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은둔설은 무지에서 우러나온 해프닝
은둔설은 무지에서 우러나온 해프닝...(네이버 펌)
hangiree님의 글
남천우씨는 아직까지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이번에 보니 신판을 발간했더군요.
그 책을 읽은 분들 혹은 인터넷이나 방송매체[SBS 백만불 미스테리] 등을 접한 분들이
그의 주장을 신빙성이 있는 마냥 받아들이는 것 같아서 학계에서는 그 어처구니없음에
반박조차도 아끼고 있습니다만 제가 그 잘못된 점을 짚어보고자 합니다.
1. 전사 후 장례기간이 80일?
이 주장은 유교식의 장례에 대한 기본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상례(喪禮) 기간은 제황(帝皇)은 7개월, 제후(諸侯)는 5개월, 대부(大夫)는 3개월,
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士)는 죽은 달을 넘겨 장례를 치르는 것이 원칙입니다.
이 원칙을 그대로 따라서 조선에서 왕은 제후의 예를 따랐으므로 장례기간이 5개월이고,
사대부들은 3개월이 장례기간이었습니다.
택일(擇日), 택지(擇地), 기타 기후조건 등을 감안해서
이 기간 전후로 장례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충무공의 장례는 지극히 평범하게 예식에 따라서 치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난중일기만 제대로 읽었더라도 이러한 주장을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정유년 일기에 충무공의 모친의 장례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4월 12일에 별세를 하셨고, 처음에 7월 27일을 출상(出喪)일로 잡았다가
8월 초4일로 변경했다는 내용입니다.
2. 당시에 천장(遷葬 이장)은 지극히 예외적인 행위?
이 주장도 역시 공부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유교의 상례에서 제례(祭禮)로 이어지는 효(孝) 사상과 풍수지리사상이 연결이 되는 부분이
바로 천장, 익숙한 말로 이장(移葬)입니다.
대체로 조선 초기에는 성리학을 기본이념으로 삼으면서 고려 말 유행했던 비서(秘書)들을
모두 모아 불태워버리는 등 미신에 가까운 행위들을 근절시키려 했습니다.
그래서 수맥이 발견된다든지, 묘지가 훼손되었다든지, 합장(合葬)을 한다든지 하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천장이 많이 행해지는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라는 대전란을 겪고 난 후에 이러한 세태가 많이 변합니다.
이것이 현대에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여러 기록이 있습니다만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1594년에 한산도의 무과 별시에 참시관(參試官)으로 참여했다가 충무공에 대한 인물평을 남겨놓기도 한 고상안(高尙顔)의 문집인 태촌집의 「효빈잡기(效嚬雜記)」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국역본이 없습니다만 제가 간단하게 직역을 했습니다.
[譏遷葬] 再造之後, 士大夫崇信術士, 雖久遠祖墳, 更擇吉地, 遷葬安 , 至於父母之墓, 則雖得吉地, 若他山稍勝云則不憚移葬, 再三不已. 鰲城戱曰, 若子孫殘劣則埋葬固難, 而子孫勤幹則安葬亦難, 譏諷之意, 蓋可想矣.
【[천장(遷葬)을 비난함] 재조(再造 임진왜란) 이후로 사대부들이 술사(術士)를 숭신(崇信)하여 비록 오래되고 먼 조상의 묘라고 하더라도 길지(吉地)를 택하여 천장(遷葬)하여 편안한 곳에 모셨다.
부모의 묘에 이르러서는 비록 길지(吉地)를 얻었더라도 만약 다른 산이 조금 낫다고 하면 이장(移葬)하는 것을 꺼리지 않고, 두세 번을
하여도 그치지 않았다. 오성(鰲城 이항복)이 이를 풍자하여 말하기를,
「만약 자손이 잔열(殘劣)하면 매장(埋葬)하는 것이 진실로 어렵고,
자손이 근간(勤幹)하면 편안히 묻히는 것이 또한 어렵다.」
그 기풍(譏諷 슬쩍 돌려서 비난한다는 뜻)하는 뜻을 대개 짐작할만하다.】
이것 외에도 이식(李植)의 문집인 택당별집 중에 「풍수험응설(風水驗應說)」이 있는데,
민족문화추진회(www.minchu.or.kr)에 국역이 되어 있으니 찾아보시면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겁니다.
