구체적인 의문점은 근거 ③에서부터 시작한다. 즉 조선 수군은 어째서 노량 해전에서만 자신들에게 불리한 야간 해전을 감행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하지만 나는 이 근거는 현실성이 결여된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손자병법」과 같은 병법서에서는, '유능한 장수는 싸울 시간과 장소를 결정하고 싸운다'라는 것을 자주 강조하곤 한다. 하지만 그것도 항상 가능한 일은 아니며, 전투의 상황에 따라 때로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전투에 임해야만 할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량 해전 당시의 상황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 보도록 하자.
정유재란이 막바지에 다다른 1598년 말에는 이미 대부분의 일본군이 본국으로 철수 중이거나 혹은 철수를 위해 경상도 남부 해안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중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는 전라도 순천에서 그 근처의 해안 지역인 왜교(倭橋)로 이동하여 해상 경로를 통해 철수하려 하였으며, 이에 이순신과 진린의 조·명 연합 수군은 왜교를 해상 봉쇄하여 고니시 군의 도주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고니시는 진린에게 뇌물을 건네 주고 구원군을 요청하는 밀사의 통과를 허락 받았다. 그로 인해 11월 17일에는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휘하의 일본 수군이 왜교로 향했으며, 이를 눈치챈 이순신은 18일 저녁 해상 봉쇄를 풀고 조선 수군을 이끌고서 일본 수군을 요격하기 위해 노량으로 향했으며, 19일 새벽에는 일본 수군과 조·명 연합 수군간의 본격적인 해전이 벌어졌다.
우선 노량 해전 당시의 일본 수군과 조·명 연합 수군의 규모에 대해 살펴 보자. 일본 수군의 경우 함선 500여 척에 병력 60,000여 명으로 추정되는 반면, 조·명 연합 수군의 경우 대·소선을 모두 합쳐 146척에 병력 19,600여 명에 불과했다. 게다가 전쟁이 끝나 가고 병력이 본국으로 철수하는 마당에 시마즈의 수군도 고니시의 육군도 도주로를 확보하기 위해 필사의 자세로 전투에 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일본 수군이 노량 해협을 지나 왜교를 봉쇄하고 있는 조·명 연합 수군을 역으로 포위 공격하면서, 동시에 왜교에 주둔한 고니시의 군대가 그 배후를 위협한다면, 연합 수군으로서는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이순신으로서는 재빨리 노량으로 향하여 대양에서 일본 수군을 요격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노량 해전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었듯이 조선 측이 만만하게 승리한 해전이 아니었으며, 양쪽 모두 최대의 병력을 동원하여 결사적으로 맞붙었던 최후의 대 결전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휘관이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제 맘대로 전투 시일을 결정한다는 것은 현실성이 결여된 생각인 것이다.
근거 ④에 와서 이순신의 '은둔설'은 그 절정에 이른다. 실제로 나는 남천우 씨가 은둔설을 입증하기 위해 제기한 가장 중요한 근거가 바로 ④와 ⑤라고 생각한다. 즉 이순신의 사망 장면과 장례 과정을 기록한 사료에서 무언가 의문점이 발견되었기에, 이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근거 ①과 ②와 같은 심증이 덧붙여지면서 이순신의 '은둔설'이라는 새로운 가설이 성립되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만약 이 주요 근거들 중 하나인 ④가 뒤집혀진다면 사실상 '은둔설'의 기반은 크게 약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근거 ④에 대해 어떻게 반박할 것인가. 만약 이순신의 사망 장면을 기록한 사료가 『이충무공 전서』의 「이분 행록」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런 믿기 힘든 기록이나마 믿을 수밖에 없든지 아니면 그것을 조작된 기록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사료가 그 외에도 존재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 때에는 사료를 서로 비교 검토함으로써 보다 개연성 있는 사료를 정확한 것으로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순신의 사망 장면을 기록한 여러 가지 사료를 인용해 보도록 하겠다.
