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7. 24. 22:31ㆍ역사 자료
비류백제등
우리의 역사 가운데 정말 믿기 어려운 이설이 많은 것중의 하나가 백제의 역사이다. 그래서 백제에 관한 자료를 모아 보았다.
우선 그 첫 번째로 1998. 10. 18~2002. 3. 6까지 물경 홈페이지 접속회수 201만 9천여회를 기록한 http://www.chollian.net의 "韓舜根의 古代史 홈페이지"를 그대로 옮겼습니다.
목차(보시고 싶은 부분을 누르세요)
1. 개설
2. 건국시조
3. 비류백제
4. 온조백제
5. 구태백제
6. 백제의 해외분국 변동상황
7. 백제분국과 북위.고구려간의 전쟁상황
8. 담로제
9. 양나라 때 백제분국 상실사유
또 다른 자료
비류백제
1. 건국지 및 수도
2. 건국경위
3. 비류백제 역사
삼국사기(三國史紀) 백제본기(百濟本紀)에는 비류(沸流)가 패(浿).대(帶) 2강을 건너 미추골(彌鄒忽)에 이르러 살았다고 적혀 있다. 이 미추골의 미(彌)는 용(龍)을 뜻하는 말로서 용은 천제(天帝)의 아들을 뜻한다. 그리고 추(鄒)는 조(祖) 또는 고(古)와 같은 뜻이고, 골(忽)은 고을을 가리킨다. 따라서 미추골(彌鄒忽) 또는 미달(彌達)은 특정한 지명이 아니고 천제의 아들을 칭한 사람이 있는 곳 즉 수도라는 뜻이다.
비류(沸流)와 소서노(召西努)는 소서노의 부(父) 연타발(延타勃)과 같이 전에 고구려(일명 북부여)의 수도로 사용된 골본(忽本:지금의 심양)에서 살다가 B.C 42년에 따르는 무리들을 이끌고 심양 옆을 흐르는 혼하를 따라 하류로 내려와 패(浿).대(帶) 지역에 터를 잡고 많은 재물을 모은 후 재물로 고주몽의 입국을 도왔으나, 고주몽이 맏이(伯)인 자기를 태자로 삼지 않고 유리(琉璃)를 태자로 삼자 고주몽이 죽었을 때 패.대 지역에서 스스로 제위(帝位)에 올랐다.
위 패(浿).대(帶) 지역은 패수(태자하)와 대수(혼하)가 하류에서 서로 만나는 태자하(太子河)와 혼하(渾河) 하류이다. 즉 비류백제의 미추골(수도)은 태자하와 혼하 하류에 있었다.
어떤 분은 비류백제(沸流百濟)가 건국된 패.대 지역은 요서(遼西) 지방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분은 중국의 사서에 북평(북경)에서 유성(조양) 사이에 백제의 요서군(遼西郡)이 있었다고 적혀 있는 문구를 보고 그와 같이 주장하였으나, 뒤에 나오는 바와 같이 요서 지방으로 진출한 백제는 구태백제이지 비류백제가 아니다. 따라서 비류백제가 건국된 패.대 지역은 요서 지방이 아니다. 또 어떤 분은 비류백제(沸流百濟)가 건국된 패.대 지역은 예성강과 임진강 사이 지역이라고 주장하였다. 전한서(前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의하면 패수, 대수는 나라군(樂浪郡) 지역을 흐르던 강이다. 그러나 비류백제가 건국된 B.C 19년경에는 한반도에 나라군(樂浪郡)이 아직 설치되지 않았다. 따라서 비류백제가 건국된 패.대 지역은 예성강과 임진강 사이 지역이 아니다.
환단고기(桓檀古記)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에서 비류백제(沸流百濟)의 건국 경위를 살펴본다.
「연타발(延타勃)은 졸본(卒本) 사람이다. 남북의 갈사(曷思)를 오가면서 재물을 모아 부(富)를 이루어 거만금에 이르렀다. 은밀하게 주몽을 도와서 창업입도(創業立都)의 공을 세웠다. 뒤에 무리를 이끌고 구려하(九黎河)로 옮겨 고기잡이와 소금장사를 하게 되더니 고주몽(高朱蒙) 성제(聖帝)가 북옥저(北沃沮)를 칠 때에 양곡 5,000석을 바쳤다. 서울을 눌현(訥見)으로 옮길 때는 앞질러 자납을 원하여 유망민(流亡民)을 초무(招撫)하고 왕사(王事)를 권하여 공을 세웠으니 좌원(坐原)에 봉받았다. 延타勃卒本人來往於南北曷思而理財致富累至巨萬陰助朱蒙其創基立都之功居多後率衆轉徙九黎河而賈魚鹽之利及高朱蒙聖帝伐北沃沮納穀五千石移都訥見而先自願納招撫亡以勤王事以功得封於坐原而年八十歿多勿三十四年丙寅春三月也」
「고주몽은 재위할 때 일찍이 말하기를 "만약 적자인 유리가 오거든 마땅히 봉하여 태자로 삼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소서노는 장차 두 아들에게 이로울 것이 없음을 염려하였는데, 기묘년(B.C 42년) 3월에 (비류와 소서노는) 패.대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고 살기 좋다는 말을 사람들에게서 듣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辰).번(番)의 사이에 이르렀다. 바다에 가까운 외진 곳으로 여기에 살기 10년만에 밭을 사고 장원을 두고 부를 쌓아 몇 만금에 이르니, 원근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와 협력하는 자가 많았다. 북쪽은 대수(帶水)에 이르고 서쪽은 큰 바다에 임했다. 반천리의 땅이 모두 그의 것이었다. 사람을 보내 편지를 주몽에게 올리며 섬기기를 원한다고 하니 주몽제는 몹시 기뻐하며 이를 장려하여 소서노를 어하라(於瑕羅)에 책봉했다. 高朱蒙在位時嘗言曰若嫡子琉璃來當封爲太子召西弩慮將不利於二子歲己卯三月因人得聞浿帶之地肥物衆南奔至辰番之間近海僻地而居之十年買田置庄致富累萬遠近聞風來附者衆北至帶水西濱大海半千里之土境皆其有也遣人致書于朱蒙帝願以內附帝甚悅而奬之冊號召西弩於瑕羅」
「(어하라) 13년(B.C 19년) 임인에 주몽제가 돌아가자 태자 비류(沸流)가 즉위하였는데, 모두가 그를 따르지 않았다. 及至十三年壬寅而薨太子沸流立四境不附」
위 환단고기(桓檀古記)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문구에 의하면 비류(沸流)와 소서노는 연타발과 같이 골본(忽本)에서 살다가 B.C 42년에 패.대 지역으로 이동하여 10년만에 많은 재물을 모은 후 재물로 고주몽을 섬겼다. 소서노는 그 공으로 고주몽으로부터 패.대 지역을 다스리는 어하라(於瑕羅:백제왕의 칭호인 어라하의 오기?)에 책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주몽은 비류(沸流)를 태자로 삼지 않고 유리(琉璃)를 태자로 삼았다. 이는 고주몽고구려의 정통성 때문이다.
