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의 근친혼은 깨끗한 피를 유지키 위한 최선의 방책
인류 성씨의 시조 염제신농(炎帝神農) 강석년(姜石年) 근친혼의 유래는 고대 제황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만 해도 근친혼이 성행한 것은 잡혈이 섞이는 것을 원치 않고 제황들만의 깨끗한 피를 유지하기 위한 최선의 방책으로 여긴 제황들의 의식이 반영된 오랜 관습이었다..
생각해보라 우수한 유전자를 지닌 민족이 미개한 종족들의 비천한 유전자를 받아들이고 싶겠는가? 현재의 유전상식과 도덕적 개념으로는 안 맞겠지만 그 시대에는 깨끗한 혈맥을 유지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방책이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배달국 고시례(高矢禮)의 후손인 치우 소전(小典=작은 법이란 뜻으로 벼슬명)이 서토를 평정하고 유웅국(有熊國=곰이 있는 나라)을 세웠다 그 아들이 강신농(姜神農)과 강공손(姜公孫)이다.
염제신농의 글자 금문(金門)
이때만 해도 천하의 성씨는 태호가 중토로 오며 지은 풍성(風姓)과 배달국의 원성인 강성(姜姓)밖에는 없었다 태호의 풍성은 8대를 끝으로 사라지고 천하에는 오직 강씨만이 성을 썼고 다른 미개한 종족은 자신들을 상징하는 성씨조차 없었다.
신농의 딸이 신농의 아우인 공손에세 시집갔다 이 공손의 후손이 후일 성을 희로 바꾼다.(천하의 주인은 하나이기에 신농의 성인 강(姜)에서 따로이 성을 만들며 자신을 낮춘 것이다. 이것이 성씨가 분성된 최초의 기록이다.
이렇게 강씨에서 희씨로 성을 바꾼 희 헌원의 후손이 후일 신농의 8대 손인 적제(赤帝) 유망에게 사위로 들어온다. 이것도 근친혼이다
이 헌원이 천하재패에 야망을 품고 적제 유망에게 도전장을 내민다. 사위가 배신하리라곤 생각못한 유망은 3번에 걸친 큰 전쟁에서 헌원에게 패한 후 산으로 들어가 버린다(중토 신선의 유래) 헌원은 희희낙락하며 자신을 황제(黃帝)라 칭하게 된다 여기에서 황제헌원이란 말이 나오게 된다
이것을 보다 못한 치우(姜)가 9려의 형제들을 끌어모아 헌원에게 도전한다.
유망의 아들인 괴(魁)를 배달국의 뒤를 이은 단웅국(檀熊國)의 제황에 앉힌 후 헌원을 사로잡고 그 영역을 멀리 장당(현티벳)까지 뻗어나간다.
이 단웅국에서 후일 단군왕검이 탄생하여 백두산으로 이주한 후 단군조선을 세운다
단군은 5가의 부족으로 나뉘어 서로 혼인을 맺고 제일 뛰어 난 자를 왕검으로 추대하여 단제(檀帝=단군)의 자리에 앉혔다
이렇게 씨족사회로 근친혼을 하던 단군조선이 수 천년이 흐른 후 타 미개한 부족들과 퇴폐한 풍습이 들어오고 단군은 다스릴 가치가 없다하며 스스로 제위를 버리고 산으로 들어간다(백두산 신선의 유래)
구심점을 잃어버린 단군조선의 민족은 수많은 민족으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게 되고 직계인 5가가 단군이 나올때까지 번갈아가며 섭정한 후 후일 북부여 해모수가 나와 단군의 자리에 오른다. 이 북부여에서 고주몽이 고구려를 세우고 고구려의 아들이 백제로 이어지며 역시 동족으로써 근친혼은 이어진다.
이런 근친혼의 풍습은 우리민족에서도 불과 수백년 전까지도 성행하던 풍습이었다.
물론 현재의 윤리나 유전학식으로는 이런 근친혼이 쉽게 납득이 안가는 건 당연한 것이다. 솔직히 필자도 처음엔 그랬으니까!
그렇다고 이것을 현대의 잣대로 좋으니 나쁘니 평가해댄다는 것 자채가 역사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증거하고 본다.
고대에 근친혼이 지금까지 유지가 되었더라면 아니 될 수도 없었겠지만 이미 그 종족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른 종족과의 혈연관계를 통해 유전자의 상생보완이 이루어져야만 유전자 변형없이 자손이 계속이어지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잘 인식하고 활용하여 현재까지도 변함없이 우수한 유전자의 이어짐은 계속되게 된 것은 민족으로 봐서도 현명한 일이었다.
시대에 따라 관습이 변하고 풍습이 변화되는 건 순리이다.. 함부로 그 시대의 관습에 대해 잘잘못을 가린다는 건 어패가 있다. 역사란 비판은 할 지언정 비난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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