19일 새벽, 이순신이 한창 독전하다가 문득 지나가는 탄환에 맞았다‥‥ 때에 이순신의 맏아들 회와 조카 완이‥‥곧 시체를 안고 방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오직 이순신을 모시고 있던 종 김이와 회와 완, 세 사람만이 알았을 뿐 비록 친히 믿던 부하 송희립 등도 알지 못했다. 그대로 기를 휘두르면서 독전하기를 계속했다(『이충무공 전서』의 「이분 행록」).4)
이순신은 몸소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힘을 다하여 싸웠는데, 날아오던 총알이 그의 가슴에 맞아 등 뒤로 빠져 나갔다. 이에 좌우에서 모시던 사람들이 부축하여 장막 안으로 들어가니‥‥ 이순신의 형의 아들 이완은‥‥그의 죽음을 숨기고서 이순신의 명령으로써 싸움을 독려함이 더욱 급하니, 군중에서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징비록」).5)
순신이 친히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역전을 하던 중에 적의 탄환이 그의 가슴에 맞았다.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그를 장막 안으로 부입(扶入)하였다‥‥ 순신의 형의 아들 완은 그의 죽음을 숨기고 순신의 명으로 싸움을 더욱 재촉하니 군중에서는 순신의 죽음을 알지 못하였다(「선조수정실록」 선조 31년 11월조).6)
(이순신이) 직접 나서서 왜적을 쏘다가 적의 탄환에 가슴을 맞고 배 위에 쓰러졌다. 아들이 울음을 터뜨리려고 하고 군사들은 당황하여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이 때 이문욱(손문욱의 오기[誤記]인 듯[필자 註])이 곁에 있다가 울음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면서 옷으로 시체를 가린 뒤에 그대로 북을 울리면서 나가 싸웠다(「선조실록」 선조 31년 11월 27일조).7)
통제사 이순신이 죽은 뒤로는 손문욱 등이 정황에 맞게 잘 처리하면서 목숨을 내걸고 싸웠다. 문욱이 직접 판옥선 위에 올라서서 적의 형세를 둘러보면서 군사들을 지휘하여 싸움을 독려했다(「선조실록」 선조 31년 12월 18일조).8)
‥‥적이 송희립이 있는 곳을 알아내고 곧 총을 집중적으로 쏘아 댔다. 총알이 희립의 갑옷과 투구에 맞았다‥‥ 공(이순신)이 크게 놀라 일어서는 찰라 겨드랑이 밑에 총알을 맞았다. 선상이 놀라고 황급해 하니 공이 이르기를, "도를 다하기 위해 총을 맞은 것이다" 하였다. 희립이 정신을 차리고‥‥ 옷을 찢어서 이마를 처매고 곧 장좌(將坐)에 돌아오니 공이 숨을 거둔지라. 아들 회가 통곡하려 하므로 희립이 부장(將佐) 여러 사람들에게 도와 줄 것을 명령하고 회의 입을 막아 곡을 못 하게 하였다. 그리고 공의 투구와 갑옷을 벗기고는‥‥대신 기(旗)와 북을 잡고 독전하여 점점 압박하고 몰아내니 비로소 적의 함대가 전열을 잃고 크게 흐트러졌다(임진왜란 당시의 문인이자 의병장이었던 은봉 안방준[1573∼1654]의 「은봉야사별록」의 '노량기사').9)
이상의 검토를 통해, 이순신의 사망 장면을 기록한 사료가 적어도 『이충무공 전서』의 「이분 행장」만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물론 「징비록」과 「선조수정실록」의 경우 위의 사료와 거의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같은 사실에 대하여 「선조실록」은 「선조수정실록」과 그 내용이 서로 판이하게 다르며, 임진왜란 당시 실제로 의병장으로 활동한 안방준이라는 인물이 1627년에 기록하여 1633년에 간행한 「은봉야사별곡」의 '노량기사' 역시 이에 대해 전혀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게다가 그 내용 역시 이순신 사후 손문욱(孫文彧) 혹은 송희립(宋希立) 등 그 참모진에 의해 지휘가 이어졌다는, 전자에 비해 보다 '현실적인' 내용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남천우 씨의 '은둔설'의 가장 중요한 근거 중의 하나인 근거 ④가 사실상 기정 사실이 아닌 하나의 가설임을 입증할 수 있으며, 당시 이순신의 실제 사망 장면이 어떠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논의가 더욱 필요함을 알 수 있다('선조수정실록'은 「조선왕조실록」 중 유일하게 선대의 실록에 대해 부분적으로 수정을 가한 실록으로, 인조 21년[1643]에 대제학 이식[李植]의 상소에 의해 그 필요성이 제기되어 그에 의해 실록 수정이 주도되었다. 하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 '선조실록'과 판이하게 다른 부분이 많기에 그 내용의 정확성과 공정성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게다가 만약 남천우 씨의 주장처럼 이순신의 최후의 모습에 대한 「이충무공 전서」나 「징비록」의 내용이 잘못된 것이라면, 그 사실은 그가 제기한 '은둔설'을 뒷받침하는 것이 아니라 반박하는 근거가 된다. 남천우 씨는 「이충무공 전서」 등의 내용이 의심스럽기에 그것은 이순신의 은둔을 위해 조작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물론 모든 사료가 「이충무공 전서」와 같이 '의심스러운' 내용을 담고 있다면 그러한 주장도 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사료들과는 다를 뿐만 아니라 보다 현실적인 내용을 담은 「선조실록」, 「은봉야사별곡」 과 같은 사료 역시 현존하고 있기에, 이러한 미심쩍은 면을 설명하는 데에 있어서 굳이 '은둔설'이라는 심증에 입각한 가설을 제기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4)'전사설'에 입각한 이순신의 최후의 모습
지금까지 '자살설'과 '은둔설'이 근거로 하고 있는 사실들 및 각 주장의 현실성 여부에 대한 검증을 통해, 위의 두 주장은 아직까지는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하지만 이순신의 사망 경위에 있어서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점을 해결하기 전까지는, 그에 대해 색다른 설명을 시도한 위의 두 주장과 같은 여러 가설들이 끊임없이 제기될 것이다. 전후 상황이나 이순신의 평소 심리 상태 등 여러 심증을 무시한다면, 이순신의 최후의 모습을 담은 모든 사료에 대해 제시할 수 있는 가장 큰 의문점은 바로 이것이다 - 함대의 제독인 이순신이 왜 적의 저격을 받을 정도로 선두에 나섰는가? 그리고 이에 대해 기존의 '전사설'은 명확한 설명을 해 주지 못하는 반면, '자살설'과 '은둔설'은 나름대로의 설명을 시도하고 있다. 즉 '자살설'에 따르면 이순신은 전사를 가장하여 자살하기 위해 일부러 함대의 선두에 나섰다는 것이고, '은둔설'에 따르면 이순신이 선두에 나서서 전사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은둔을 위해 조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 점에 대한 고찰을 중심으로, '전사설'에 입각하여 새로이 이순신의 최후의 모습을 재구성함으로써 기존의 '전사설'을 보완하고자 한다.