이상과 같이 전란 후에 풍수지리사상이 크게 유행하면서 천장이 흔히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혹시 문중에 당시에 천장을 하게 된 이유가 전해 내려오지 않을까 해서 현충사에 문의를 해봤는데 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당시 명나라 지관(地官)이 참여했다는 말이 있고, 당시의 세태로 감안하고 또한 충무공의 묘소가
후손들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한다면 술사(術士)들의 부추김에 쉽게 행동했을 가능성을
추정해볼 수는 있지만 추정은 결국 한 줄의 기록을 이길 수 없는 법이니 문중에 전해
내려오는 것을 확인해보면 정확한 사유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3. 전사 당시의 상황이 의심스럽다?
남천우씨는 다른 모든 기록을 무시하고
오로지 그 자체로 모순을 안고 있는 이분(李芬)의 『행록(行錄)』에 의지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먼저 행록(行錄)의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19일 새벽에 공이 한창 독전하다가 문득 지나가는 탄환에 맞았다.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단 말을 내지 마라.』
공은
말을 마치고 세상을 떠나시었다.
때에 공의 맏아들 회( )와 조카 완(莞)이 활을 쥐고 곁에 섰다가 울음을 참고 서로 하는
말이,
『이렇게 되다니! 기가 막히는 구나.』
『그렇지만 지금 만일 곡성을 내었다가는 온 군중이 놀라고 적들이 또 기세를 얻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다. 그리고 또 시체를 보전해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습니다. 전쟁이 끝나기까지 참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서는 곧 시체를 안고 방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오직 공을 모시고 있던 종 금이(金伊)와 회와 완 등 세 사람만이 알았을
뿐 비록 친히 믿던 부하 송희립 등도 알지 못했었다.
【이 분(李芬)의 『행록(行錄)』중에서】
행록(行錄)의 기록이 가지는 한계를 고려했을 때, 다른 사료들과 교차검증을 해야하는 것은
필수인데도 오로지 모순을 갖고 있는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시 주위에서 그 장면을 목격했던 사람들의 시각에서 상황을 보겠습니다.
먼저 공식적으로 조정에 보고되어 포상을 받은 사람은 손문욱(孫文彧)입니다.
도원수 권율(權慄)이 아뢰었다.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이 전사한 뒤에 손문욱(孫文彧) 등이 임기응변으로 잘 처리한 덕택에 죽음을 무릅쓰고 혈전하였습니다. 문욱이 직접 갑판 위에 올라가 적의 형세를 두루 살피며 지휘하여 싸움을 독려하였는데 진 도독이 함몰을 면한 것도 우리 주사의 공이었습니다. 우치적(禹致績)·이섬(李暹)·우수(禹壽)·유형(柳珩)·이언량(李彦良)의 공이 우수하였고, 수공(首功)은 이순신이 타고 있던 배였습니다. 다만 이순신이 군사들에게 약속하기를,「다투어 수급을 베려고 하다 보면 적을 많이 죽일 수 없다.」고 경계하였으므로, 이번 전투에서 수급을 참획한 것이 매우 적었습니다.』【선조실록 31년(1598)/12/18(기사)】
먼저 이 보고의 진실성을 살피기 위해서는 우선 손문욱은 누구이며 어떻게 좌선(座船)에 타게
되었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손문욱은 서울사람으로 임진왜란 초기에 서울에서 포로가 되어 일본에까지 끌려갔다가
정유년에서 무술년사이에 투항해온 사람입니다.
정유년에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에 의해 남해의 원으로 있었음이
다음의 『난중잡록』에서 확인이 됩니다.
평의지(平義智)는 한산도(閑山島)로부터 이리로 나와 이곳에서 합진하고 본현의 인민을 유인하여 민패를 주어 편안히 살게 하였다. 그리고 서울 사람 손문욱(孫文彧)을 본현[남해(南海)]의 원으로 삼고, 하동(河東) 출신 김광례(金光禮)를 하동의 원으로 삼아 본읍의 일을 관장하게 하고, 민패를 발급하여 쌀을 받게 하고, 또 왜놈을 시켜 여러 진에 나누어 보내어 본현의 사람을 찾아서 하나하나 데려 오도록 하였다. 문욱(文彧)은 임진년에 왜놈에게 사로잡혀 가 다년간 왜국에 있었기 때문에 왜말을 잘했다. 남해에 있을 때에는 살생과 노략질을 엄금하게 해서 침해를 받은 사람이 많이 보전하여 살게 되었다. 그 뒤에 조선으로 살아 돌아오니 포상하고 만호(萬戶)의 직을 제수했다.