고주몽은 B.C 59년에 고구려 6세 고무서(高無胥) 단제(檀帝)의 딸과 결혼하였고, 다음해 B.C 58년 10월에 고무서(高無胥) 단제(檀帝)가 죽을 때 유언에 의하여 사위 자격으로 고구려의 대통(大統)을 이어 받았으나, 골본(忽本)에 있던 무리들이 고주몽을 죽이려 하므로 고주몽은 이들을 피하여 비류수상류로 도망가서 고주몽고구려를 세웠다.
고주몽은 비류수상류에 고주몽고구려를 세운 후, 분열된 고구려 무리들을 통합하기 위해서는 고주몽고구려왕이 고구려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다고 보고 소서노의 몸에서 난 비류(沸流)를 태자로 삼지 않고 고구려 6세 고무서 단제의 딸 예씨(禮氏)의 몸에서 난 유리(琉璃)를 태자로 삼았다.
비류(沸流)는 고주몽의 이러한 조치가 고주몽을 도와 준 자신을 배신한 것이라 생각하고, 고주몽이 죽었을 때 비류의 근거지인 패.대 지역에서 고주몽고구려의 정통성이 맏이인 자기에게 있다며 스스로 고주몽고구려의 제위(帝位)에 올랐다. 그러나 아무도 비류(沸流)를 따르지 않아 고주몽고구려의 정통성은 유리가 차지하였고, 비류(沸流)의 통치력이 미친 범위는 비류의 근거지인 패.대 지역에 국한되었다.
위 비류(沸流)라는 명칭은 [물(水)+불(弗)]+ [흐른다(流)]는 뜻이 합쳐진 것으로, 물(水)은 혼하를 뜻하고, 불(弗)은 비류 자신을 천제의 아들이라 칭한 것이며, "流"는 물을 따라 아래로 내려 왔다는 뜻이다. 고대에는 하늘에 있는 해를 "불"이라 불렀는데, 하늘에 있는 "불"은 하늘나라 임금(천제)을 뜻하였고, 지상에 있는 "불"은 천제의 아들을 뜻하였다. 즉 비류(沸流)는 물 옆에 살던 천제의 아들이 물을 따라 아래로 내려왔다는 뜻이다.
사서에는 비류(沸流)와 고구려(일명 북부여) 6세 고무서(高無胥) 단제(檀帝)와의 관계가 적혀 있지 않으나, 비류(沸流)가 고구려의 임금을 뜻하는 "弗(불)"자가 들어간 "沸流"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을 보면, 비류는 진짜던 가짜던간에 자신이 고구려 6세 고무서 단제로부터 고구려의 대통(大統)을 물려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비류가 고주몽의 적자가 아니라서 고주몽으로부터 고주몽고구려의 대통을 물려받지 못하여 단지 맏이라는 이유 만으로는 유리(琉璃)와의 정통성 싸움에서 이기기 어렵자 고주몽고구려의 정통성 외에 고구려의 정통성까지도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즉 비류(沸流)는 "伯帝"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맏이(伯)이기 때문에 고주몽고구려의 정통성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고, 또 "沸流"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고구려의 정통성까지도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였다.
환단고기(桓檀古記)나 삼국사기(三國史紀)에는 비류백제(沸流百濟)의 건국경위만 간략히 적혀 있을 뿐 비류백제(沸流百濟)의 역사나 멸망시기는 적혀 있지 않다. 그러나 삼국사기(三國史紀) 백제본기(百濟本紀)나 삼국사기(三國史紀)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는 비류백제(沸流百濟)의 멸망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내용이 적혀 있다.
「온조왕(溫祚王) 37년(A.D 19년) 한수(漢水)의 동북 부락이 흉년이 들어 민가 1천여 호가 (고주몽)고구려로 도망해 가고 패(浿).대(帶) 사이는 텅 비어 사는 사람이 없었다. 三十七年漢水東北部落饑荒亡入高句麗者一千餘戶浿帶之間空無居人」三國史記 百濟本紀
「대무신왕 2년 봄 정월 백제민 1천여 호가 와서 항복하였다. 二年百濟民一千餘戶來投」三國史記 高句麗本紀
위 문구에 의하면 A.D 19년경에 비류백제(沸流百濟)의 근거지인 패.대 지역이l 텅비어 사람이 없었으므로, 비류(沸流)는 이 무렵 패.대 지역에서 한지(韓地)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A.D 19년경은 고주몽고구려가 A.D 14년에 태자하(太子河) 중.상류 지역에 거주한 양맥(梁貊)과 심양(沈陽)에 설치된 현도군 고구려현(高句麗縣)을 점령한 후 요동반도 전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할 때이다. 이때 패.대 지역에 살고 있던 비류백제(沸流百濟) 무리들은 고주몽고구려가 점령한 태자하 중.상류 지역으로 도망갔다.