우선 총 18차례로 추정되는 이순신 제독의 지휘하의 조선 함대의 해전 중 이순신이 함대의 선두에 나선 경우는 3차례이다. 첫 번째는 사천 해전(1592.5.29)이고 두 번째는 명량 해전(1596.9.16)이며 마지막이 바로 노량 해전(1598.11.19)이다. 그 중 명량 해전의 경우에는 칠천량 해전의 패배 이후 사기마저 저하된 조선 수군으로 하여금 압도적인 규모의 일본 수군에 맞서게 하기 위하여, 함대의 제독인 이순신이 위험을 무릅쓰고 선두에 나서는 것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사천 해전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당시 이순신이 선두에 나선 것은, 해안에서 성을 지키며 총포를 난사한 일본군 중 우리 나라 사람도 섞여 있었기에 이순신이 흥분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먼저 거북선으로 하여금 적선이 있는 곳으로 돌진케 하여 먼저 천·지·현·황 등 여러 종류의 총통을 쏘게 하자, 산 위와 언덕 밑과 배를 지키는 세 곳의 왜적들도 철환(鐵丸)을 비오듯 난발하는데, 간혹 우리 나라 사람도 섞여서 쏘고 있었습니다. 신은 더욱더 분하여 노를 빨리 저어 앞으로 나아가 바로 그 배를 두들겼습니다('唐浦破倭兵狀').10)
이 해전에서 일본 수군은 함선 12척 모두를 잃은 반면, 조선 수군은 부상자 3명을 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 부상자 3명이 모두 조선 수군의 기함, 즉 함대의 선두에 나섰던 이순신이 탑승한 함선에서 나왔으며, 그 중에는 이순신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언제나 냉철한 자세를 견지한 완벽한 제독의 이미지와 함께, 이처럼 가끔씩은 감정적인 - 즉 인간적인 - 면도 존재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노량 해전은 바로 이 사천 해전과 거의 비슷한 양상이었다. 노량 해전은 7년에 걸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기간 동안의 최후의 해전이었다. 물론 '최후의 해전'이라는 말에 특별한 의미를 두는 것은 후세 사람들일 뿐이지만, 당시 이순신으로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술렁거리기 시작한 일본군 전체의 정세를 눈치챘을 것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조·명 연합군은 노량 해전에 앞서, 왜교에 주둔한 고니시 군이 해상 경로를 통해 본국으로 철수하는 것을 저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전쟁의 막바지에 고니시 군을 지원하기 위해 출동한 대규모의 일본 수군에 맞서 싸우는 이순신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부상과 노환, 연일 계속된 전투와 격무로 인해 쇠약해진 몸, 2번째 백의종군과 어머니와 아들의 죽음 등으로 인해 흔들리는 마음가짐, 이러한 개인적 고뇌를 마지막으로 이 한 번에 떨치고자 이순신은 노량 해전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선두에 나섰을 가능성이 크다.
오후 여섯 시쯤 적선이 남해에서 무수히 나와서 엄목포에 정박해 있고 또 노량으로 와 대는 것도 얼마인지 알 수가 없다‥‥ 자정에 배 위로 올라가 손을 씻고 무릎을 꿇고 "이 원수를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유한이 없겠습니다"고 하늘에 빌었다.11)
그리고 노량 해전은 지금까지의 이순신과 조선 수군이 겪어 온 해전과는 성격이 다른 전투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전체 기간에 걸쳐 이순신이 견지해 온 전략은 출항통제(出港統制)와 협수로통제(狹水路統制)였다. 출항통제는 경상도 해안의 각 포구에 정박한 일본 수군의 소함대를 기습적으로 각개 격파하는 것이며, 협수로통제는 일본 수군의 대함대가 전라도 남해안 혹은 서해안으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그 통로가 되는 좁은 수로를 막아서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이것들은 적극적이면서도 엄연히 수비 전략이었으며, 그것은 전쟁 기간 내내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에 비해 규모에서 뒤졌기에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이순신은 조선 수군이 해전 이후 전과 확대에 몰두하느라 도망가는 상대를 무리하게 추격하거나, 한 전역(戰域)에 오래 머물러 있다가 적에게 역습을 당하지 않도록 하였다.
하지만 노량 해전의 경우에는 그 성격이 전혀 달랐다. 조선 수군과 마찬가지로 일본 수군도, 왜교의 고니시 군에 대한 해상 봉쇄망을 뚫기 위해 이 해전에 필사적으로 임했다. 게다가 양측의 병력 역시 일본 수군이 함선 500여 척에 병력 60,000여 명, 조·명 연합 수군이 함선 146척에 병력 19,600여 명의 대병력이었으며, 이는 전체 전쟁 기간 동안 칠천량 해전과 맞먹는 최대 규모의 해전이었다. 즉 노량 해전은 시기적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기간에 걸쳐 마지막으로 벌어진 해전일 뿐만 아니라, 참여한 병력 및 양측의 마음가짐 면에서도 사실상 전쟁을 마무리하는 함대 결전(決戰)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유일하게 이 해전에서 이순신은 도망가는 적 함대를 추격하여 전과 확대를 꾀하였고, 그를 통해 적선 200여 척을 격침할 수 있었다(또한 100여 척을 나포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순신이 주로 구사하였던 전술이 원거리 포격 전술이었기에 신빙성이 부족하다 하겠다).
