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대사
대한민국의 위기에서
사명대사를 그리워한다
李法徹(www.jabg.net)
눈물 흘리는 사명대사의 비석
임난(壬亂)의 국구의 승장(僧將)사명대사는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일편단심이 되어 호국의 수호신이 된 분이다. 사명대사는 가끔씩 자신의 비석을 통해 경이로운 기적을 보여준다. 국가가 위기에 처하면 사명대사의 비석에 백성에게 나라사랑을 촉구하는 것 같은 사명대사의 눈물 같은 물을 보여준다.
사명대사의 비석은 당시 조정에서 사명대사의 구국의 공로를 인정하여 사명대사의 탄생지인 밀양에 표충사(表忠祠)라는 편액을 내리고 사당을 지어 매년 제향을 받들게 하며 비석을 세웠고, 또 사명대사가 만년에 주석하시다 입적하신 합천 해인사 홍제암에 사명대사의 진영(眞影)과 사명대사의 행장이 담겨있는 비석이 있다. 두 곳의 비석에서 사명대사의 눈물의 전설이 내려온다.
작금의 대한민국의 현실은 국가의 정체성이 나날히 훼손되는 위기에 봉착해 있다. 김일성을 민족의 태양으로 존중하고 김일성의 정책을 ‘햇볕정책’이라고 생각하여 실천하는 좌파 친북 정치인의 음모 때문에 대한민국이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에 좌파의 총숙주(總宿主)와 같은 자는 과거 해방직후 공산당 목포시 선전부장을 역임한 DJ이다. 숙주는 타인의 몸속에 기생하여 타인의 육체를 뜯어 먹으며 성장하면서 마침내 타인을 죽이고 타인의 몸에서 나와 본모습을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DJ는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터전에서 좌파 친북정치인의 숙주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입만 열면 민주화요, 인권을 외쳐댔다. 그의 말에 현혹된 일부 국민들이 그를 대통령으로 선출해주었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이 되자 숙주로서의 본연의 모습을 적라라하게 보여주었다. 조국통일을 갈망하는 대한민국 국민들을 기망하여 기울어져가는 김정일정권의 체제유지에 혈안이 되어 달러와 쌀 등 물자를 퍼주기 시작한 것이다. 김정일정권이 오매불망 대남적화를 하려고 선군정치로 북핵(北核)을 만드는데 크게 일조를 하는 군수보급 참모노릇을 실행해보인 것이다.
DJ는 친북 좌파의 행동은 김일성의 충성동이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DJ는 조직적이요, 원모심려하게 김정일에게 대를 이어 충성을 하기위해 자신의 국가원수통치기간은 물론이요, 후계자인 노무현정권을 하수인을 삼아 조종하여 역시 김정일정권에 대해 군수보급참모노릇을 하고 있다. 그러나 노정권의 임기가 끝나가자 또다시 자신을 대리하는 하수인을 오는 대선에 대통령으로 만들어 또다시 친북 정치의 극치를 조성하려고 획책하고 있다. 친북정치의 극치는 조국통일이라는 미명으로 국민을 기망하여 대한민국을 통째로 김정일정권에게 헌납하려고 획책을 하고 있다. DJ가 획책하는 조국통일은 다시 말해 김일성왕조에 대한민국을 헌납하는 한국최대의 매국이적행위이다. 과거 한국전 때 인민군은 총칼로서, 지방 빨갱이들은 죽창과 칼 등을 들어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사람, 제 마음에 안드는 대한민국 국민들을 도륙(屠戮)한 것을 우리는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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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를 장악한 친북 좌파 정치인들의 비호속에 재야의 친북 좌파들의 맹활약으로 대한민국은 이제 총성없는 내전이 벌어진지 오래이다. 