패.대 지역에 살고 있던 비류백제(沸流百濟) 무리들이 고주몽고구려로 도망가자 비류(沸流)는 한지(韓地)로 가서 홍성 금마 마한(馬韓)으로부터 마한(馬韓) 땅을 할양받아 한지(韓地)에 나라를 다시 세울 마음으로 남은 무리들을 이끌고 바다를 통하여 미추골(彌鄒忽:수도라는 뜻으로, 이 미추골은 비류가 洪城 金馬 馬韓을 만나기 위하여 한반도로 와서 일시 정착한 곳이므로 牙山灣에 있는 仁州 密頭里로 추정된다)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홍성 금마 마한이 온조백제(溫祚百濟)의 공격으로 멸망한 후라서 비류는 땅을 할양받지 못하였다. 이에 비류는 온조(溫祚)의 도읍지가 자리잡히고 백성들이 안락한 것을 보고 뉘우침 끝에 죽고 그 백성들은 모두 위례성으로 가서 온조(溫祚)에게 귀순하였다.
[註 어떤 분은 비류가 죽었을 때 비류백제(沸流百濟)가 멸망하지 않고 온조백제(溫祚百濟) 남쪽에 계속 존속하였고, 위 비류백제가 뒤에 요서(遼西), 중국동해안(中國東海岸), 일본열도(日本列島) 등지로 진출하는 등 강국(强國)이 되었다가 광개토왕(廣開土王)에게 패한 후 그 지배계층이 일본으로 망명하여 응신조(應神朝)를 세웠다고 주장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紀) 백제본기(百濟本紀)에 의하면 비류백제는 온조왕(溫祚王) 재위 때 멸망하였으므로, 위 주장은 사서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또 응신조(應神朝)가 세워진 해는 A.D 390년이고, 광개토왕(廣開土王)이 온조백제(溫祚百濟) 남쪽에 있던 구태백제(九台百濟:광개토왕비문에는 "倭" 또는 "伊殘"으로 적혀 있다)를 공격한 해는 영락(永樂) 6년(A.D 396년)이므로, 비류백제가 멸망한 후 그 지배계층이 일본으로 망명하여 응신조(應神朝)를 세웠다는 주장은 앞 뒤가 맞지 않는다. 요서(遼西), 중국동해안(中國東海岸), 일본열도(日本列島)로 진출한 백제는 비류백제가 아니고 구태백제이다.]
<이상 천리안에서>
비류백제 4백년사 요약(BC19-AD396)
연도 |
주 요 사 건 |
문헌 |
BC 19 |
비류/온조 형제 , 고구려에서 망명 |
백제본기 수서/북사 위지 왜인전 7지도의 명문 광개토대왕 비문 |
BC 18 |
대방고지에 비류백제 건국 | |
BC 7 |
비류 미추홀 도착, 온조 위례성 분립 | |
BC 6 |
비류백제 위례성을 공격하다 | |
BC 5 |
온조가 북쪽의 한산으로 천도하다 | |
AD 9 |
웅진 마한 축멸 | |
AD 18 |
비류백제 웅진으로 천도 | |
-AD100 |
왜국에 야마대 건설 | |
AD 146 |
재령강으로 진출 | |
AD 227 |
왜국과 연합으로 남강지역 전투 | |
AD 238 |
온조백제와 동맹결성 | |
AD 304 |
낙랑 침공 | |
AD 314 |
요서에 백제군 설치 | |
AD 317 |
양자강 하구에 식민지 개척 | |
AD 396 |
광개토왕의 기습으로 멸망 백제왕(응신)-일본망명 천황국가 건설(?) |
주) 김성호 교수의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이란 역사책에서 정리함
삼국사기(三國史紀) 백제본기(百濟本紀)에는 비류(沸流)가 패(浿).대(帶) 2강을 건너 미추골(彌鄒忽)에 이르러 살았다고 적혀 있다. 이 미추골의 미(彌)는 용(龍)을 뜻하는 말로서 용은 천제(天帝)의 아들을 뜻한다. 그리고 추(鄒)는 조(祖) 또는 고(古)와 같은 뜻이고, 골(忽)은 고을을 가리킨다. 따라서 미추골(彌鄒忽) 또는 미달(彌達)은 특정한 지명이 아니고 천제의 아들을 칭한 사람이 있는 곳 즉 수도라는 뜻이다.
비류(沸流)와 소서노(召西努)는 소서노의 부(父) 연타발(延타勃)과 같이 전에 고구려(일명 북부여)의 수도로 사용된 골본(忽本:지금의 심양)에서 살다가 B.C 42년에 따르는 무리들을 이끌고 심양 옆을 흐르는 혼하를 따라 하류로 내려와 패(浿).대(帶) 지역에 터를 잡고 많은 재물을 모은 후 재물로 고주몽의 입국을 도왔으나, 고주몽이 맏이(伯)인 자기를 태자로 삼지 않고 유리(琉璃)를 태자로 삼자 고주몽이 죽었을 때 패.대 지역에서 스스로 제위(帝位)에 올랐다.
위 패(浿).대(帶) 지역은 패수(태자하)와 대수(혼하)가 하류에서 서로 만나는 태자하(太子河)와 혼하(渾河) 하류이다. 즉 비류백제의 미추골(수도)은 태자하와 혼하 하류에 있었다.
어떤 분은 비류백제(沸流百濟)가 건국된 패.대 지역은 요서(遼西) 지방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분은 중국의 사서에 북평(북경)에서 유성(조양) 사이에 백제의 요서군(遼西郡)이 있었다고 적혀 있는 문구를 보고 그와 같이 주장하였으나, 뒤에 나오는 바와 같이 요서 지방으로 진출한 백제는 구태백제이지 비류백제가 아니다. 따라서 비류백제가 건국된 패.대 지역은 요서 지방이 아니다. 또 어떤 분은 비류백제(沸流百濟)가 건국된 패.대 지역은 예성강과 임진강 사이 지역이라고 주장하였다. 전한서(前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의하면 패수, 대수는 나라군(樂浪郡) 지역을 흐르던 강이다. 그러나 비류백제가 건국된 B.C 19년경에는 한반도에 나라군(樂浪郡)이 아직 설치되지 않았다. 따라서 비류백제가 건국된 패.대 지역은 예성강과 임진강 사이 지역이 아니다.
환단고기(桓檀古記)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에서 비류백제(沸流百濟)의 건국 경위를 살펴본다.