【『난중잡록(亂中雜錄)』정유년 기사 중에서】
이후 탈출해서[*아마도 당시에 대량으로 살포되었던 면사첩(免死帖)을 이용해서 사면을 받았을 것입니다.] 일본에 있던 경험과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이유로 체찰사 이덕형의 연락관으로 활약합니다. 다음의 기사에서 확인이 가능합니다.
왕 안찰(王按察)은 신에게 수군과 함께 속히 남해를 도모하라고 하므로 신이 손문욱(孫文彧)과 남해에서 나온 사람을 진 도독에게 보내어 은밀히 모의하여 처리하게 하였습니다.
【선조실록 31년(1598)/11/02(계미) 중에서】
이상에서 손문욱은 노량해전 당시에 이덕형의 연락관 자격으로 좌선에 승선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랬다가 충무공 사후를 목격하고 보고를 할 사람이 없는 것을 기회로 자신이 함대를 지휘하여 전투를 마친 것처럼 도원수 권율 및 체찰사 이덕형에게 보고한 것입니다. 수군에 계속 근무하던 군관의 신분도 아니고, 군대에 머물던 사람도 아닌 자가 함대를 지휘했다는 것은 다음에 볼 형조정랑 윤양(尹暘)의 보고서에서 송희립 등의 주장처럼 황당한 것입니다.
형조 정랑 윤양(尹暘)이 아뢰기를,
『신이 주사(舟師)에게 선유(宣諭)할 일로 통제사가 주둔한 전라도 고금도(古今島)에 내려가 임금의
말씀을 선포하니 모든 장수가 다 기뻐하여 춤추며 태평 시대의 성대한 예우를 받았다 하여 감격해 마지않았습니다. 그리고 소청한 일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수군이 오래도록 번을 서다가 번을 교대하려 하면 수효가 적어 인원을 채우기 어려우니 조정에서 특별히 조치하여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며,
또 변란 이후 본역(本役)을 도피하기 위해 피살되었다 핑계하거나 세력이 있는 집에 투탁(投託)하거나 관속(官屬)이라고 이름을 빌려 다른 고을에
분산해 있으니 반드시 엄중히 추쇄하여 본역으로 돌아오게 해야 한다. 군기(軍器) 등 물자가 계속 접전하느라 분실되어 남은 것이 없는데 그 중에
총통(銃筒)·분화통(噴火筒)·각궁(角弓)은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현재 각 고을이 분탕되어 마련해내기가 어려우니 별도로 준비하여 충분한 수량을
내려보내 전투에 쓸 수 있도록 해 달라.」하였습니다.
그리고,「노량(露梁)의 전공은 모두 이순신이 힘써 싸워 이룬 것으로서 불행히 탄환을
맞자 군관 송희립(宋希立) 등 30여 인이 상인(喪人)의 입을 막아 곡성(哭聲)을 내지 않고 재촉하여 생시나 다름없이 영각(令角)을 불어 모든
배가 주장(主將)의 죽음을 알지 못하게 함으로써 승세를 이루었다. 저 손문욱(孫文彧)은 하찮은 졸개로 우연히 한 배에 탔다가 자기의 공으로
가로챘으므로 온 군사의 마음이 모두 분격해 한다.」하였습니다.』
하니, 각 해사(該司)에 말하라고 전교하였다.
【선조실록 32년(1599)/02/08(무오)】
당시 경상우수사 이순신(李純信)이나 전라우수사 안위(安衛) 등이 주장(主將)이 전사했으므로 대신 보고해야 했음에도 진린(陳璘)에 의해서 제지를 당한 것인지 의심이 갑니다. 이유는 노량해전에 관한 경과 보고서가 지휘관들 중에서 유일하게 진린의 보고만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도 자신의 전공을 과장해서 보고한 명나라 장수의 표본입니다.
진 도독(陳都督)이【진린(陳璘).】 아문에 당보(塘報)한 첩문은 다음과 같다.
『본부가 여러 장수들을 통솔하고 노량(露梁)에 당도하여
이순신(李舜臣)이 포위 당한 것을 보고 본부가 직접 병정을 거느리고 수백 명의 적을 쳐죽이자 적이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승세를 몰아
20여 리를 추격하니 적들이 불에 타 죽고 바다에 빠져 죽었는데, 다 건져내지는 못했지만 생포하거나 참살한 수가 도합 3백 20명이나 되었다.
