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한단고기의 가치

2009. 7. 24. 22:05역사 자료

한단고기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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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이전 4,865년간의 <한국→한웅>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많은 이견에 봉착함은 사실이다. 우선, 이런 이견들을 다음의 두 가지로 정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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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단군이후의 역사를 연구하는데도 많은 마찰과 방해가 있거늘 그 이전의 역사를 연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도리어 단군 역사 연구에도 나쁜 영향이나 역작용을 자초시키는 결과를 몰고 온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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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단군조선(=고조선)의 전거가 고작 삼국유사의「위서운魏書云 ---」이 말하는「乃往二千載有檀君王儉立都阿斯達 開國?朝鮮與高同時」의 24자가 전부이나, 이 기록은 중국 25사의 하나인《위서》에 있는 기록이라는 뜻에서 중요시 되지만, 《한단고기》,《규원사화揆園史話》,《단기고사檀奇古史》등의 기록에 아무리 한임 한웅의 기사가 풍부하다 해도 《위서》와 같은 정사正史의 기록이 아니므로 사료로서 객관적 신빙성이 모자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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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모두가 선의의 충고요, 주장이지만 문제의 한 측면만을 지적하는 견해라고 생각하는 바다. 한단고기, 규원사화, 단기고사 등에 결격사유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런 사유만이라면 이들 사서를 배척할 이유로는 충분치 않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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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중국 정사가 이들 사서의 이름을 들먹거릴 이유나 당위성은 없는 것이니까, 25사에 실린 내용과 정면으로 충돌하거나 25사에 없는 기록만을 집대성한 책이라면 경계를 요한다 하겠으나, 그렇지도 않은데 기왕에 알려지지 않은 사서라고해서 특히 우리의 조상이 쓴 글이라고 해서 외면되어야 한다는 논리는 명분상 승복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25사나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이 우리의 상고사를 전부 언급하는 서적도 아닌 바에야 국내 사서라는 이유로 이를 경시해야 한다는 주장은 어딘가 어색한 느낌이 없지 않다. 또 종래의 사서들이 천편일률적으로 단군이후의 역사만을 강조하는데 비해 한단고기는 단군이전의 역사에 비중을 두고 있다는 점에 더욱 주목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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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의 세조 예종 성종 등이 8도 관찰사에게 명하여 전래의 희귀서들을 거두어들이라는 구서령求書令을 내렸는데 그 서목들을 보니《한단고기》의 안함로 원동중이 쓴《삼성기》와《규원사화》의 인용문헌인《조대기朝代記》등이 들어 있음을 보고 새삼 놀랬다. 이 수집 목록에 실린 서목의 숫자만 해도 20여종에 이르러 성종실록의 간행연대인 1499년에만도,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인데, 이토록 많은 사서가 남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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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운古記云…」에는 어떤 아마추어의 눈으로 봐도 한국시대, 신시개천시대. 단군시대의 3단계 기사로 실려 있다. 그중에서도 <한국+신시>의 기사가 압도적으로 많고 단군 기사는 제일 간략하게 압축되어 있다. 그런데 일반은 반대로 이 기사를 오직 단군 신화의 기록 즉, 곰의 기사로만 해석하고 있으니 안타깝다. 이미 우리정사에 보이는 한국+신시의 기사는 전혀 외면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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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점에서《한단고기》는 단군 전사의 값진 기록으로서 다음과 같은 커다란 의의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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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반도사관에 찌든 현대 사학에 올바른 역사 강역을 제시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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吾桓 建國 最古 有一神 在斯白力之天 (<삼성기 전>상편의 시작 부분에서)

(우리 한의 나라 세움이 가장 오래 되었으며 한 분의 신이 사백력의 하늘에 있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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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사백력은 곧 시베리아이며 필자에게 놀라움을 준 가장 큰 충격의 이름이기도 하다. 솔직히 고백컨대 사백력이 시베리아인 줄은 미처 몰랐고 또 시베리아가 한국의 역사 강역으로 등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누구보다도 대륙사관에 철저하여 반도사관을 나무라는 입장의 역사관을 갖고 있는 필자에게 있어서 이는 하나의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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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로 한국 12연방에 보이는 수밀이의 놀라움이다. 물론 수밀이는 슈메르Sumer를 뜻한다. 현대의 중국사서에는 소말蘇末이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현재 인류의 과학문명이 인정하는 가장 오래된 민족, 최고最古의 문화를 이룬 슈메르 민족이라 하며, 저 이스라엘의 히브리 민족보다 앞선 문명족으로 서양학계에 소개되어 있다. 이른바 <슈메르문제>라는 연구과제로 고대사학자에게 소개되는 신비한 민중이 슈메르인데, 그 슈메르조차 한국 12연방의 하나라는 사실이다. 또 동양전이나 25사에선 우리를 구이九夷라고 하여 동이의 갈래를 9지파支派로 보는데, 여기서는 12연방으로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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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째, 아담과 이브의 신화는 한국桓國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하는 문제의 제기이다. 여와는 태호복희의 누이다. 그녀는 흙을 빚어 7일만에 사람을 만들고 혼을 불어 넣었다고 하였다. <여와>라는 이름마저 <여호와>와 거의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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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媧者鍊土造像而注之魂七日而成焉

(여와는 흙을 빚어 사람의 형상을 만들고 이에 혼을 불어 넣어 이레 만에 사람을 만들었다.)