「연타발(延타勃)은 졸본(卒本) 사람이다. 남북의 갈사(曷思)를 오가면서 재물을 모아 부(富)를 이루어 거만금에 이르렀다. 은밀하게 주몽을 도와서 창업입도(創業立都)의 공을 세웠다. 뒤에 무리를 이끌고 구려하(九黎河)로 옮겨 고기잡이와 소금장사를 하게 되더니 고주몽(高朱蒙) 성제(聖帝)가 북옥저(北沃沮)를 칠 때에 양곡 5,000석을 바쳤다. 서울을 눌현(訥見)으로 옮길 때는 앞질러 자납을 원하여 유망민(流亡民)을 초무(招撫)하고 왕사(王事)를 권하여 공을 세웠으니 좌원(坐原)에 봉받았다. 延타勃卒本人來往於南北曷思而理財致富累至巨萬陰助朱蒙其創基立都之功居多後率衆轉徙九黎河而賈魚鹽之利及高朱蒙聖帝伐北沃沮納穀五千石移都訥見而先自願納招撫亡以勤王事以功得封於坐原而年八十歿多勿三十四年丙寅春三月也」
「고주몽은 재위할 때 일찍이 말하기를 "만약 적자인 유리가 오거든 마땅히 봉하여 태자로 삼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소서노는 장차 두 아들에게 이로울 것이 없음을 염려하였는데, 기묘년(B.C 42년) 3월에 (비류와 소서노는) 패.대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고 살기 좋다는 말을 사람들에게서 듣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辰).번(番)의 사이에 이르렀다. 바다에 가까운 외진 곳으로 여기에 살기 10년만에 밭을 사고 장원을 두고 부를 쌓아 몇 만금에 이르니, 원근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와 협력하는 자가 많았다. 북쪽은 대수(帶水)에 이르고 서쪽은 큰 바다에 임했다. 반천리의 땅이 모두 그의 것이었다. 사람을 보내 편지를 주몽에게 올리며 섬기기를 원한다고 하니 주몽제는 몹시 기뻐하며 이를 장려하여 소서노를 어하라(於瑕羅)에 책봉했다. 高朱蒙在位時嘗言曰若嫡子琉璃來當封爲太子召西弩慮將不利於二子歲己卯三月因人得聞浿帶之地肥物衆南奔至辰番之間近海僻地而居之十年買田置庄致富累萬遠近聞風來附者衆北至帶水西濱大海半千里之土境皆其有也遣人致書于朱蒙帝願以內附帝甚悅而奬之冊號召西弩於瑕羅」
「(어하라) 13년(B.C 19년) 임인에 주몽제가 돌아가자 태자 비류(沸流)가 즉위하였는데, 모두가 그를 따르지 않았다. 及至十三年壬寅而薨太子沸流立四境不附」
위 환단고기(桓檀古記)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문구에 의하면 비류(沸流)와 소서노는 연타발과 같이 골본(忽本)에서 살다가 B.C 42년에 패.대 지역으로 이동하여 10년만에 많은 재물을 모은 후 재물로 고주몽을 섬겼다. 소서노는 그 공으로 고주몽으로부터 패.대 지역을 다스리는 어하라(於瑕羅:백제왕의 칭호인 어라하의 오기?)에 책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주몽은 비류(沸流)를 태자로 삼지 않고 유리(琉璃)를 태자로 삼았다. 이는 고주몽고구려의 정통성 때문이다.
고주몽은 B.C 59년에 고구려 6세 고무서(高無胥) 단제(檀帝)의 딸과 결혼하였고, 다음해 B.C 58년 10월에 고무서(高無胥) 단제(檀帝)가 죽을 때 유언에 의하여 사위 자격으로 고구려의 대통(大統)을 이어 받았으나, 골본(忽本)에 있던 무리들이 고주몽을 죽이려 하므로 고주몽은 이들을 피하여 비류수상류로 도망가서 고주몽고구려를 세웠다.
고주몽은 비류수상류에 고주몽고구려를 세운 후, 분열된 고구려 무리들을 통합하기 위해서는 고주몽고구려왕이 고구려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다고 보고 소서노의 몸에서 난 비류(沸流)를 태자로 삼지 않고 고구려 6세 고무서 단제의 딸 예씨(禮氏)의 몸에서 난 유리(琉璃)를 태자로 삼았다.
비류(沸流)는 고주몽의 이러한 조치가 고주몽을 도와 준 자신을 배신한 것이라 생각하고, 고주몽이 죽었을 때 비류의 근거지인 패.대 지역에서 고주몽고구려의 정통성이 맏이인 자기에게 있다며 스스로 고주몽고구려의 제위(帝位)에 올랐다. 그러나 아무도 비류(沸流)를 따르지 않아 고주몽고구려의 정통성은 유리가 차지하였고, 비류(沸流)의 통치력이 미친 범위는 비류의 근거지인 패.대 지역에 국한되었다.
위 비류(沸流)라는 명칭은 [물(水)+불(弗)]+ [흐른다(流)]는 뜻이 합쳐진 것으로, 물(水)은 혼하를 뜻하고, 불(弗)은 비류 자신을 천제의 아들이라 칭한 것이며, "流"는 물을 따라 아래로 내려 왔다는 뜻이다. 고대에는 하늘에 있는 해를 "불"이라 불렀는데, 하늘에 있는 "불"은 하늘나라 임금(천제)을 뜻하였고, 지상에 있는 "불"은 천제의 아들을 뜻하였다. 즉 비류(沸流)는 물 옆에 살던 천제의 아들이 물을 따라 아래로 내려왔다는 뜻이다.
사서에는 비류(沸流)와 고구려(일명 북부여) 6세 고무서(高無胥) 단제(檀帝)와의 관계가 적혀 있지 않으나, 비류(沸流)가 고구려의 임금을 뜻하는 "弗(불)"자가 들어간 "沸流"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을 보면, 비류는 진짜던 가짜던간에 자신이 고구려 6세 고무서 단제로부터 고구려의 대통(大統)을 물려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비류가 고주몽의 적자가 아니라서 고주몽으로부터 고주몽고구려의 대통을 물려받지 못하여 단지 맏이라는 이유 만으로는 유리(琉璃)와의 정통성 싸움에서 이기기 어렵자 고주몽고구려의 정통성 외에 고구려의 정통성까지도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즉 비류(沸流)는 "伯帝"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맏이(伯)이기 때문에 고주몽고구려의 정통성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고, 또 "沸流"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고구려의 정통성까지도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였다.
