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런 선조

[스크랩] 임열신도비

스타도나 2011. 8. 20. 14:15



정헌대부(正憲大夫)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시문정(諡文靖) 임공신도비명(任公神道碑銘)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정헌대부(正憲大夫) 한성부판윤 겸예문관제학 동지춘추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漢城府判尹 兼藝文館提學 同知春秋館事 五衛都摠府都摠管) 시문정(諡文靖) 임공신도비명(任公神道碑銘) 병서(幷序)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 겸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세자우빈객(吏曺判書 兼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 世子右賓客) 이식(李植)이 글을 짓고,
명의대부(明義大夫) 화춘군 겸오위도총부부총관(花春君 兼五衛都摠府副摠管) 정(珽)이 전액을 썼으며,
6대손 진사 수적(守迪)이 삼가 글을 쓰다.

돌아가신 판한성부윤(判漢城府尹) 죽애(竹崖) 임공(任公)은 문학과 기덕(耆德:연로하고 덕이 높음)으로써 4조의 임금을 섬겨 그 남기신 풍도와 기품을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칭송한다. 나(李植)의 외할아버지 동리(東里) 윤옥(尹玉)공은 공과 막역한 교우로서 비록 나이와 지위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지만 행동거지와 뜻은 실로 서로 잘 맞았다. 그러므로 나는 어려서부터 공의 명성과 덕행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알 수 있었다. 이제 공의 여러 손자들이 공이 남기신 일들을 기록하여 나에게 글을 부탁하여 장차 묘소에 세우고자 하니 이는 내가 의리상 사양할 수 없는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공의 휘(諱)는 열(說)이요, 자(字)는 군우(君遇)이다. 임씨(任氏)는 본래 중국인이었다. 고려말에 공주의 시종으로 와서 벼슬을 한 사람이 있어 처음으로 풍천부에 적을 두었는데 대대로 명예와 지위가 있었으니, 대장군 주(澍)·서하부원군(西河府院君) 자송(子松)·풍산군(豊山君) 덕유(德儒)와 아조(조선)의 참지정사(參知政事) 구(球)가 가장 드러난 분들이다.
구(球)가 성균생원 복생(復生)을 낳았는데, 통례원 통례(通禮院通禮)에 증직되었으니 이 분이 바로 공의 고조부이다. 증조부는 교수(敎授) 장손(長孫)이며 좌승지에 증직되었고 조부는 성균생원 제(濟)이며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아버지는 남부참봉(南部參奉) 명필(明弼)이며 이조판서에 증직되었으니, 모두 공이 귀해졌기 때문에 은전(恩典)을 베푼 것이다.
어머니는 해평윤씨(海平尹氏)로 첨정 훤(萱)의 딸이다. 정덕(正德) 경오년(중종 5, 1510년) 2월 2일에 공을 낳았다. 가정(嘉靖) 신묘년(중종 26, 1531년)에 생원·진사에 합격하고, 계사년(중종 28, 1533년) 별시문과에 합격하여 처음에 승문원정자에 선임되었으며, 천거되어 사관에 들어갔다. 병신년(중종 31, 1536년)에 홍문관수찬으로 중시(重試)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 무술년(중종 33, 1538년)에 이조좌랑으로 탁영시(擢英試)에 제 2등으로 합격하였다. 5년간에 세 번이나 높은 과거에 급제하기는 우리나라에서 일찍이 있지 않았던 바이다. 학문의 명망이 빛나서 호당에 선발되어 사가독서하였다.
삼사(사헌부·사간원·홍문관)를 역임하고 직제학으로 승정원승지에 발탁되었으며, 대사간·이조·병조참의에 전보되었다가 가선(嘉善大夫)에 올라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 되었다. 내직으로 들어와 사헌부대사헌·예조참판이 되었다. 또 다시 외직으로 나가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다.
