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황제는 왜 치우와의 전투 이후에 숨듯이 지냈을까
치우천황은 기원전 2706~2598년간 생존하였으며 배달국의 도읍을 청구(산동반도에 소재)로 옮겼다. 치우천황은 중국의 하북, 하남, 산동, 강소, 안휘, 절강설까지 영토를 크게 확장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동방을 대통일하였다.
중국의 시조로 알려지고 있는 황제 헌원(기원전 2692~2593년)과 그 유명한 탁록(涿鹿, 하북성 소재)에서 10년간 73회의 전투를 벌여 마침내 그를 사로잡아 신하로 삼음. 그후 동아시아에서는 치우천황의 이름만 들어도 무서워했고, 그를 무신(武神)의 원조로 섬기게 됨. 한고조 유방도 무신의 원조인 치우천황에게 제사지낸 후 군사를 일으키며, 항우에게 이긴 뒤에는 치우천황의 사당을 장안(지금의 서안)에 짓고 더욱 공경함(이 사당은 지금도 존재함).
사마천의「사기」에는 헌원이 치우천황을 사로잡아 살해하였다고 사실을 거꾸로 왜곡조작하여 기록(만약 사마천이 사실이라면 왜 유방은 치우천황을 모셨을까?) 이것은 중국 특유의 못된 버릇 때문이다. 주로 역사에서 남의 조상은 내리고 자신의 조상은 올리는 비열한 방법으로 역사를 기술하는 습성 �문이다.
치우천황이 큰 활(大弓)을 만들어 썼으므로 큰 활의 위엄을 대단히 두려워 하였고, 이때(지금부터 4700년전)부터 동방의 배달민족을 ‘큰 활을 잘 쏘는 동방사람’이라는 뜻으로 동이(東夷: 夷=大 +弓)라 부르게 됨. ‘동이’가 오랑캐 또는 야만족으로 불리게 된 것은 그 후 중국중심의 세계관에 의해 주변 민족을 멸시하고 왜곡날조한 데 따른 것이다. 중국의 역사서에도 ‘동이는 동방의 대인군자국’이라 찬양하고 있고(「설운」,「후한서」,「예기」,「산해경」), 공자는 동이에 가서 살고 싶다고 까지 하였다. 또한 ‘동이’는 우리민족의 본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민족으로서 중국에 들어가서 중국땅(산동성, 하북성, 강소성, 절강성, 복건성 등)을 개척한 민족을 의미한다.
갈로산·옹호산에서 캐낸 쇠로 칼, 창, 활촉, 투구, 갑옷 등을 만들어 썼으니, 우리나라는 4700년 전에 이미 청동기 시대에 들어가 있었으며, 철을 다루는 고도의 기술이 발달함(철제무기를 최초로 사용). 그 증거로 과학적인 한국 고유의 청동기 유물은 중국과는 다른 독특한 합금법을 사용하여 일반적으로 청동은 구리, 주석에 납을 포함시키는 방법인 데 반해, 우리의 청동에는 아연이 더 포함되어 있다. 청동은 1000℃까지 가열해야 액화되는 반면, 아연은 900℃가 되면 증기로 날아가 버리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두 금속을 녹여 섞는 일은 고도의 기술이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함. 그러나 한민족은 이 기술을 개발하여 사용하였다.
철(鐵)의 고대 글자는 쇠금변(金)에 동이족의 이(夷)자를 쓴 銕자임. 이것은 철(銕)이라는 글자에서 입증되듯이 동이족이 인류역사상 최초로 철의 제련법을 개발하여 철제무기를 사용했음을 의미함. 銕자가 鐵자로 바뀐 것은 고구려가 당에 패한 후 중화족이 바꿨기 때문이다.
당시 치우천황의 국사(國師)인 자부(紫府) 선사는 헌원에게「삼황내문」을, 창힐에게는 문자를 가르침. 신교의 대도를 전수받은 황제 헌원은 ‘황노학(黃老學)’이라 불리는 도교의 시조가 됨.
96. 8월 SBS가 방영한「왕도의 비밀」에서는 치우천황이 황제에게 패했으며 이후 동이족이 쇠퇴한 것으로, 단군조선의 역사는 신화인 것으로 설명했는데 이것은 잘못된 설명이다.
추가로 ‘배달’의 뜻에 대해서 설명을 하면, ‘달(박달)’의 뜻에서 음이 바뀐 것이다. 달이라는 것은 ‘밝은 땅’이라는 뜻이며, 밝은 땅. 우리가 지금도 ‘달’이라는 것은 ‘땅’의 뜻으로 쓰고 있다. 우리가 양지바른 따을 ‘양달’이다. 그늘진 땅을 ‘음달’이다. 기울어진 땅을 ‘비탈’이다 하듯이, 이 ‘달’에는 땅의 뜻이 있다. ‘’이라는 것은 ‘밝다’,‘광명하다’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늘의 광명이 비친 밝은 땅’이라는 뜻이 달입니다. 여기에서 배달국을 ‘박달나무의 단(檀)’이라 해서 ‘단국’이라 애기할 수도 있다. 이 배달국은 1565년 동안 지속이 되며, 배달국을 통치한 임금 환웅(桓雄)은 ‘광명의 스승’이라는 뜻이 있다.
윗 내용은 대표적인 우리나라에서 믿고 있는 치우천황입니다.
중국� 사료엔 대부분 치우천황을 패자이며 나쁘게 묘사했습니다.
허나 우리가 주장하는 사료는 대부분 치우천황을 승자이며 현자로 묘사했습니다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워낙 오래된, 단군조선 보다 훨씬 전의 일이기에 역사적 사료도 부족하고,
신화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중국측의 사료엔 모두 치우천황을 패자이며 나쁘게 묘사했는데도 불구하고
치우천황에게 제를 지냈다는 몇 개의 자료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한고조의 유방이 치우천황에게 제를 지냈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보다 중국측 사료가 다소 왜곡?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패자에게 제를 지내는 바보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