북핵에 앞서 죽창이 난무하는 시대를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대한민국의 통치자는 대한민국과 국민을 보위하기 위해 신명을 바쳐야 할 것이다. 그러나 DJ나 노무현은 대한민국 국민이 대통령으로 선출해주었지만 국민을 이용만 할 뿐 감사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증거가 국민에게 조국통일의 환상을 심어주고 국민의 고혈를 착취하듯이 각종 세금을 인상 부과 착취하여 김정일정권의 체제유지와 선군정치를 돕고 있다. 청년 백수가 233만이 넘고, 2만여명이 생활고에 자살을 하고, 나날히 노숙자가 늘어도 오불관언이다. 오직 민세금을 착취하여 첫째 김정일의 호주머니에 찔러주고, 또 한켠은 친북 좌파들을 육성하기 위해 국민세금을 뿌리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의 민생경제는 오래전에 바닥을 치고 있다. 그것은 첫째, 10년 가까이 햇볕정책으로 국부(國富)가 새고, 좌파정권의 극성으로 인해 불안감에 빠진 자들이 마치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하려는 쥐떼처럼, 국부(國富)를 해외에 유출시키어 이르러 서민경제에 적신호가 오른 것이다. 서민경제는 바닥을 치는 지경에 호황을 누리는 곳은 친북위정자의 후원을 받는 좌파들이다. 그들은 친북 위정자로부터 천문학적인 자금을 지원받아 호주머니가 두둑한 판에 김정일정권이 바래는 구호인 첫째, 미군철수와 둘째, 북핵에 대해 열패감을 갖게 하여 김정일정권에 굴복시키려고 민심을 더욱 흉흉하게 만들고 있다.
오늘의 이 땅의 승려들은 각성해야 한다. 종교의 자유가 있는 대한민국이 멸망하면 불교는 존재할 수 없게 되고 만다. 저 북한처럼 모든 사찰은 국유화되고, 모든 승려는 인민재판에 의해 숙청되어 작게는 강제환속, 크게는 처형되고 만다. 이 땅의 승려들이 앞장 서 일반불교인들과 함께 불교를 만세에 전하려면 종교의 자유가 있는 대한민국을 결사 보위해야 할 것이다.
종교의 자유가 있는 대한민국이 친북 좌파에 의해 정체성이 위협받는 위기의 때에 사명대사가 각성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한다. 사명대사가 말년에 주석하시다가 입적한 합천 해인사 홍제암에 세워진 사명대사의 비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이다. 국가에 불길한 변란이 예견될 때마다 그 징조로 사명대사의 비석은 마치 눈물을 흘리듯이 보여왔다. 이번에는 무슨 메시지일까?
나라와 민족을 일편단심으로 사랑하여 호국의 수호신이 되어 피눈물같은 눈물로서 후생의 각성을 촉구하는 사명대사 추모하며 행장(行狀)을 생각해본다.
승과고시, 선과(禪科)에 장원급제한 사명대사
불살생(不殺生)은 불교의 수행자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지엄한 불교의 계율이다. 그러나 독사가 인간을 해치려할 때는 가차 없이 독사를 죽여야 한다. 인간의 생명이 독사보다 더 귀중하기 때문이다. 나라와 민족이 외적의 침략에 의해 패망되고 도륙(屠戮)되는 위기에 처하면 불살생의 계율을 파하더라도 나라와 민족을 구해야 하는 것이 불교의 대승적 판단이다. 임진왜란 때 나라와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사명대사는 스승인 서산대사의 구국의 뜻을 봉대하여 전쟁터로 향했다.