천총 진구경(陳九經)이【진인(陳璘)의 아들이다.】 왜장 1명을 생포했는데 석만자(石曼子 시마즈 요시히로)라고 하였다. 부총병 등자룡(鄧子龍)과
통제사 이순신이 전사하였다.』
【선조실록 31년(1598)/12/21(임신)】
다음에는 또 다른 증언자인 송희립(宋希立) 및 군관들의 입장을 보여줄 수 있는 『은봉야사별록』의 「노량기사」의 내용입니다. 위에서 본 윤양의 보고서의 내용과 거의 같은 내용입니다.
이때 왜적들이 중국배가 있는 곳으로 모여들어 도독이 포위 당했다. 공이 힘을 다해 포위를 풀어주고 구해냈다. 송희립과 배 위의 장졸들은
모두 죽을힘을 다해 싸웠으며, 한 발의 화살도 헛되이 쏘지 않았다. 왜적들은 수없이 죽었다. 왜적들은 흩어졌다가 다시 모였다. 송희립이 있는
곳을 알아차리고 탄환을 장전했다가 일제히 쏘았다. 탄환이 갑옷과 투구에 적중하여 이마뼈를 스쳤다. 희립은 바닥에 쓰러져 거의 죽게 되었다.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공에게 「송희립이 탄환에 맞았다.」고 고하자, 공이 크게 놀라 일어섰는데 이 때 탄환에 겨드랑이 밑을 맞았다. 배 위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 두려워하며,
『사또가 탄환에 맞았다.』라고 소리쳤다. 희립이 이 말을 듣고 곧 일어나 앉았는데, 다행히 이마만 깨지고
뇌는 다치지 아니하였다. 이 사나운 기운으로 해서 얼굴에 피가 흐르고 옷 앞자락이 축축해졌다. 이에 옷을 찢어서 이마를 싸매고 곧바로 장군의
자리에 올라가 보니, 공은 이미 숨이 끊어졌고, 아들 회( )가 울고 있었다. 희립이 장좌(將佐) 몇 사람으로 하여금 붙들게 하고, 입을 막아
울음을 그치게 하였다.
공의 갑옷과 투구를 벗기고 붉은 모전(毛氈)으로 주검을 싸고, 또 다시 뜸(草芚)으로 쌌다. 희립은 공의 갑옷과
투구를 입고 뜸 위에 가리고 앉아서, 대신 깃발과 북을 잡고 더욱 급히 싸움을 독촉했다. 왜적의 배는 크게 패했다. 대포에 의해 부서지거나
갈구리에 걸려 침몰된 왜적의 배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나머지 왜적들은 모두 도망쳤다. 아군은 도망하는 왜적들을 쫓아 먼바다에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드디어 공의 죽음을 알리자, 각 배에서 모두 통곡하였다. 도독도 곡을 하면서,
『천조(天朝)에 돌아가서 마땅히 공의
충용(忠勇)을 천자께 고하려고 하였는데, 이제 이렇게 되었으니 애석하도다. 애석하도다!.』라고 하였다. 왜교에 있는 적진은 동쪽의 왜적을 기다려
합세하여 싸우려고 했다가 재빨리 모두 도망쳐 버렸다.
【『은봉야사별록(隱峯野史別錄)』의 「노량기사(露梁記事)」중에서】
이 기록이 제일 사실성이 있으며, 모순이 없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진린 쪽에서 바라본 충무공 사후의 좌선의 모습을 보여주는 기록이 아래의 『자해필담』과 『상촌집』에 실려있습니다.
상촌집의 내용은 노량해전이 여러 날에 걸쳐서 이루어진 것처럼 기술되어 신뢰성을 조금 떨어뜨리고, 중국 사람들의 기록은 그 특유의 과장과 거짓으로 일단 의심부터 갑니다만, 이것은 충무공 사후에 좌선에서 약간의 혼란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좌선의 승선한 인원들은 충무공의 전사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되며, 충무공의 유언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충무공은 자신이 없을 때의 조선 수군이 어떻게 되는지를 정유년 7월의 「한산의 무너짐」을 통해서 똑똑히 봤으므로 그와 같은 유언을 남겼던 것입니다.
