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7. 24. 21:51ㆍ역사 자료
삼성기(三聖記)
삼성기 전 상편 안함로 지음
우리 한의 건국은 세상에서 가장 오랜 옛날이었는데 한 신이 있어 시백력의 하늘에서 홀로 변화한 신이 되시니 밝은 빛은 온 우주를 비추고 큰 교화는 만물을 낳았다. 오래오래 살면서 늘 쾌락을 즐겼으니 지극한 기를 타고 노닐고 그 묘함은 저절로 기꺼웠다. 모습없이 볼 수 있고 함이 없으면서 모두 이루고 말 없으면서 다 행하였다.
어느 날인가 동녀동남 800이 흑수백산의 땅에 내려왔는데 이에 한님은 또한 감군으로서 천계에 계시면서 돌을 쳐 불을 일으켜서 날음식을 익혀 먹는 방법을 처음으로 가르치셨다. 이를 한국이라 하고 그를 가리켜 천제한님이라고 불렀다. 또한 안파견이라고도 했다. 한님은 일곱대를 전했는데 그 연대는 알 수가 없다.
뒤에 한웅씨가 계속하여 일어나 천신의 뜻을 받들어 백산과 흑수 사이에 내려왔다. 사람 모이는 곳을 천평에 마련하고 그곳을 청구로 정했다. 천부의 징표를 지니시고 다섯 가지 일을 주관하시며 세상에 계시면서 교화를 베푸시니 인간을 크게 유익하게 하였더라.
또 신시에 도읍을 세우시고 나라를 배달이라 불렀다. 3,7일을 택하여 천신께 제사지내고 밖의 물건을 꺼리고 근신하며, 문을 걸어 잠그사 스스로 주문을 외우며 몸을 닦아 공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더라.
약을 드시고 신선이 되시니, 팔괘를 그으사 올 것을 알며 상을 잡으사 신을 움직였다. 또 여러 영험스러운 이들과 뭇철인들이 보필하도록 하시더니 웅씨의 여인을 거두어 아내로 삼으시고 혼인의 예법을 정하매, 짐승 가죽으로써 폐물을 삼았다.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고 시장을 열어 교환하도록 하니, 온 세상이 조공을 바치며 새와 짐승도 덩달아 춤추었다. 뒷날 사람들은 그를 지상 최고의 신이라고 받들어 세세토록 제사가 끊임이 없었다.
신시의 말기에 치우천왕이 있어 청구를 개척하여 넓혔으며, 18세를 전하여 1565년을 누리더라.
뒤에 신인왕검께서 불함산의 박달나무터에 내려오셨다. 그는 신의 덕과 성인의 어짐을 겸하여 갖추었으니 이에 능히 조칙을 받들어 하늘의 뜻을 이루었으니 나라를 세운 뜻과 법은 높고 넓고 강하고 열렬하였다.
이에 구한의 백성들이 마음 깊이 복종하여 그를 받들어 천제의 화신이라 하며 그를 제왕으로 모셨다. 그가 곧 단군왕검으로 신시로부터 전해지던 오랜 법을 되찾고 서울을 아사달에 설치하여 나라를 열었으니 조선이라고 불렀다.
단군은 하염없이 맨손으로 고요히 앉아서도 세상을 평정하고 깊고 묘한 도를 익혀 여러 생령들을 두루 교화하였다. 팽우에게 명하여 땅을 개척하도록 하였고. 성조에게는 궁실을 짓게 하였으며, 고시에게는 농사를 장려하도록 맡기셨고, 신지에게 명하여 글자를 만들게 하였으며 기성에게는 의약을 베풀게 하고, 나을에게는 호적을 관리하도록 하였으며, 희에게는 점치는 일을 관장케 하고, 우에게는 군대를 관장하게 하였다. 비서갑의 하백녀를 거두어 아내로 삼고 누에치기를 장려케 하니 순방의 다스림이 온 세상에 두루미쳐 태평치세를 이루었다.