이상을 통해 우리는 이순신이 함대의 선두에 나섰다는 사실이, 전사를 위장하여 자살하기 위한 것이었다거나 은둔한 사실을 감추기 위해 조작된 사실이라는 주장과는 달리, 상당 부분 현실성을 갖춘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이순신은 7년간의 전쟁을 마무리하게 될지도 모르는 해전에 임함에 앞서 필사의 마음가짐을 다잡았으며, 역시 필사적인 자세로 전투에 나선 일본 수군과 최후이자 최대의 함대 결전을 치렀다. 그리고 승세를 몰아서 퇴각하는 적 함대를 추격하는 와중에 무의식적으로 함대의 선두로 나섰을 가능성이 크며, 그로 인해 유탄에 맞아 전사할 가능성도 커졌을 것이다.
물론 다른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이순신이 함대의 선두에 나서지 않고도 전사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노량 해전에 참여한 명의 수군은 작은 함선 63척에 병력 2,600명에 불과했으며,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의지도 적었다. 그들 중 도독인 진린(陳璘)과 등자룡만이 판옥선을 타고 선두에 나서서 싸웠을 뿐이었다. 그리고 「징비록」과 「은봉야사별곡」 등의 사료에 따르면, 조선 수군이 전투 중 적선에 포위된 진린을 구해 주었다고 한다. 특히 「은봉야사별곡」에 따르면 이순신이 친히 기함을 이끌고 진린을 둘러 싼 포위망을 풀어 주었으며, 그로 인해 기함의 위치가 발각되어 적의 집중 공격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적선이 당선(唐船, 明軍兵船)으로 모여들었다. 도독이 포위되고 말았다. 공이 마지막 사력을 다해 포위된 아군 선단을 풀었다‥‥ 적이 흐트러지는가 하더니 다시 모였다. 그리고 적이 송희립이 있는 곳을 알아내고는 곧 총을 집중적으로 쏘아댔다. 총알이 희립의 갑옷과 투구에 맞았다‥‥ 공이 크게 놀라 일어서는 찰라 겨드랑이 밑에 총알을 맞았다.12)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덧붙여 보겠다. 노량 해전 당시 조선 수군은 밤 1∼3시(四更) 무렵에 노량 해협에 이르렀다. 그리고 새벽 4시 무렵에 관음포 앞 바다에서 500여 척의 일본 수군과 맞서 싸워, 그들을 관음포 안으로 밀어붙였다. 그리고 좁은 관음포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당시 조선 수군은 원거리 포격 전술뿐만 아니라, 갈고리로 적선을 끌어 들여 불을 지르거나 가라앉히는 등 육박 전술도 감행하였다. 그리고 그 와중에 아침이 되어 해가 떠올랐는데, 「이순신과 히데요시」의 가다노 쯔기오(片野次雄) 씨는 일출 시간인 이 무렵에 이순신이 저격당했다고 주장한다.
격전이 한창인 중에 날이 밝았다. 사방이 밝아지자 근접 거리에서 쏘는 사수에게는 표적이 훨씬 분명히 보이게 되었다. 순간 기함의 사령탑을 노리고 총화가 맹렬히 집중됐다‥‥ 정확하게 이순신을 노리고 쏜 한발의 탄환이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이순신의 몸에 꽂혔다.13)
이 두 주장에 따르면, 이순신의 기함이 굳이 선두에 나서지 않아도 그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는 것이 충분히 개연성을 갖추게 된다. 즉 이순신이 친히 기함을 이끌고 진린을 도와 주었다가 그로 인해 기함의 위치가 발각되어 집중 공격을 당했을 수도 있고, 적과 아군이 뒤엉킨 혼전 중에 떠오른 태양으로 인해 기함의 지휘소가 확연히 드러나면서 적의 공격에 노출되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러한 주장들은 그 기반에, 이순신의 죽음은 '전사'라는 의식이 강하게 깔아 두고서 제기된 것들이다. 하지만 이를 통해 나는 이순신의 최후의 모습을 굳이 '자살'이나 '은둔'이라는 심증에 기반한 주장으로 설명할 필요는 없으며, 여러 사료와 해전 전후의 상황을 통해서도 이순신의 '전사'는 확고한 사실임을 재확인하고자 한다.