환단고기(桓檀古記)나 삼국사기(三國史紀)에는 비류백제(沸流百濟)의 건국경위만 간략히 적혀 있을 뿐 비류백제(沸流百濟)의 역사나 멸망시기는 적혀 있지 않다. 그러나 삼국사기(三國史紀) 백제본기(百濟本紀)나 삼국사기(三國史紀)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는 비류백제(沸流百濟)의 멸망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내용이 적혀 있다.
「온조왕(溫祚王) 37년(A.D 19년) 한수(漢水)의 동북 부락이 흉년이 들어 민가 1천여 호가 (고주몽)고구려로 도망해 가고 패(浿).대(帶) 사이는 텅 비어 사는 사람이 없었다. 三十七年漢水東北部落饑荒亡入高句麗者一千餘戶浿帶之間空無居人」三國史記 百濟本紀
「대무신왕 2년 봄 정월 백제민 1천여 호가 와서 항복하였다. 二年百濟民一千餘戶來投」三國史記 高句麗本紀
위 문구에 의하면 A.D 19년경에 비류백제(沸流百濟)의 근거지인 패.대 지역이l 텅비어 사람이 없었으므로, 비류(沸流)는 이 무렵 패.대 지역에서 한지(韓地)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A.D 19년경은 고주몽고구려가 A.D 14년에 태자하(太子河) 중.상류 지역에 거주한 양맥(梁貊)과 심양(沈陽)에 설치된 현도군 고구려현(高句麗縣)을 점령한 후 요동반도 전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할 때이다. 이때 패.대 지역에 살고 있던 비류백제(沸流百濟) 무리들은 고주몽고구려가 점령한 태자하 중.상류 지역으로 도망갔다.
패.대 지역에 살고 있던 비류백제(沸流百濟) 무리들이 고주몽고구려로 도망가자 비류(沸流)는 한지(韓地)로 가서 홍성 금마 마한(馬韓)으로부터 마한(馬韓) 땅을 할양받아 한지(韓地)에 나라를 다시 세울 마음으로 남은 무리들을 이끌고 바다를 통하여 미추골(彌鄒忽:수도라는 뜻으로, 이 미추골은 비류가 洪城 金馬 馬韓을 만나기 위하여 한반도로 와서 일시 정착한 곳이므로 牙山灣에 있는 仁州 密頭里로 추정된다)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홍성 금마 마한이 온조백제(溫祚百濟)의 공격으로 멸망한 후라서 비류는 땅을 할양받지 못하였다. 이에 비류는 온조(溫祚)의 도읍지가 자리잡히고 백성들이 안락한 것을 보고 뉘우침 끝에 죽고 그 백성들은 모두 위례성으로 가서 온조(溫祚)에게 귀순하였다.
[註 어떤 분은 비류가 죽었을 때 비류백제(沸流百濟)가 멸망하지 않고 온조백제(溫祚百濟) 남쪽에 계속 존속하였고, 위 비류백제가 뒤에 요서(遼西), 중국동해안(中國東海岸), 일본열도(日本列島) 등지로 진출하는 등 강국(强國)이 되었다가 광개토왕(廣開土王)에게 패한 후 그 지배계층이 일본으로 망명하여 응신조(應神朝)를 세웠다고 주장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紀) 백제본기(百濟本紀)에 의하면 비류백제는 온조왕(溫祚王) 재위 때 멸망하였으므로, 위 주장은 사서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또 응신조(應神朝)가 세워진 해는 A.D 390년이고, 광개토왕(廣開土王)이 온조백제(溫祚百濟) 남쪽에 있던 구태백제(九台百濟:광개토왕비문에는 "倭" 또는 "伊殘"으로 적혀 있다)를 공격한 해는 영락(永樂) 6년(A.D 396년)이므로, 비류백제가 멸망한 후 그 지배계층이 일본으로 망명하여 응신조(應神朝)를 세웠다는 주장은 앞 뒤가 맞지 않는다. 요서(遼西), 중국동해안(中國東海岸), 일본열도(日本列島)로 진출한 백제는 비류백제가 아니고 구태백제이다.]
<my.netian.com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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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문헌
비류백제(沸流伯帝)
[비류백제는 언제 어디서 건국되었고 언제 멸망하였는가?]