병진(BC,425)년, 주나라 고임금(BC,440-425)때 나라 이름을 대부여라고 바꾸고 백악으로부터 또 장당경으로 옮겼다. 이에 팔조를 법으로 하고 글 읽고 활 쏘는 것을 일과로 하며 하늘에 제사지냄을 종교로 하고 누에기르기에 힘쓰도록 하였다. 어딜 가나 금지하는 바가 없었고 죄를 처자에게까지 미치지 않게 하며 백성과 의논하여 힘을 합쳐서 나라를 다스렸다.
사내에게는 언제나 직업이 있었고 여자에게는 좋은 짝이 있었으며 집집마다 재물이 쌓였다. 산엔 도적이 없고 들엔 굶주린 자가 없으며 거문고 노랫소리가 온 누리에 가득하였다.
단군왕검은 무진(BC,2333)년부터 나라를 다스려서 47세를 전하니 그 햇수가 2096년을 헤아렸다..
임술(BC,239)년 진나라 시황(BC,246-206)때 신인이신 대해모수께서 웅심산에서 일어났다.
정미(BC,194)년 한나라 해제때 연나라의 추장이었던 위만이 은근히 서쪽 변두리 땅의 한 구석에 스며들었는데 번한의 준이 이를 맞아 싸웠으나 이길 수 없자 바다길을 택해서 멀리 망명했다.
이로부터 삼한의 무리는 거의 한수의 남쪽으로 옮겨갔으나 한때에는 여러 영웅들이 요해의 동쪽에서 군대를 일으켰다. 계유(BC,108)년 한나라의 무제때에 한나라는 군대를 움직여 우거를 멸망시켰다. 서압록 사람인 고두막한이 의병을 일으켜 역시 단군이라고 했다.
을미(BC,86)년 한나라의 소제(BC,87-74)때, 부여의 옛도읍을 차지하여 동명이라고 나라 이름을 부르니 이것이 곧 신라의 옛 땅이다.
계해(BC,58)년에 이르러 봄철 정월에 역시 천제의 아들인 고추모가 북부여를 이어 일어났다. 단군의 옛법을 되찾고 해모수를 제사하여 태조로 삼고 처음으로 연호를 정하여 다물이라 하니 바로 고구려의 시조이다.
삼성기 전 하편 원동중 지음
인류의 조상을 나반이라 한다. 처음 아만과 처음 만난 곳은 아이사타라고 하는데 꿈에 천신의 가르침을 받아서 스스로 혼례를 이루었으니 구한이 무리는 모두가 고의 후손이다.
옛날 한(桓)국이 있었나니 백성은 부유하고 또 많았다. 처음 한임(桓因)께서 천산에 올라 도를 얻으시서 오래 오래 사셨으니 몸에는 병도 없었다. 하늘을 대신해서 널리 교화하시니 사람들로 하여금 군대를 동원하여 싸울 일도 없게 하였으며, 누구나 힘껏 일하여 주리고 추위에 떠는 일이 없게 되었다. 다음에 혁서한임 고시리한임 주우양한임 석제임한임 구을리한임에 전하고 지위리한임에 이르더라. 한임은 혹은 단임(檀仁)이라고 말한다.
옛글에 말한다.
'파나류산 밑에 한님의 나라가 있으니 천해 동쪽의 땅이다. 파나류의 나라라고도 하는데 그 땅이 넓어 남북이 5만리요 동서가 2만리이니 통틀어 말하면 한국이요 갈라서 말하면, 비리국 양운국 구막한국 구다천국 일군국 우루국(혹은 필나국) 객현한국 구모액국 매구여국(혹은 白多國) 사납아국 선비국(혹은 국 통고사국) 수밀이국이니 합해서 12국이다. 천해는 지금의 북해라 한다. 7세에 전하여 역년 3301년, 혹은 63182년이라고 하는데 어느 것이 맞는 말인지 알 수가 없다.'