게으르고 태만하다 하여 흥체(벼슬 막힌 인재를 뽑아 쓰는 일. 여기서는 교체를 이른다)되었으나 치적이 뛰어나 묘당(朝廷)에서 그의 능력에 감복하여 체임되어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특별히 천거하여 다시 임명하였다. 내직으로 들어와 한성부좌우윤 겸 예문관제학·동지춘추관사·도총부부총관이 되었다. 승진하여 판윤·도총관이 되었다. 혹은 체임되고 혹은 유임하며 한성부를 떠나지 않은 것이 30여년 이었다.
기영회(耆英會:70세 이상의 퇴임한 고관들의 모임)에 참여했으며, 만력(萬曆) 신묘년(선조 24, 1591년) 5월 8일에 돌아가셨으니 향년 82세이다. 공(公)은 처음에는 문장이 뛰어나 벼슬에 나아갔으나 능히 삼가하며 직무에 근면하게 힘쓰니 부임하는 곳마다 명성이 있었다.
벼슬한 60년 동안 시종 한결같이 지조를 지켜 중간에 권세있는 간신들의 사화를 겪었으나 일찍이 함부로 남을 따라 자신을 굽히지 않았으며, 또한 과격하여 근심을 범함이 없었으므로 공론이 중하게 여긴 것이 오래되었다. 명종·선조 두 조정에 이르러 사론이 크게 달라져 힘써 훈구대신들을 공격하였는데, 선배들은 탄핵과 비판을 두려워서 피하고 친압하는 이들이 많았고, 신진이하 선비들은 어진 이를 예우하는 것을 명분으로 삼았으나 풍속이 갑자기 달라지자 공은 두 세 명의 벗과 함께 목연(穆然:삼가고 공경하는 모양)히 한적하게 경전과 역사서를 읽으며 스스로 즐겼다. 비록 자주 비방과 공격을 받았으나 분수를 지키며 태연하여 낯빛이나 말에 나타내지 않아서 이 때문에 세상의 논평에서 배척을 받았다. 특히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 공명정대하여 성균관 유생들의 추앙을 받았으며 조정에서도 또한 추천하고 다른 사람들도 양보를 하니 이에 여러번 시험을 관장하였다. 그가 선발한 이들은 모두 이름이 있어 특별히 뛰어나 인재를 얻은 것이 가장 성(盛)하다고 칭송받았다. 율곡(栗谷)선생이 인사를 의논하는 자리에 있으며 일찍이 개탄하여 말씀하기를 “저 임모(任某:任說)는 무슨 허물이 있어서 오래도록 등용되지 못하는가?”하고 마침내 정경(正卿:판서)의 후보에 이름을 올렸는데 이로부터 거듭 당시의 논의와 어긋나서 이윽고 공조판서에 임명됐으나 탄핵을 받아 제수되지 못하였으니 율곡이(율곡이 인정한 것이) 빌미가 된 것이다.
공(公)은 집에 있을 때에는 법도가 있었으며, 어버이를 섬김에 정성을 다하여 아침저녁에 반드시 부인과 함께 몸소 나아가 음식을 올렸다. 어버이가 돌아가시자 홀로된 누이 섬기기를 몹시 공경히 하여 조정에서 물러나오면 반드시 그 집에 가서 문안을 살폈다. 선대(先代)에 농장의 수입이 많았는데 부인이 잘 경영하여 부족하지 않게 하였다. 공(公)은 많이 남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재산의 유무를 묻지 않았다. 평생토록 사사로운 일은 청탁하지 않았으며 손수 친척의 질병이나 혼인, 초상을 기록하였다가 반드시 골고루 도와주고 봉급을 반드시 먼저 가난한 친척에게 나누어주었다. 오직 성실하게 힘쓰고 자랑하거나 꾸미지 않았으므로 세상에서 또한 아는 이가 없었다. 널리 배우고 잘 기억하였으며 시와 글은 오로지 기품을 숭상하였다. 