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런 선조

[스크랩] 친구의 과거 급제를 취소당했다는 소식을 듣고-권필(權韠)

스타도나 2008. 10. 8. 17:57

                               과거 시험장 재현의 모습

 

광해군(光海君1575~1641)때 1611년 봄, 과거시험이 치러졌다. 임숙영(任叔英)도 급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임숙영의 답안지를 본 광해군은 과제와는 관계없는 답안을 작성한 것이니 합격을 취소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당시 광해군의 처남이었던 유희분(柳希奮 1564∼1623)이 광해군과 어울려 전횡을 저지르고 있던 때였다. 임숙영은 출제된 문제를 제쳐 놓고 이런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내용의 답안을 썼다. 태평성대(太平聖代)라면서 임금에게 아첨을 하지만, 그때 한 선비의 입에서 위태롭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한 것이다. 과거 채점관들은 많은 생각에 빠졌다. 출제자의 의도를 무시했다는 점은 낙방이었지만, 그러나 그의 글이 너무도 명문이었다는 것이다. 논의 끝에 고시관들은 그의 답안을 높이 평가하여 과거에 급제시킨 것이다.그 내용을 뒤에 알게 된 광해군은 신하가 어떻게 과거 답안지에서 왕을 비난할 수 있느냐면서 임숙영의 합격을 취소하도록 했다. 그러나 승정원을 필두로 해서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과 나라의 원로인 부원군들 까지도 연일 그 명령을 거두어 달라고 요청을 했다. 결국 그 해 가을이 되어서야 비로소 광해군은 자신이 낸 명령을 취소하고 임숙영을 급제자로 인정하도록 한다. 임숙영(任叔英)의 친구였던 권필(權韠)이 그 사건에 울분을 토하며 지은 글이 문임무숙삭과(聞任茂叔削科)이다

 

 

聞任茂叔削科(임숙영이 과거 급제 취소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宮柳靑靑花亂飛 

궁류청청화란비 

 

滿城冠蓋媚春暉  

만성관개미춘휘  

     

朝家共賀昇平樂 

조가공하승평락 

       

誰遣危言出布衣        

수견위언출포의        

       

궁궐 버들 푸르르고 꽃잎 어지러이 날리는데

가득 벼슬아치들 봄빛 속에 아양일세.

조정에선 모두들 태평성대 즐거움 치하하는데그

누가 시켜 포의의 입에서 위태로운 말

위태로운 말을 선비에게서 나오게 했는가.

 

궁궐의 버들은 유희분(柳希奮)을 비유한 것이라 한다.

 

 

권필權韠 조선 중기의 문인(1569~1612). 자는 여장(汝章). 호는 석주(石洲). 정철의 문인(門人)으로 시와 문장이 뛰어났으나 광해군 척족(戚族)들의 방종을 비방하였다가 귀양 가는 도중에 죽었다. 저서에 《석주집》과 작품에 한문 소설 <주생전(周生傳)> 따위가 있다.

 

                     김동도의 과거장 그림

 

 

哭內(아내를 곡하다)-임숙영 (任叔英)

 

 

大抵婦人性 貧居易悲傷  

대저부인성 빈거이비상  

 

嗟嗟我內子 在困恒色康  

차차아내자 재곤항색강  

 

大抵婦人性 所慕惟榮光  

대저부인성 소모유영광  

 

嗟嗟我內子 不羨官位昌  

차차아내자 부선관위창  

 

知我不諧俗 勸我長退藏

지아부해속 권아장퇴장

 

斯言猶在耳 雖死不能忘

사언유재이 수사부능망

 

惻惻念烱戒 慷慨庶自將

측측념경계 강개서자장

 

莫言隔冥漠 視我甚昭彰  

막언격명막 시아심소창  

 

대저 부인의 성품이란 

가난하면 상심하기 쉬운 건데

 

불쌍한 나의 아내는

곤궁해도 늘 안색이 온화하였지

 

대저 부인의 성품이란

영광 누리는 걸 좋아하는데  

 

불쌍한 나의 아내는

높은 벼슬을 부러워하지 않았지

 

세속과 못 어울리는 내 성품을 알아서

나에게 은거하기를 권유했었지

 

이 말 아직 귀에 쟁쟁하여라.

떠나고 없어도 어찌 잊으랴

 

이 밝은 경계의 말 맘에 늘 담아두고 

잊지 않고 스스로 지켜 가리라 

 

저승이 멀리 있다고 해서는 안 되지

나를 저리 환히 내려다보고 있는 걸

 

임숙영(任叔英 1576(선조 9)∼1623(인조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초명은 상(湘). 자는 무숙(茂淑), 호는 소암(疎庵).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곧은 말을 잘하여 당시 권세가들에게 배척을 당하고 불우하게 일생을 보낸 이다.

1601년(선조 34)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10년 동안 수학, 논의가 과감하였으며 전후 유소(儒疏)가 그의 손에서 나왔다.

1611년(광해군 3) 별시문과의 대책(對策)에서 주어진 이외의 제목으로 척족의 횡포와 이이첨(李爾瞻)이 왕의 환심을 살 목적으로 존호를 올리려는 것을 심하게 비난하였다.

이를 시관 심희수(沈喜壽)가 적극 취하여 병과로 급제시켰는데 광해군이 대책문을 보고 크게 노하여 이름을 삭제하도록 하였다. 몇 달간의 삼사의 간쟁과 이항복(李恒福) 등의 주장으로 무마, 다시 급제되었다.

그 뒤 승문원정자·박사를 거쳐 주서가 되었다. 1613년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무옥이 일어나자 다리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정청(庭請)에 참가하지 않았다. 곧 파직되어 집에서 지내다가 외방으로 쫓겨나 광주(廣州)에서 은둔하였다.

인조반정 초에 복직되어 예문관검열과 홍문관정자·박사·부수찬 등을 거쳐 지평에 이르렀다. 고문(古文)에 힘썼으며, 중국 육조(六朝)의 사륙문(四六文)에 뛰어났다. 그가 지은 통군정서 (統軍亭序)는 중국학자들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았다 한다.

 

출처 : 친구의 과거 급제를 취소당했다는 소식을 듣고-권필(權韠)
글쓴이 : 운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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