한국말기에 안파견이 밑으로 삼위와 태백을 내려다보시며 ‘모두 가히 홍익인간할 곳이로다’ 하시며 누구를 시킬 것인가 물으시니 오가 모두 대답하기를 ‘서자 한웅이 있어 용맹함과 어진 지혜를 함께 갖추었으며 일찌기 홍익인간의 이념으로써 세상을 바꿀 뜻이 있었사오니 그를 태백산에 보내시어 이를 다스리게 함이 좋겠습니다’ 하니 마침내 천부인 세개를 내려주시고 이에 말씀을 내려 ‘사람과 물건의 할 바가 이미 다 이루어졌도다.
그대 수고로움을 아끼지 말고 무리 3000을 이끌고 가 하늘의 뜻을 열고 가르침을 세워 세상에 있으면서 잘 다스려서 만세의 자손들에게 큰 모범이 될지어다’ 라고 하셨다.
때에 반고라는 자가 있어 괴상한 술법일 즐기며 길을 나누어 살기를 청하매 이를 허락하였다. 마침내 재물과 보물을 꾸리고 십간 십이지의 신장들을 이끌고 공공 유소 유수와 함께 삼위산의 라림동굴에 이르러 군주가 되니 이를 일러 제견(諸?)이라하고 그를 반고가한이라 했다.
이에 한웅이 3000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 밑에 내려오시니 이곳을 신시라 하고 이분을 한웅천왕이라 한다. 풍백 우사 운사를 데리고 곡식을 주관하고 생명을 주관하고 형벌을 주관하며 무릇 인간의 360여가지 일을 모두 주관하여 세상을 교화하였으니 널리 인간 세상에 유익함이 있었다.
때에 한 곰과 한 범이 이웃하여 살더니 일찌기 신단수에서 빌었다. '원컨대 신계의 한 무리가 되어지이다'하니, 한웅이 이를 듣고 말하기를 ‘가르쳐 줄지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주술로써 몸을 바꾸고 정신을 바꾸었다.
먼저 신이 만들어 놓은 영혼을 고요하게 하는 것을 내 놓았으니 즉 쑥 한다발과 마늘 스무개라, 이에 경계하여 가로대 ‘너희들 이를 먹고 햇빛을 백일 동안 보지 않으면 쉽사리 인간다움을 얻으리라.’하니 곰과 호랑이 두 무리가 모두 이를 얻어먹고 삼칠일동안 기 하였는데 곰은 기한을 자 지켜서 타이름을 따르매 모습을 얻게 되었지만, 범은 게으르고 참을성이 없어서 금지하는바를 제대로 실행하지 못하니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이는 이들의 두 성질이 서로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웅녀는 더불어 혼인할 곳이 없었으므로 박달나무밑 무성한 숲 밑에서 잉태하기를 간곡히 원하었다. 그래서 임시로 변화하여 한(桓)이 되고 그와 더불어 혼인하니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호적에 실리게 되었다.
한웅천왕이 처음으로 몸소 하늘에 제사지내고 백성을 낳아 교화를 베풀고 천경과 신고를 가르치시니 무리들이 잘 따르게 되었다. 이로부터 후에 치우천왕이 땅을 개간하고 구리와 쇠를 캐내서 군대를 조련하고 산업을 일으켰다.
때에 구한은 모두 삼시을 모두 한 뿌리의 조상으로 삼고 소도를 관리하고 관경을 관리하며 벌을 다스리는 것 등을 모두 다른 무리와 더불어 의논하고 하나로 뭉쳐 화백하였다. 이에 지혜와 삶을 나란히 닦으면서 온전함을 이루었다. 이 때부터 구한은 모조리 삼한에 통솔되고 나라안의 천제의 아들은 단군이라고 불렀다.