그가 고시관으로 성적을 정할 때에는 먼저 동료과 함께 재주있는 사람을 뽑고 재주없는 사람은 떨어뜨린 후 다시 떨어진 사람의 시험지를 살펴보아 잘못이 있음을 발견하면 올려주어서 백에 하나도 실수함이 없었다. 그 모든 일에 부지런하고 민첩함이 대체로 이와 같았는데 세상에서는 공(公)의 행실과 의리, 정사가 문학에 미치지 못했다 말하니 그 어찌 그러하겠는가? 어찌 그러하겠는가?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전의 이씨(全義李氏)니 한(漢)의 딸이다. 2남 4녀를 두었는데, 장남 숭로(崇老)는 찰방이고, 차남 영로(榮老)는 문과에 장원하였고, 또 중시에 뽑혀 벼슬이 종부시 정(宗簿寺正)에 이르렀다. 장녀는 부사 남궁제(南宮悌)에게 차녀는 현감 이준(李浚)에게 3녀는 군수 신홍점(申鴻漸)에게 4녀는 종실 흥령군(興寧君) 수전(秀荃)에게 시집갔다. 숭로(崇老)의 아들기(奇)는 감역관이었는데 일찍 죽었다. 영로(榮老)는 4남 3녀를 두었는데, 혁(奕)은 현령, 연(兗)은 문과급제하여 승지, 장(章)은 문과급제하여 이조정랑요, 적(啇)은 별좌이며 첩에게서 2남을 두었는데, 곤(袞)과 입(立)이다. 딸은 장녀는 진사 이직(李溭), 차녀는 윤응빙(尹應聘), 3녀는 이승윤(李承尹)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외손은 일곱인데, 행(荇)·명(蓂)·헌·영(英)은 남궁씨(南宮氏) 큰 사위의 아들이고, 승지 덕수(德洙)는 이씨(李氏)둘째 사위의 양자이고, 호(濩)는 신씨(申氏) 셋째 사위의 양자이고, 풍해군(豊海君) 호(浩)는 흥령군(興寧君) 넷째 사위의 아들이다.
증손은 남자가 11명이니, 기(奇)는 숙영(叔英)를 낳았는데 문학과 덕행이 세상에서 높이 뛰어났으며 벼슬은 지평(持平)으로 마쳤고, 다음은 세영(世英)이다. 혁(奕)은 생원 진백(震伯)을 낳았고 연(兗)은 경력 준백(俊伯)을 낳았고 다음은 좌랑 의백(義伯)이다. 장(章)은 선백(善伯)을 낳았는데 문과 급제해서 현감이고, 다음은 강백(康伯), 다음은 형백(衡伯), 다음은 진사 한백(翰伯)이다. 적(啇)은 경백(慶)을 낳았고 다음은 계백()繼이다. 숙영(叔)은 일찍 죽어 아들이 없어서 준백(俊)의 아들 지(至)로 양자를 삼았는데 또 요절하였다. 선백(善)의 아들 중(重)은 문과 급제해서 주서(注)이다. 내외 증손 현손이 매우 많아서 지금 일일이 다 기록하지는 않았다.
공은 유집 10수권이 있었는데, 집에 보관한 문서,서적과 함께 전쟁통에 잃어 버려 역임한 관직과 그 시기가 또한 상세하지 않으니 애석하다.
묘소는 광주(廣) 북쪽 정평(庭)의 동북쪽 서남향 언덕에 있으니 부인을 합장하였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인간의 문화세상에 영걸(英傑)이 일어나는 바이니
누구인들 분발하여 생각하지 않으랴? 선인들이 올랐으니,
공은 스스로를 시험하니 신진들이 능히 양보하였고
양보함으로 남을 시험하니 관리들의 겸양이 밝아 졌도다.
어찌 끝내 시험하지 못하고 이에 이르렀다가 기울어지는가?
사람들은 공을 억울하다 하지만 공은 오직 태평하였다네.
내가 그 일생을 논한 것은 덕행일 뿐이로다.
이에 후손이 번창하고 이에 그 명성을 드날리도다.
이것이 이른바 잊지 못하는 것이니 무엇을 이 명에 새기랴?