사명대사의 속성(俗姓)은 풍천임씨(豊川任氏)요, 이름은 유정(惟政)이며, 자(字)는 이환(離幻)이고, 호는 종봉(鍾峯)? 송운(松雲) 또는 사명(四溟)이라 하고,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라 한다. 조선조 중종 39년(서기 1544년) 갑진(甲辰) 10월17일에 밀양의 삼강동에서 이버지 임수성(任守成)과 어머니 달성서씨(達城徐氏)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사명대사의 증조부 효곤(孝昆)은 문과에 급제하여 장악원정(掌樂院正)이며, 조부는 괴과(魁科)에 급제하여 강계부사를 지낸 것을 보아 사명대사의 가문은 소위 족보가 있는 집안이 분명하다. 그러나 부처님을 위시하여 조사들이 일찍 부모를 사별하여 그 충격으로 출가위승(出家爲僧)의 동기가 되었듯이 사명대사 역시 일찍이 부모를 사별하는 비운을 겪었다. 사명대사가 갑오년 9월에 선조임금에게 올린 상소문에는 “신은 풍천임씨의 후예로서 조부 때 영남 밀양에 이적(移籍)하여 밀양부민이 되어 살았는데 불행하게도 신의 나이 15세 때에 어머니를 여의고 연달아 16세 때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니 거목무친(擧目無親)이요, 고경혈립이라 드디어 무부무군(無父無君)의 한 죄인으로 부평초 같은 신세가 되어 산림에 들어가서 생애를 운조(雲鳥)와 함께 하였습니다.”라는 것을 보면 사고무친(四顧無親)의 신세가 되어 불문에 의지한 것 같다. 사명대사는 김천의 황악산 직지사에 소년시절 입산하여 신묵화상(信默和尙)의 제자가 되어 촌음을 아끼어 수행정진 하였다.
당시 불교계는 억불숭유(抑佛崇儒)의 조정의 정책속에서 박해속에 신음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심깊은 문정왕후가 어린 아들 명종이 12세에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게 되었고, 문정왕후는 자신이 신앙하는 불교를 중흥시키고자 승려 인재를 널리 구하였다. 이때 강원 감사 정만종(鄭萬鍾)이 설악산 백담사에서 수행정진하고 있는 보우대사(普雨大師)를 천거했다. 문정왕후는 보우대사를 불러 봉은사주지로 기용했다. 다시 문정왕후는 선?교(禪?敎) 양종(兩宗)의 수사찰(首寺刹)을 일으키고 보우대사는 판선종사도대선사(判禪宗事都大禪師) 봉은사주지로 하고, 보우대사가 천거한 일진대사(日眞大師)를 판교종사도대사(判敎宗事都大師) 봉선사주지로 삼아 선교 양종의 승과(僧科)와 도첩을 부활시켰다. 당시 봉은사에서 행한 선과(禪科)에는 서산대사가 급제하여 대선(大選)이 되었고, 이로부터 10년후 명종 16년, 사명대사는 불과 18세의 나이로 선과에 장원급제를 하니 불가의 칭송은 물론이요, 유학계의 학사대부(學士大夫)와 시인들로서 사암박순(思菴朴淳), 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 제봉 고경명(霽峰 高敬命), 가운 최경창(嘉運 崔慶昌), 하곡 허미숙(荷谷 許美淑), 백호 임제(白湖 林悌), 손곡 이익지(孫谷 李益之)와 같은 분들이 모두 사명대사와 더불어 즐겨 시를 주고받았고, 사명대사의 시문을 모은 책이 칭송속에 유행하였다. 또 사명대사는 당대 거유인 기고봉(奇高峯)으로부터 층고와 권장을 받아 불교내전을 뛰어넘어 노자, 장자, 열자 등과 이태백과 두자미(杜子美)등도 배워달통하게 되어 그 문장이 날로 발전하였다. 이 소문은 전국의 불가에 퍼졌고 사부대중은 입을 모아 칭송했다.
구국의 전선에 뛰어든 사명대사
노자는, “사람은 공을 이루고 이름을 얻게 되면 그 직임에서 물러나 한가로이 몸을 갖는 것이 천도(功成名遂身退天之道)”라고 말했다.
사명대사는 서산대사와 함께 조선팔도의 승려들에게 조국수호의 격문(檄文)을 보내어 승병을 모집, 왜군에 맞서 싸우고 전란이 끝나자 조정에서 내린 관작을 미련없이 버리고 본연의 자세인 산승으로 돌아갔다. 사명대사의 일화를 적은 밀양 표충사에 있는 ‘밀양표충사송운대사영당비문’에는 사명대사가 선조 27년(갑오년)4월, 7월, 12월의 3차에 걸쳐 왜군 사령관 가요마사(淸正)을 만나 조선침략에 대한 부당성에 대하여 쟁변(爭辨)했다. 그 때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온다. 가등청정이 사나운 얼굴로 사명대사에게 물었다.