<<밀기 >>에서 말한다. '한국말기에 다스리기 어려운 강족이 있어서 걱정거리였다. 한웅은 마침내 삼신으로써 가르침을 만들고 전계르 베풀어 무리를 모아 서약을 시켜 선악을 상주고 벌하는 법을 갖게 하였다. 이 때부터 스그머니 토벌하여 벌할 뜻을 품었다.
이 때에 무리의 이름은 통일되지 않았고 풍속도 오히려 점점 달라졌다. 원래 살던 무리는 범무리였으며 새로 살기 시작한 것은 곰무리였다. 범무리의 성질은 잔인한 것을 즐기며 탐욕이 많아서 오로지 약탈을 일삼았고 곰무리의 성질은 어리석으며 또 자만에 쌓여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비록 같은 굴에 산지는 오래 돌었다 하더라도 날로 멀어지기만 해서 일찌기 서로 도울줄도 몰랐고 혼인도 터놓고 한적이 없었다. 일마다 서로 따르지 않았고 모두가 하나같이 그 길을 같이 한 적이 없었다. 이에 이르러 곰무리의 여추장은 한웅이 신과 같은 덕이 있다함을 듣고 무리를 이끌고 찾아가 뵙고 말한다.
‘원컨대 한굴에서 함께 사는 저희들을 위하여 굴 하나를 내려주시고 신계의 무리로 받아 주옵소서’ 하니 한웅이 이를 허락하시고 저들을 받아들여 아들을 낳고 산업을 갖게 하였다. 그러나 범무리는 끝내 그 성질을 고치지 못하므로 이를 사해로 내쫓았다. 한(桓)족의 일어남이 이렇게 하여 시작되었다.
뒤에 갈고한웅이 나셔서 염제신농의 나라와 땅의 경계를 정했다. 또 몇대를 지나서 자오지한웅이 나셨는데, 귀신같은 용맹이 뛰어났으니 동두철액을 하고 능히 큰 안개를 일으키듯 온누리를 다스릴 수 있었고, 광석을 캐고 철을 주조하여 병기를 만드니 천하가 모두 크게 그를 두려워하였다. 세상에서는 그를 치우천왕이라고 불렀으니 치우란 속된 말로 우뢰와 비가 크게 와서 산과 강을 바꾼다는 뜻을 가진다.
치우천왕께서 염제신농의 나라가 쇠함을 보고 마침내 큰 뜻을 세워 여러차례 천병을 서쪽으로 일으켰다. 또 색도로부터 병사를 진격시켜 회대사이에 웅거하였다. 황제헌원이 일어나자 즉시 탁록의 벌판으로 나아가서 황제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고, 뒤에 오장군을 보내 서쪽으로 제곡고신을 쳐 공을 세우게 하더라.
한 때 천하가 셋으로 나뉘어 서로 대치하고 있었으니 탁의 북쪽에 대효가 있었고 동쪽엔 창힐이 있었으며 서쪽엔 황제헌원이 있었다. 이들은 서로 군대를 가지고 승리를 차지해보려고 했으나 아무도 이루지 못하였다.
처음 황제헌원은 치우보다 일어남이 조금 늦더니 싸움마다 이로움이 없자, 대효에 의존하려고 했으나 이룰수 없었고 또 창힐에 의존코자 했으나 그것도 뜻대로 안되었으니 이는 두 나라가 모두 치우의 무리였기 때문이다. 대효는 일찌기 간지의 술을 배웠고 창힐은 부도의 글을 배웠다. 당시의 제후들이 신하로서 섬기지 않는 자가 없음이 이 때문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말하기를, '제후가 모두 다 와서 복종하여 따랐기 때문에 치우가 지극히 휭포하였으나 천하에 능히 이를 벌할 자 없을 때 헌원이 섭정했다. 치우의 형제가 81인일었는데 모두 몸은 짐승의 모습을 하고 사람의 말을 하며, 구리로 된 이마와 쇠로 된 이마를 가지고 오구장 도극 태노를 만드니 그 위세가 천하에 떨쳐졌다. 치우는 옛 천자의 이름이다' 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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