택당공(澤堂公:李植)의 이 글은 숭정(崇) 경진년(인조 18, 1640년)에 완성되었으나 사정이 있어 돌에 새기지 못하고 지연된 것이 이제 68년이 되었다. 현손 원주목사 방(埅)과 5대손 강원도관찰사 순원(舜元)이 마침내 함께 강원감영과 원주부에서 모의하여 봉급을 덜어내고 힘을 합쳐 돌을 마련하여 비문을 새겨서 세웠다. 비문 중에 자손의 과거급제여부와 직명 및 뒤에 태어나서 기록하지 못한 사람을 이에 감히 다음과 같이 추가 기록하였으나 증손이후로 외손을 기록하지 않는 것은 택로(澤堂 李植)가 이미 전례를 세웠으므로 삼가 따른다.
증손 숙영(叔英)은 문과 수찬이요, 의백(義伯)은 문과 참판이요, 선백(善伯)은 문과 통정대부(通政大夫)으로 부사요, 한백(翰伯)은 문과장원으로 교리이다. 현손은 28인이니, 숙영(叔英)의 양자 지(至)는 자식이 없이 일찍 죽어, 또 다시 양(量)으로 양자를 삼았다. 세영(世英)의 아들은 시전(是傳)이다. 준백(俊伯)의 아들 규(奎)는 문과 감사요, 지(至)·기(墍)는 첨지요, 다음은 이(釐)와 학(壆)이다.
첩의 아들은 식·옥·정(塣)이다. 의백(義伯)의 아들 좌(座)는 문과 정(正)이요, 방(埅)은 문과 목사이고 승(陞)과 진사 동(董)이다. 선백(善伯)의 아들 중(重)은 문과 지평이고, 양(量)과 전(壂), 문과 판결사인 당(堂)이다. 강백(康伯)의 양자는 돈이다. 형백(衡伯)의 아들 재(在)는 현감이요, 기(基) · 추 · 서(墅)이다. 첩의 아들은 전(全)이니 가선(嘉善)이다. 한백(翰伯)의 아들 후(垕)는 진사요, 다음은 돈 · 무(堥)이다. 경백(慶伯)의 아들은 숙(塾) · 보(堡) · 벽(壁)이다. 계백(繼伯)의 양자는 벽(壁)이다.
5대손은 45인이니, 양(量)의 아들 윤원(胤元)은 문과 대사간이요, 순원(舜元)은 문과 감사이다. 시전(是傳)의 아들은 진창(晉昌)·응창(應昌)이다. 규(奎)의 아들은 진원(鎭元)은 통정으로 부사이다. 전(壂)의 아들은 수원(遂元) · 이원(履元) · 해원(海元) · 회원(會元)이다. 이(釐)의 아들은 득원(得元)이고, 첩의 아들은 최원(最元)이다. 학(壆)의 양자는 재원(載元)이다. 좌(座)의 아들은 조원(調元)이다. 방(埅)의 아들은 정원(鼎元)·건원(健元)·행원(行元)이다. 승(陞)의 아들은 사원(士元)이다. 동(董)의 아들은 경원(慶元)이다. 중(重)의 아들 상원(相元)은 문과로 중시에 장원하여 좌참찬이고 찬원(贊元)은 봉사요, 익원(翊元)은 문과 병조좌랑이다. 당(堂)의 아들 달원(達元)은 진사이다. 돈의 아들은 수원(壽元)·만원(萬元)·거원(擧元)·주원(柱元)·대원(大元)이다. 재(在)의 아들은 성원(聖元) · 명원(命元)이요, 두원(斗元)은 진사이다. 기(基)의 양자는 명원(命元)이니 현감이다. 서(墅)의 아들은 계원(啓元) · 흥원(興元) · 학원(學元)이다. 후(垕)의 양자는 신원(藎元)이다. 추의 아들은 신원(藎元) · 경원(敬元) · 보원(普元)이다. 무(堥)의 아들은 시원(始元)이다. 숙(塾)의 아들은 태원(泰元) · 지원(智元) · 신원(信元) · 효원(孝元) · 우원(祐元) · 재원(載元)이다. 보(堡)의 아들은 복원(復元) · 덕원(德元)이다. 벽(壁)의 아들은 세원(世元)이다.