1). 환단고기(桓檀古記)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에 적혀 있는 비류백제의 건국 경위
「연타발(延勃)은 졸본(卒本:註 전에 고구려의 수도로 사용된 심양 방면) 사람이다. 남북의 갈사(曷思:註 갈사는 큰 강이라는 뜻으로 압록강과 흑룡강 지칭)를 오가면서 재물을 모아 부(富)를 이루어 거만금에 이르렀다. 은밀하게 주몽을 도와서 창업입도(創業立都)의 공을 세웠다. 뒤에 무리를 이끌고 구려하(九黎河:註 심양 옆을 흐르는 혼하, 고대에는 요하나 혼하를 구려하라 불렀다)로 옮겨 고기잡이와 소금장사를 하게 되더니 고주몽(高朱蒙) 성제(聖帝)가 북옥저(北沃沮:장춘 방면)를 칠 때에 양곡 5,000석을 바쳤다. 서울을 눌현(訥見:註 장춘 방면)으로 옮길 때는 앞질러 자납을 원하여 유망민(流亡民)을 초무(招撫)하고 왕사(王事)를 권하여 공을 세웠으니 좌원(坐原:註 자기가 터전으로 삼고 있는 곳)에 봉받았다. 나이 80에 죽으니 바로 다물 34년 병인년[註 B.C 25년) 3월이다. 延
勃卒本人來往於南北曷思而理財致富累至巨萬陰助朱蒙其創基立都之功居多後率衆轉徙九黎河而賈魚鹽之利及高朱蒙聖帝伐北沃沮納穀五千石移都訥見而先自願納招撫亡以勤王事以功得封於坐原而年八十歿多勿三十四年丙寅春三月也」
「고주몽은 재위할 때 일찍이 말하기를 "만약 적자인 유리가 오거든 마땅히 봉하여 태자로 삼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소서노는 장차 두 아들에게 이로울 것이 없음을 염려하였다. 기묘년(B.C 42년) 3월에 (비류와 소서노는) 패(浿).대(帶)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고 살기 좋다는 말을 사람들에게서 듣고 남쪽으로 내려가(註 소서노가 연타발의 터전인 심양 방면에서 혼하를 따라 혼하하류로 내려 갔다는 뜻) 진(辰).번(番)의 사이에 이르렀다. 바다에 가까운 외진 곳으로 여기에 살기 10년만에 밭을 사고 장원을 두고 부를 쌓아 몇 만금에 이르니, 원근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와 협력하는 자가 많았다. 북쪽은 대수(帶水:註 혼하)에 이르고 서쪽은 큰 바다에 임했다. 반천리의 땅이 모두 그의 것이었다. 사람을 보내 편지를 주몽에게 올리며 섬기기를 원한다고 하니 주몽제는 몹시 기뻐하며 이를 장려하여 소서노를 어하라(於瑕羅)에 책봉했다. 高朱蒙在位時嘗言曰若嫡子琉璃來當封爲太子召西弩慮將不利於二子歲己卯三月因人得聞浿帶之地肥物衆南奔至辰番之間近海僻地而居之十年買田置庄致富累萬遠近聞風來附者衆北至帶水西濱大海半千里之土境皆其有也遣人致書于朱蒙帝願以內附帝甚悅而奬之冊號召西弩於瑕羅」 [註 고주몽은 재위할 때 일찍이 말하기를..중략..이로울 것이 없음을 염려하였다는 문구는 소서노가 고주몽을 섬긴 이후의 상황을 적은 것인데 순서가 바뀌어 앞쪽에 적혀 있다.]
「(어하라) 13년(B.C 19년) 임인에 주몽제가 돌아가자 (어하라국)의 태자 비류(沸流)가 즉위하였는데, 모두가 그를 따르지 않았다. 及至十三年壬寅而薨太子沸流立四境不附」 [註 어하라 13년이 B.C 19년이므로, 소서노가 어하라에 책봉된 해(어하라 원년)는 B.C 31년이다.]
위 환단고기(桓檀古記)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문구를 정리해 본다.
연타발(延勃)은 졸본(卒本:전에 고구려의 수도로 사용된 심양 방면) 사람으로 남북의 갈사(曷思:갈사는 큰 강이라는 뜻으로 위 문구에 나오는 남북 갈사는 압록강과 흑룡강을 지칭한다)를 오가면서 재물을 모은 후 B.C 28-27년에 고주몽이 북옥저(北沃沮:장춘 방면)를 칠 때 양곡 5,000석을 바쳤고, B.C 26년에 고주몽이 서울을 눌현(訥見:장춘 방면)으로 옮길 때 앞질러 자납을 원하여 유망민(流亡民)을 초무(招撫)하고 왕사(王事)를 권하여 공을 세우고 좌원(坐原:자기가 터전으로 삼고 있는 곳 즉 심양 방면)에 봉받았으며, B.C 25년에 죽었다. [註 고주몽이 연타발을 좌원에 봉하였을 때 당시 (고주몽)고구려의 세력이 연타발의 근거지인 심양 방면까지 미치고 있지 않았다. 이는 뒤에 고구려의 세력이 심양 방면까지 미치게 되었을 때 그곳을 연타발의 봉지(封地)로 인정해 준다는 뜻이다.]
연타발의 딸 소서노는 기묘년(B.C 42년) 3월에 패(浿).대(帶)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고 살기 좋다는 말을 듣고 무리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辰).번(番)의 사이에 이르러 여기에 살면서 고기잡이와 소금장사로 10년만에 몇 만금을 모으고 B.C 31년에 사람을 보내어 고주몽을 섬기기를 원한다고 하니 고주몽은 기뻐하며 소서노를 왕비로 삼고 패.대 지역을 다스리는 어하라에 책봉하였다.
그후 고주몽은 비류(沸流)를 (고주몽)고구려의 태자로 삼지 않고 고구려(북부여) 6세 고무서(高無胥) 단제(檀帝)의 딸 예씨(禮氏)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유리(琉璃)를 태자로 삼았다. 고주몽이 비류를 태자로 삼지 않고 유리를 태자로 삼은 것은 비류가 친자식이 아니라는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고주몽)고구려의 정통성 때문이었다. 고주몽은 B.C 59년에 고구려(북부여) 6세 고무서(高無胥) 단제(檀帝)의 딸 예씨와 결혼하여 다음해 B.C 58년 10월에 고무서(高無胥) 단제(檀帝)가 죽을 때 유언으로 고구려의 대통(大統)을 이어 받았으나, 골본(忽本:일명 卒本 당시 고구려의 수도인 심양 방면)에 있는 고구려 무리들이 고주몽을 죽이려 하므로 고주몽은 이들을 피하여 비류수(혼하) 상류로 도망 가서 (고주몽)고구려를 세운 후 분열된 고구려(북부여) 무리들을 통합하기 위해서는 (고주몽)고구려왕이 고구려(북부여)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다고 보고 고구려(북부여) 6세 고무서 단제의 딸 예씨(禮氏)의 몸에서 난 유리(琉璃)를 태자로 삼았다.