3.결론 - '자살설'과 '은둔설'의 등장 배경 고찰
이상을 통해 우리는 이순신의 '자살설'과 '은둔설'이 사실상 비현실적이거나 근거가 부족한 하나의 가설일 뿐이라는 것을 입증해 보았다. 물론 위의 본론에서 나는 남천우 씨가 제시한 근거 ⑤에 대해 반박하지 못하였다. 나 역시 어째서 이순신의 장례가 그토록 미루어졌는지, 그리고 왜 15년 뒤에 묘지가 이장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함부로 예상하기가 힘들다. 단지 전후의 혼란으로 인해 제대로 된 장례를 치르지 못했으며 그렇기에 후일에 다시 묘지를 이장하였다고 가정하기에는 근거가 부족하다. 이에 대해서는 위의 근거 ④와 마찬가지로, 이순신의 사망 후의 장례 과정에 대한 더 많은 사료 발굴이 필요하다 하겠다.
그렇다면 기존의 '전사설'에 대해 하나의 이견이라 할 수 있는 '자살설'이나 '은둔설'은 어찌하여 등장한 것일까. 일단 첫 번째 이유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순신의 사망 장면에 대한 여러 사료의 일관되지 못한 기록 때문이다. 위에서 살펴 본 사료에서 공통된 부분이란, 1598년 11월 19일 새벽에 이순신이 '전사'하였다는 내용뿐이며, 그 이후의 지휘권 이양이나 전투 지휘 상황에 대한 기록에서는 저마다 다른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견이 등장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다름 아닌 이순신의 인생과 죽음에 대한 '음모 이론'과 그에 대한 '동정론'일 것이다. 알다시피 이순신은 삼도 수군 통제사, 오늘날로 하면 해군 참모 총장이라는 최고의 지위에서 대역 죄인으로 몰려 일개 병졸로 백의종군하게 되는 극적인 삶을 살았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한 번도 해전에서 패배한 적이 없으며 실제로 임진왜란 전체의 승리의 양대 축이 되었던 이순신 제독이 역적으로 몰려서 고문을 받고 강등되는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때문에 남천우 씨는 그 이유로 선조라는 한 인물의 시기심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설령 이순신이 '전사'하지 않았을 지라도 후에 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으며, 이를 막기 위해 이순신은 은둔하였을 것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자살설'을 주장하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 관점을 가지고 있으며, 다만 그의 죽음에 있어서 보다 극적 비장미와 동정심을 더하면서, 그와 동시에 무능한 선조와 조정 대신에 대한 비난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자살'이라는 설명 방법을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살설'과 '은둔설'이 근거로 삼고 있는 사료들 외에도 그와 기록된 내용이 서로 다른 사료들이 현존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성급한 결론을 내리기 힘들다는 것은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다. 게다가 사료들 간의 그러한 차이를 해석하기 위해, '음모 이론'과 '동정론'이라는 극히 주관적인 관점을 내세우는 것 역시 잘못이라고 본다. 오늘날의 사법 체계의 공정성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이순신이라는 인물에 대해 우리에게 각인된 인식으로 본다면, 이순신을 역적으로 몬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발상이다. 하지만 당시의 정부는 전제 봉건 정부였으며, 왕권의 강화와 현 체제의 유지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지상 과제였다. 이를 무시하고서 단지 한 개인의 검증되지 않은 '시기심'을 통해 이순신의 미래에 대해 '음모 이론'을 도출하고, 이에 대한 동정심의 발로에서 다양한 사료들 중 어느 한 쪽의 견해만을 지니고 있는 사료를 선택적으로 선택하여 '자살설'이나 '은둔설'이라는 주장을 전개한다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현재의 사료에 입각해 볼 때, 아직은 '자살설'이나 '은둔설'과 같은 이견이 기존의 '전사설'을 뒤집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점을 주장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