명나라 장수 진린(陳璘)은 평소에 이순신의 지략에 감복하여 형제처럼 대우하였는데,
이날 이순신의 배에서 수급(首級)을 서로 다투는 것을 바라보고 깜짝 놀라면서 말하기를,
『통제사가 죽었다.』
하였다. 좌우의
사람들이 어떻게 아느냐고 하니, 진린은 말하기를,
『내가 보니, 통제사는 군율이 매우 엄하였다. 지금 그 배에서 수급을 다투어 문란하니,
이것은 호령이 없기 때문이다.』
하였다. 싸움이 이미 끝난 뒤에 물으니, 과연 그러하였다.
【『자해필담(紫海筆談)』】
도독이 멀리 배 위에서 통제선(統制船)의 사졸들이 수급과 왜화(倭貨)를 다투어 갖는 광경을 보고는 말하기를,『통제사가 필시 죽었을
것이다.』하였는데, 물어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신흠(申欽)의『상촌집(象村集)』「천조선후출병래원지(天朝先後出兵來援志)」에서】
이상에서와 같이 충무공의 사후를 목격한 사람들은 아들과 조카뿐만 아니라 송희립, 손문욱을 비롯한 좌선의 승선인원들은 거의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행록(行錄)』의 기록은 그것만이 가지는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해서 전사 당시 및 그 후의 상황을 재현한다면 충무공이 적탄에 맞아 전사하면서 당황하지 말고 차분히 전투를 마무리지을 것을 바로 곁에 있는 아들과 조카에게 유언을 했으며, 역시 적탄에 맞아 기절했다가 깨어난 송희립이 이 사실을 듣고 아들 회( )에게 안으로 옮기게 하고 충무공 대신 전투를 지휘합니다. 장자인 회는 시신을 지키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조카 완(莞)은 송희립과 더불어 전투를 마무리합니다. 연락관으로 왔다가 승선해 있던 손문욱은 이 사실을 목격하고 도원수, 체찰사에게 자신의 공으로 보고를 하고 절충장군에 가자(加資)됩니다.
류성룡이 『징비록』에서 조카 완(莞)의 성품과 함께 그를 중심인물로 기록을 하고, 『선조수정실록』은 이것을 채택하여 수록합니다.
이것이 이후에 나오는 모든 기록의 기준이 된 것입니다.
실록의 사평(史評)에 이문욱(李文彧)으로 표기된 것이 있는데, 이는 단순히 손문욱의 오기(誤記)일 수도 있고, 문욱이 충무공의 아들인 것으로 착각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또한 손문욱이 편장(偏將)인 것처럼 기술한 책도 있는데 이는 손문욱의 당시 신분에 대해서 잘 몰랐던 사람이 쓴 것입니다.
또한 남천우씨는 충무공의 아들과 조카가 노량해전에 처음으로 참가한 것으로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만, 충무공이 아들과 조카의
이름을 장계에 올리지 않았을 뿐 난중일기를 통해서 여러 전투에 참전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동생, 아들, 서자까지 사사로운 군공을 보고해서 상을 받을 수 있게 한 원균같은 이와는 천지차이인 점입니다.
4. 야간의 전투는 은닉을 위한 기도?
이것은 반론을 제기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노량해전에 대해서 기본적인 것 정도만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강요된 선택과 같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겁니다.
5. 충무공의 시에 나타난 소망 혹은 평상시의 발언?
자살설도 마찬가지지만 한 위대한 인물을 자신의 편협한 사고방식 내에서 판단하려고 하니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자고이래로 공직에서 물러나면 속세를 멀리하고 은거하고 싶다는 소망은 너무나 흔한 인간의 본연적인 것입니다.
그런 소망을 시에 표현한 것을 가지고 이런 식으로 가져다 붙이는 것은 당치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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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설이든_ 자살설이든...
못난 후손들이 추측한 결과 나온 말들이라고 봅니다...
아직 남은 왜적이 얼만데, 일신의 안위를 위해서 은둔하시고,
일신의 명예를 위해서 자살을 하신다니...
장군님 폄하라고 볼 순 없지만_ 그 분의 인품을 생각해 본다면 나올 수 없는 말이라고 봅니다.
저는 당시 해전의 상황에 대해 잘 모르지만
앎이 있으신 분들은_ 당시 상황에선 전사가 당연하다. 라고 말씀하시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