6대손은 많은데 어려서 다만 몇 사람만 기록한다. 윤원(胤元)의 아들 수적(守迪)은 진사이다. 순원(舜元)의 양자는 수관(守寬)이다. 진원(鎭元)의 아들은 유하(由夏)·종하(宗夏)·술(述)이다. 조원(調元)의 아들은 진사 조(遭)와 막(邈)이요 사원(士元)의 아들은 선(選)·적(適)·일(逸)이다 상원(相元)의 아들 수간(守幹)은 문과로 중시에 합격하여 교리이고, 다음은 수조(守朝)이다. 찬원(贊元)의 아들 수경(守經)은 참봉이요, 수윤(守綸)이 있다. 익원(翊元)의 양자 수조(守朝)는 진사이다. 달원(達元)의 아들은 수헌(守憲) · 수관(守寬)이다. 수원(壽元)의 아들은 수약(守約)이다. 만원(萬元)의 아들은 수항(守恒) · 수익(守益)이다. 성원(聖元)의 양자는 수성(守成)이다. 명원(命元)의 아들은 수겸(守謙) · 수성(守成)· 수량(守良) · 수하(守夏)이다.

현손(玄孫) 통정대부(通政大夫) 행원주목사 지제교(行原州牧使知製敎) 방(埅)이 삼가 기록하다.
숭정(崇禎) 기원후(紀元後) 80년 정해(숙종 33, 1707년)월 일에 세우다.


任說神道碑
 正憲大夫漢城府判尹諡文靖任公神道碑銘
 有明朝鮮國正憲大夫漢城府判尹兼藝文館提學同知春秋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諡文靖任公神道碑銘幷序
 資憲大夫吏曺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 經筵春秋館成均館事 世子右賓客 李植撰
 明義大夫花春君兼五衛都摠府副摠管珽篆
 六代孫進士守迪謹書
 故判漢城府尹竹崖任公以文學耆德厯仕 四朝其流風遺韻人到于今稱之而植外王父東里尹公玉與公爲莫交雖年位差次而行止險夷實相契合故植自幼習知公名行有深於世之知者今公之諸孫錄公遺事屬植爲文將以揭諸墓兆此植於義所不得辭者也謹按公諱說字君遇任氏本中國人麗末有以公主從官來仕者肇籍于豊川府世有名位大將軍澍西河府院君子松豊山君德儒及我 朝參知政事球最顯球生成均生員諱復生贈通禮院通禮寔公高祖也曾祖敎授諱長孫 贈左承旨祖成均生員諱濟 贈吏曹參判考南部參奉諱明弼 贈吏曹判書皆以公貴 恩例也妣海平尹氏僉正諱萱之女以正德庚午二月二日生公嘉靖辛卯中生員進士癸巳別試登文科初選承文院正字薦入史官丙申以弘文館修撰中重試第二戊戌以吏曹佐郎中擢英試第二半紀之內三捷巍科 國朝所未曾有文望爀然選 賜暇湖堂厯敡三司以直提學擢承政院承旨轉爲大司諫吏曹兵曹參議陞嘉善拜慶尙道觀察使入爲司憲府大司憲禮曹參判又出爲平安道觀察使興滯率怠聲績茂著廟堂服其能遆還未久特薦再任入爲漢城府左右尹兼藝文館提學同知春秋館事都摠府副摠管陞爲判尹都摠管或遆或仍不離漢府者三十餘年參耆英會萬曆辛卯五月八日卒壽八十二公初以文華致位而能恪勤供職所莅有聲立 朝六十年始終一卽中更權奸士禍而未嘗詭隨枉己亦無碕激犯患公論之歸重久矣逮在 明宣兩朝間士論一變務爲激揚舊臣前輩畏避彈剌多眤比新進以下士禮賢爲名風習頓異而公與二三朋輩穆然守靜密以書史自娛雖數被詆訐而推分任眞不形於色辭以此見排於世議特以藻鑑公明爲館學所齊仰 