“조선에 보배가 있습니까?”
“우리나라에는 보배가 없습니다. 보배는 일본에 있습니다.”
“어찌하여 보배가 일본에 있다는 말이요?”
사명대사는 손으로 들어 가등청정의 머리를 가리키며 태연히 답했다.
“장군의 머리에는 큰 상금이 걸려 있어서 우리나라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장군의 머리를 베고자 하니 장군의 머리가 보배이지 않습니까?”
사명대사의 말을 들은 가등청정은 놀라 돌연 얼굴이 창백해지며 부들부들 떨었다고 한다. 사명대사와 가등청정의 대화는 조선과 일본에까지 인구에 회자되었다. 조선으로 출병한 일본군과 본국의 일본군, 일본의 조야(朝野)에까지 퍼졌다. 일본인들은 점령군의 사령관인 가등청정과 사명대사와의 보배론에 대하여 박장대소를 하고 사명대사를 존칭하여 ‘설보화상(說寶和尙)’이라고 부르며 웃음속에 기개를 칭송해 마지않았다.
일본은 조선침략의 원흉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새로운 실권자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등장했다. 일본조정은 조선과 화친하기를 위협적으로 강요해왔다. 조선의 조정에서는 일본이 두려워 사신으로 나가려는 정치인이 없었다. 왜란이 끝나고 강산에 평화가 찾아왔으나 정치인들은 여전히 당파싸움의 연속이었고, 일본이 두려워 사신을 보내지를 못하고 좌고우면(左顧右眄)으로 수년을 허비하다가 선조 37년 6월, 비로서 사명대사를 통신사(通信使)라기 보다는 불교적의미를 부여하여 널리 일본을 제도(普濟扶桑)한다는 취지에서 파견하는 한심한 외교적 작태를 부렸다.
그러나 사명대사는 일본에 건너가자 일본인들은 유명한 “설보화상”이 왔다고 하여 대대적인 환영을 하였다. 일본의 조정은 물론, 승려들, 귀족, 평민들은 사명대사의 시문(詩文)을 구라혀고 앞다투었고, 사명대사의 인격과 문장은 숭앙과 격찬을 받았다. 이에야스의 장자 히데야스(당시 32세)는 사명대사에게 선학(禪學)을 묻고 스승으로 예우를 하였다. 사명대사는 혁혁한 외교성과와 함께 귀국길에 일본군에 강제 끌려간 포로 3천6백여명을 데리고 귀환하여 조선의 조정과 백성을 놀라고 감탄하게 하였다. 임금은 사명대사의 초인적인 외교능력과 구국의 단심(丹心)에 보답하기 위해 영의정을 하사했으나, 사명대사는 신하로서 군명(君命)을 어길수는 없다하여 따랐으나 3일만에 관직을 버리고 해인사 홍제암으로 돌아가버렸다. ‘공을 이루면 물러나야’한다는 것을 실천해보였으니 어찌 구국의 성사(聖師)라고 존경하지 않을 것인가.
사명대사의 열반
사명대사는 입적하기 전에 사부대중을 불러 마지막 말씀을 이렇게 했다고 한다. “지,수,화,풍(地,水,火,風) 네가지 요소로 된 이 몸은 이제 진(眞)으로 돌아가려 한다. 무엇하러 번거로이 오가면서 이 허깨비의 몸을 괴롭히겠는가. 나는 죽음에 들어 큰 조화에 순응하려 한다.”하고 몸을 깨끗이 씻고 옷을 깨끗이 가사장삼을 입고 정좌하여 고요히 입적하니 세수 67세였다. 사명대사의 제자 해안이 지은 사명대사의 행적문을 인용하면, "사명대사가 가야산에 들어 병을 치료하고 있을 때 임금은 여러번 약을 내리고, 경술년 가을에 임금이 염려하시어 서울에서 치료하게 하려고 방백(方伯)으로 하여금 치송하라“ 하기도 했으나 사명대사는 고사하였다고 한다.