그후 임인년(B.C 19년)에 고주몽이 죽자 (어하라국)의 태자 비류(沸流)가 즉위하였다. 비류(沸流)는 자신이 비록 적자는 아니지만 고주몽을 친아버지처럼 섬겼는데도 맏이(伯)인 자신을 (고주몽)고구려의 태자로 삼지 않고 유리를 태자로 삼은데 대하여 불만을 품고 있다가 B.C 19년에 고주몽이 죽자 패(浿).대(帶) 지역에서 스스로 임금(帝)의 위(位)에 올라 (고주몽)고구려의 정통성이 맏이(伯)인 자기에게 있다는 뜻으로 백제(伯帝)라 칭하였다. 그러나 모두가 비류(沸流)를 따르지 않아 비류가 장악한 지역은 패.대 지역에 국한되었다. 이때 비류가 사용한 "沸流"라는 칭호는 물(水)+불(弗)+ 흐른다(流)는 뜻이 합쳐진 것으로, 물(水)은 혼하를 뜻하고, 불(弗)은 천제의 아들 즉 지상의 임금을 뜻하며, "流"는 혼하를 따라 하류로 내려 왔다는 뜻이다. 고대에는 하늘에 있는 해를 "불"이라 불렀는데, 하늘에 있는 "불"은 하늘나라 임금(천제)을 뜻하였고, 지상에 있는 "불"은 지상의 임금을 뜻하였다. 사서에는 비류와 고구려(북부여) 6세 고무서(高無胥) 단제(檀帝)와의 관계가 적혀 있지 않으나, 비류가 고구려(북부여)의 임금을 뜻하는 "弗(불)"자와 강을 뜻하는 "水"자 및 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 왔다는 "流"자를 사용하여 자신의 칭호를 만든 것을 보면, 비류는 자신이 고구려(북부여)의 대통(大統)을 물려 받았다고 자칭하였다. 이는 비류가 고주몽으로부터 친자식같이 대우받았지만 적자(適子)가 아니라는 이유로 고주몽으로부터 (고주몽)고구려의 대통을 물려받지 못하자 맏이라는 이유만으로는 유리(琉璃)와의 정통성 싸움에서 이기기 어렵다고 보고 (고주몽)고구려의 정통성 외에 고구려(북부여)의 정통성까지도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즉 비류는 "沸流"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고구려(북부여)의 정통성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한 외에 "伯帝"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자신이 맏이(伯)이기 때문에 (고주몽)고구려의 정통성도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였다.
2).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에 적혀 있는 비류백제의 건국경위
「일설에는 백제의 시조는 비류왕이다. 그 아버지 우태(優台)는 북부여왕(北扶餘王) 해부루(海扶婁)의 서손(庶孫)이요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니 졸본(卒本) 연타발(延勃)의 딸이다. 처음 우태(優台)에게 시집 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이는 비류(沸流)요 다음은 온조(溫祚)다. 우태가 죽으매 졸본에서 홀로 살았다. 그 뒤 주몽이 부여에서 용납되지 못하자 전한(前漢) 건소(建昭) 2년 봄 2월에 남으로 달아나 졸본에 도착하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소서노(召西奴)를 데려다가 왕비로 삼았다. 소서노가 주몽의 기업을 창건함에 대하여 자못 내조가 있었기 때문에 주몽의 사랑함과 대접이 특히 후하여 비류 등을 대하는 것도 자기의 소생자나 같았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적에 예씨(禮氏)에게서 낳은 아들 유류(孺留)가 찾아오자 세워서 태자로 삼아 왕위를 계승하게 하니 비류는 아우 온조더러 이르기를 처음 대왕이 부여의 난리를 피하여 도망해서 이곳에 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가산을 기울여 나라의 창업을 도왔으니, 그 공로는 이만 저만이 아니다. 지금 대왕이 세상을 싫어하여 국가가 유류에게 돌아가게 되었으니 우리가 부질없이 이곳에 있어 무사마귀 모양으로 답답하게 지낼진대 어머니를 모시고 남으로 가서 터를 잡고 따로 도읍을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고 드디어 아우와 더불어 도당을 거느리고 패(浿), 대(帶) 두 강을 건너 미추골에 이르러 살았다 한다.一云始祖沸流王其父優台北扶餘王解扶婁庶孫母召西奴卒本人延
勃之女始歸于優台生子二人長曰沸流次曰溫祚優台死寡居于卒本後朱蒙不容於扶餘以前漢建昭二年春二月南奔至卒本立都號高句麗娶召西奴爲妃其於開基創業頗有內助故朱蒙寵接之特厚待沸流等如己子及朱蒙在扶餘所生禮氏子孺留來立之爲太子以至嗣位焉於是沸流謂弟溫祚曰始大王避扶餘之難逃歸至此我母氏傾家財 助成邦業其勸勞多矣及大王厭世國家屬於孺留吾等徒在此鬱鬱如
贅不如奉母氏南遊卜地別立國都遂與弟率黨類渡浿帶二水至彌鄒忽以居之」
위 삼국사기 백제본기 문구를 정리해 본다.
비류의 아버지는 우태(優台)이고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이다. 소서노는 우태(優台)에게 시집 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이는 비류(沸流)고 다음이 온조(溫祚)였다.
고주몽은 전한(前漢) 건소(建昭) 2년 봄 2월에 부여에서 남으로 달아나 졸본에 도착하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소서노(召西奴)를 데려다가 왕비로 삼았다. 소서노가 주몽의 기업을 창건함에 대하여 자못 내조가 있었기 때문에 고주몽의 사랑함과 대접이 특히 후하여 비류 등을 대하는 것이 자기의 소생자와 같았다.
그후 고주몽이 부여에 있을 적에 예씨(禮氏)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유류(孺留)가 찾아오자 유류를 태자로 삼아 왕위를 계승하게 하니 비류는 이에 불만을 품고 도당을 거느리고 패(浿), 대(帶) 두 강을 건너 미추골에 이르러 살았다.
위 문구에 나오는 미추골(彌鄒忽))의 미(彌)는 용(龍)을 뜻하고 용은 천제(天帝)의 아들을 뜻한다. 그리고 추(鄒)는 조(祖) 또는 고(古)와 같은 뜻이고[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미추왕편 참조], 골(忽)은 고을을 가리킨다. 즉 미추골(彌鄒忽)은 어떤 특정 지역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고 천제(天帝)의 아들을 칭한 사람이 있는 곳(수도)이라는 뜻의 보통명사이다. 고기에 의하면 비류백제의 수도인 미추골은 패수(태자하)와 대수(혼하)가 하류에서 서로 만나는 패.대 지역에 있었다.
3).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에 적혀 있는 비류백제의 멸망경위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비류백제가 온조왕 시대에 멸망하였다고 적혀 있으나 정확한 연도는 적혀 있지 않다.