朝廷亦推轂讓先故屢掌試闈其所拔取皆有名特達稱爲得人最盛栗谷先生在銓席嘗慨嘆曰彼任某亦有何累而久不見用耶遂注擬正卿自此重忤時論俄以工曹判書被劾不拜栗谷수祟也公居家有範事親以誠朝夕必與夫人躬莅進饌親歿而事實姊甚處朝退必候其家先世饒於庄業夫人經紀不匱公嫌其嬴不問有無平生請託不及私幹手錄親戚疾病婚喪賙給必徧分施俸祿必先貧族惟務慤實不事矜餙故世亦莫之知也博學强記爲詩文專常氣格其考試先與同席拔奇汰冗更自閱落卷見有枉屈則升之百不失一其綜事勤敏多類此世謂公行義政事不及文學者豈其然乎豈其然乎配貞夫人全義李氏諱漢之女有二男四女男辰崇老察訪次榮老文科壯元又擢重試官至宗簿寺正女辰嫁府使南宮悌次縣監李浚次郡守申鴻漸次宗室興寧君秀荃崇老子奇監役官早歿榮老四子三女奕縣令兗文科承旨章文科吏曹正郎啇別坐妾出二子袞立女婿辰進士李溭次尹應聘次李承尹外孫七人荇蓂藼英南宮氏子承旨德洙李氏繼子濩申氏繼子豊海君浩興寧君子曾孫男十一人奇生叔英文行高世官終持平次世英奕生震伯生員兗生俊伯經歷次義伯佐郎章生善伯文科縣監次康伯次衡伯次翰伯進士啇生慶伯次繼伯叔英早終無後以俊伯子至爲後又夭善伯子重文科注書內外曾玄甚盛令不盡載公有遺集十數卷幷家藏文籍佚於兵火歷官年紀亦不能詳惜哉墓在廣州治北庭坪負艮之原夫人祔焉銘曰人文之會英俊所興 孰不思奮先人以登 公在自試衿佩讓能 及以試人搢紳讓明 胡卒不試旣摯而傾 人謂公屈公惟履平 我論其世寔德之行 載昌廞後載揚廞聲 是謂不亡奚事斯銘
 澤堂公此文成於崇禎庚辰而遷就未勤石至今六十八年玄孫埅牧原城五代孫舜元按關東遂與之合謀營府損俸幷力伐石鑱刻以樹焉碑序中子孫科甲職名曁後生而未及書者玆敢追記如左曾孫以後不錄外裔澤老旣已起例謹從之曾孫叔英文科修撰義伯文科參判善伯文科通政府使翰伯文科壯元校理玄孫二十八人叔英繼子至無子而夭 又以量爲嗣世英子是傳俊伯子奎文科監司至墍僉知釐壆 塣義伯子座文科正埅文科牧使陞董進士善伯子重文科持平量壂堂文科判決事康伯繼子墪衡伯子在縣監基埾墅妾子全嘉善翰伯子垕進士墪堥慶伯子塾堡壁繼伯繼子壁五代孫四十五人量子胤元文科大司諫舜元文科監司是傳子晉昌應昌奎子鎭元通政府使壂子遂元履元海元會元釐子得元妾子最元壆繼子載元座子調元埅子鼎元健元行元陞子士元董子慶元重子相元文科壯元重試左參贊贊元奉事翊元文科兵曹佐郎堂子達元進士墪子壽元萬元擧元柱元大元在子聖元命元斗元進士基繼子命元縣監墅子啓元興元學元垕繼子藎元埾子藎元敬元普元堥子始元塾子泰元智元信元孝元祐元載元堡子復元德元壁子世元六代孫多幼只錄若而人胤元子守迪進士舜元繼子守寬鎭元子由夏宗夏述調元子遭進士邈士元子選適逸相元子守幹文科重試校理守朝贊元子守經參奉守綸翊元繼子守朝進士達元子守憲守寬壽元子守約萬元子守恒守益聖元繼子守成命元子守謙守成守良守夏
 玄孫通政大夫行原州牧使知製 敎埅謹識
 崇禎紀元後八十年丁亥 十月 日立



출처 : 한국유사
글쓴이 : 노원마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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