사명대사에 관한 기이하고 신통한 전설이 많이 내려온다. 홍제암에는 국가가 위기에 처하면 사명대사의 비석에서는 어김없이 눈물같은 가느다란 물줄기가 비문 사이로 흘러 내리는 것그 하나이다. 독자 여러분이 사명대사가 열반한 홍제암을 찾는다면 첫째, 사명대사의 진짜 영정(影幀)을 친견할 수 있다. 둘째, 부도전에 가장 큰 비석인 사명대사의 비석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비석을 살피면 크게 네 조각으로 부서진 것을 볼 수 있다. 사명대사의 비석이 네 조각으로 부서진 사연이 있다. 한일 합방 후 일제 36년 강점기간에 일본인 합천 경찰서 서장이 조선사람의 가슴에 살아있는 호국불교사상, 즉 사명대사의 호국사상을 철저히 말살하기 위해 비열하게도 홍제암 부도전에 모셔진 사명대사의 비석을 큰 망치로 내리쳐 네 조각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날 밤 일본인 서장은 코와 입에서 피를 내뿜고 쓰러져 죽고 말았다는 전설이 있다.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의 행장에는 기이한 공통점이 있다. 두 분 대사는 지금의 북한 땅에 있는 사찰에서 오랜세월 수행과 전법을 한 분이다. 서산대사는 묘향산에 주적하다가 입적했다. 사명대사는 금강산에 오랜세월 주석했다. 그런데 서산대사는 입적하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상한 유촉(遺囑)을 했다. “장차 이곳 북쪽은 불교의 흥왕을 기약할 수 없는 세상이 올 것이다.” 고 전제하며 “나의 유품은 불법이 보전되는 남쪽의 대흥사로 옮기라”고 명했다고 한다. 그래서 서산대사의 유품은 모두 지금의 해남 대흥사 유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사명대사도 금강산을 떠나 합천 해인사 홍제암에서 입적했다. 두 분 구국의 성사(聖師)는 훗날 북한 땅에 김일성패들이 불교를 말살하려는 것을 미리 예견하신 것 같다. 서산대사가 주석한 사찰과 사명대사가 주석한 사찰에는 이제는 삭발위승한 승려는 단 한 명이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유발(有髮)의 양복장이가 홍가사를 입고 자신이 승려라고 자처하고, 관광 안내원 아가씨들이 역사를 안내할 뿐이다. 간경하고, 참선하며, 염불하는 승려는 단 한 명이 없다.
대한민국에서는 표충사에서 해마다 때가 되면 관민합동으로 서산, 사명대사의 제향을 받들고 경의를 표한다. 미래를 통투(通透)하는 서산, 사명대사의 혜안에 경탄을 금치 못한다.
끝으로, 이 땅의 사부대중들은 서산, 사명대사의 호국사상을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 나라가 태평할 때는 신명을 바쳐 수행정진과 중생구제에 나서고, 나라와 민족이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위기에 처하면 신명을 바쳐 부처님의 불살생계를 파하면서라도 구국전선에 나서야 할 것이다. 나라와 민족을 구하여 천하가 태평하여 지면 옛 스승들이 보인 호국사상의 실천을 전감(前鑑)삼아 신수공퇴(身遂功退)하여 재가자는 생업에 종사하고, 출가자는 역시 신명을 바쳐 부처님이 깨달으신 무상정등정각을 깨닫기 위해 수행정진하고 중생구제에 나서야 할 것이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김일성왕조를 만대에 전하려는 김정일정권의 대남적화의 야욕과 김정일의 하수인들인 친북 정치인들의 음모로 위기에 처해있다. 2000만 불교인들은 불교의 호국사상으로 총궐기하여 공산도배들로부터 나라와 민족을 구하는데 앞장 서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