「전략..비류는 미추골이 토지가 습하고 물 맛이 짜서 편히 살 수 없어 돌아와 위례성을 보니 도읍이 자리 잡히고 백성이 안락하므로 드디어 뉘우침 끝에 죽으니 그 백성이 다 위례성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沸流以彌鄒忽土濕水鹹不得安居歸見慰禮都邑鼎定人民安泰遂慙悔而死其臣民皆歸於慰禮」 三國史記 百濟本紀
이때는 비류가 한반도에 터전을 마련하려고 무리를 거느리고 한반도로 건너온 후 상황이다. 따라서 위 문구에 나오는 미추골은 요동의 패.대 지역에 있는 미추골이 아니고 한반도에 있는 미추골이다. 삼국유사에는 이곳이 인주(仁州:아산군 인주면)라고 적혀 있다. 비류는 패.대 지역에 살고 있던 무리들이 동북쪽에 있는 고구려 영역으로 도망가므로써 패.대 지역이 텅 비자 홍성 금마 마한을 만나 땅을 할양받아 한반도에 터전을 마련하려고 남은 무리들을 이끌고 배를 타고 홍성 금마와 가까운 아산만으로 와서 지금의 아산군 인주면에 일시 정착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마한이 멸망한 후이고, 온조백제가 마한 지역을 점령하고 있으면서 비류의 정착을 용납하지 않자 비류는 뉘우침 끝에 죽고 그 백성들은 다 위례성으로 가서 온조에게 귀순하였다.
[註 삼국사기에는 미추골이 삼국사기를 지을 당시의 인주(今仁州:지금의 인천)라고 적혀 있고, 삼국유사에는 인주(仁州)라고 적혀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 건치연혁조(建置年革條)에 의하면 인천부(仁川府)는 고려 인종 원년에 설치되었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아산현(牙山縣) 건치연혁조(建置年革條)에 의하면 인주(仁州)는 고려 초에 설치되었다. 즉 삼국사기에 적혀 있는 금인주(今仁州)는 지금의 인천이고, 삼국유사에 적혀 있는 인주는 아산군 인주면이다. 조선시대에 지은 동사강목(東史綱目)과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인주가 지금의 인천이라고 적혀 있다.
「미추골(彌鄒忽)은 지금의 인천이다 세속에 전하여 오기를 문학산 위에 비류성(沸流城)의 터가 있고 성문의 문짝 판자가 지금도 남아있으며, 성 안에 비류정(沸流井)이 있는데 물맛이 시원하다고 한다. 여지승람에 실리지 않아 한스럽다.」 東史綱目
「여지지(輿地志)에 이르기를 미추골은 바로 비류가 도읍하였던 곳이다. 지금의 인천부 남쪽에 산이 있는데, 이름하여 남산(南山)이라 하고 또 일명 문학산이라고도 한다. 산 위에 성이 있는데, 대대로 비류왕(沸流王)이 도읍했던 곳이라 전해온다. 왕이 노하여 분개하다 죽은 까닭에 애분성이라고도 이름하였다. 인천부 남쪽 10리에 해평(海坪)이 있고, 그 위에 큰 무덤이 있는데, 담장을 둘렀던 옛 자취가 완연하다. 돌로 만든 사람이 넘어져 엎드러진 것이 매우 큰데, 세속에 전하기를 미추왕의 묘(墓)라고 한다.」 增補文獻備考
비류가 요동의 패.대 지역에서 배를 타고 한반도로 온 것은 마한이 멸망한 것을 모르고 마한을 만나 땅을 할양받아 한반도에 다시 나라를 세우기 위한 것으로 보이므로, 저자의 견해로는 위 문구의 미추골(彌鄒忽)은 인천이 아니라 홍성 금마와 가까운 아산군 인주면이 맞다. 동사강목 등에 인주(仁州)가 비류의 터전이라고 적혀 있는 것은 삼국사기 견해를 따른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비류백제의 멸망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내용이 나온다.
「온조왕(溫祚王) 37년(A.D 19년) 한수(漢水)의 동북 부락이 흉년이 들어 민가 1천여 호가 (고주몽)고구려로 도망해 가고 패(浿).대(帶) 사이는 텅 비어 사는 사람이 없었다. 三十七年漢水東北部落饑荒亡入高句麗者一千餘戶浿帶之間空無居人」三國史記 百濟本紀
「대무신왕 2년 봄 정월 백제민 1천여 호가 와서 항복하였다. 二年百濟民一千餘戶來投」三國史記 高句麗本紀
위 문구에 의하면 A.D 19년경 비류백제(沸流伯帝)의 근거지인 패.대 지역은 텅 비어 사는 사람이 없었다. 이 무렵은 고구려가 A.D 14년에 태자하(太子河) 중.상류 지방의 양맥(梁貊)과 심양(沈陽) 방면의 현도군 고구려현(高句麗縣)을 점령한 후 요동반도 전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을 때이다. 이때 패.대 지역에 살고 있던 비류백제 무리들은 동북쪽에 있는 고구려 영역으로 도망을 갔다.
일부 사학자는 위 백제를 온조백제로 보고 당시 온조백제의 북쪽인 지금의 황해도 지방과 평안도 지방에는 최리(崔理) 나라(樂浪)가, 함경도 지방에는 동옥저(東沃沮)가, 강원도 지방에는 동예(東濊:저자는 강원도 지방 나라<樂浪>로 본다)가 각 있었으므로, 백제인들이 고구려로 도망갔다는 위 문구는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비류백제, 온조백제, 구태백제의 역사가 함께 적혀 있는 사실을 간과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착각이다. 또 일부 사학자는 비류백제는 이때 멸망하지 않고 그 후에도 온조백제 남쪽에 존재하면서 요서(遼西)와 중국동해안 지방 등지로 진출하였다가 광개토대왕의 백제 정벌 때 일본열도로 쫓겨갔다고 주장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나 북사(北史) 등에 의하면 요서(遼西)나 중국동해안지방으로 진출하여 동이(東夷)의 강국이 된 백제는 비류백제가 아니고 구태백제이고,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비류가 세운 나라는 온조왕 시대에 멸망하였다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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