성경의 근거 문헌이 동방사회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하는 의문을 짙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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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째, 건원칭제建元稱帝의 새로운 명칭들이 많이 소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실례로 <태백일사>의 고구려본기에 실린 제왕 명칭과 연호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한자는 본문에서 참고하길 바람)   (연대는 기존의 한국사에서 통용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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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황명

기존의 왕명

연호

연     대

고주몽 성제

1대 동명왕

다물

B.C 97~19

태조 무열제

6대 태조왕

융무

A.D 53~146

광개토경호태열제

  19대 광개토왕 

영락

A.D 391~412

장수 홍제호태열제

20대 장수왕

건흥

A.D 413~491

문자호태열제

21대 문자왕

명치

A.D 492~510  

평강상호태열제

25대 평원왕

대덕

A.D 559~590

영양무원호태열제

26대 영양왕

홍무

A.D 590~618

보장제

28대 보장왕

개화

A.D 642~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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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단고기에 나오는 고구려~고려 왕조의 제황 칭호나 연호만 보아도 우리나라는 적어도 삼국시대나 고려왕조에 이르기까지 건원칭제를 단행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김부식 이후의 역대 사가들이 사대사상에 입각하여 우리의 역사를 모두 제후국의 역사로 변조하였음이 입증되고 있다. 이른바 일본의 나라현 이시까미 신사에 봉안된 칠지도七枝刀의 명문에 보이는「泰和四年」운운의 기록도 일본인들은 동진의 태화(366~371) 4년(369년)으로 해석하거니와, 백제의 고이왕(234~286)17 년(250년) 신공여왕의 야마다이국을 쳐부수고 그 땅에 종친들을 파견하여 부여씨의 왜국을 건설하고 그 발전을 기원하는 뜻에서 이 칼을 하사한 것이니, 칼의 명문속의 태화4년은 백제고이왕의 연호로서 AD237년을 뜻한다. 칠지도의 명문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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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泰和四年O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O七枝

 刀O辟百兵宜供供侯王OOOO作

 先世以來 未有此刀 百濟O世O 生聖晋 故爲倭王O造 傳OO世」

( 태화 4년(AD237) O월 16일 병오 백련검 칠지도를 만들다. 마땅히 모든 제후, 왕과 각군에 공급하여 비치케 할지어다. 선세 이래 이런 칼은 없었으며 백제O세 O께서 성진을 낳으시매 왜왕(지)을 위하여 이 칼을 만드노니 후세에 영세토록 전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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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가 제후국에 하사한 칼에 중국 진나라의 연호를 썼으리라 생각함은 망발이다. 당시 백제 고이왕의 연호가 태화였다. 태화의 연호를 삼국사기 등에서 찾지 못하자 엉뚱하게 동진의 연호 태화를 골라내는 궁상을 보라. 오늘 우리나라의 사학은 일본의 이 주장을 무조건 받아들이고 있다. 실로 가관이 아닌가? 태백일사에 나오는 고구려의 연호들이 언제인가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절대적 역할을 할 때가 있으리라 본다. 가령 융무, 건흥, 명치의 명문이 들어있는 출토품이 나온다는 것을 가상해 보라. 융무를 명나라의 융무 (1,645년)라고 하며, 건흥을 성한의 건흥(304~305년)이라 하고, 명치를 일본의 명치유신시대라고 망발하는 자 없으리라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백제가 왕후장상을 거느린 건원칭제의 나라이기에 왜왕에게 칠지도까지 하사했거늘, 고이왕이 동진의 태화연호를 차용해서 썼을 까닭이 없지 않은가? 적어도 신라 무열왕의 태화(647~650)라는 연호로 비정해 보는 자기 주창이라도 있어야 마땅치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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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사학의 거두인 두계 이병도 박사도 이 칠지도의「태화4년」만은 백제 연호일 것 이라고 했다. 그래서 3세기 중엽의 백제가 많은 제후를 거느린 일대 제국이었다는 사실에 승복했다. 생각하면 기막히는 일이다. 스스로를 과장하는 정도가 지나쳐서 지탄을 받는 일은 있어도 자학이나 자폄의 정도가 지나치다는 말은 좀체로 상상키조차 어려운 현상인 것이다. 《한단고기》에 다행히 고구려 고려조의 건원칭제 사실을 숨김없이 기술하여 우리에게 용기를 불러 일으켜 주었다. 기왕에 신라 백제의 건원칭제 진상도 밝혔더라면, 그래서 저칠지도의 태화 4년의 수수께끼도 풀어 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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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한단고기》의 이런 기술태도는 삼국사기 이래의 사대 사서 때문에 생겨난 천고의 한을 풀어주는 한가닥 청량제 구실을 하는 것이다.

출처 : 박프로
글쓴이 : 박프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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