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영토는 티벳고원 북부를 뺀 동아시아다

2009. 7. 24. 23:47역사 자료

고려의 영토는 티벳고원 북부를 뺀 동아시아다

삼국통일 직후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 땅을 전부 차지했다. 천하고 작은 생선 당이 차지한 것이 아니다. 백제, 고구려 고토를 두고 당과 신라가 7 년 전쟁을 벌여 매소성(買肖城) 전투에서 당을 완전히 몰아냈다(?). 그런데 역사스페셜 6 권에는 매초성 전투를 이런 말로 시작한다.

현재 중국 역사학계가 인정하는 중국의 역사 지도에는 한반도의 백제와 고구려 지역이 당나라 영토로 표시되어 있다.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해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린 뒤 이 지역을 당의 지배 아래 두려고 백제의 옛 땅에는 웅진도독부를, 고구려의 옛 땅에는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중국에서는 이것을 당나라 영토로 보고 현재의 역사 지도를 그린 것이다. 만약 신라가 나당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했다면, 한반도 전체가 당나라 것으로 그려졌을 것이다.

드넓은 동아시아를 다 놔두고 한반도에다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와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 했다고? 백제 멸망 전쟁도, 부흥 운동도 전부 중국 대륙 동부와 발해만에서 있었다. 한반도 전라도에 200 여 성이 들어 가는가. 어떻게 200 여 성을 되찾은 부흥 운동이 가능하단 말인가. 본국 땅은 내버려두고, 고작 협소한 한반도에서 결전을 치루고 복흥운동을 하는 인간들도 있단 말인가.

“현재 중국 역사학계가 인정하는 중국의 역사 지도”라 함은 우리나라 사학계의 반도사관에 맞추어 제작한 지도이다. 우리나라가 자국사를 축소해 대니까 얼씨구나 하고 그에 맞추어서 제작한 것이다. 자기나라 역사에도 무지 하니까 이런 희극이 벌어지는 것이다.

웅진도독부와 안동도호부를 설치한 것은 신라다. 신라는 동아시아를 다 차지했고 당은 티벳고원도 아닌, 티벳고원 북부의 나라였다. 우리나라의 피지배 종족이라 그 종족명까지 선비족이었던 유목민이 세운 당은 한반도는 구경도 못했다. 신라를 대상으로 7 년 전쟁을 했다는 기록조차 사실로 보기 어렵다. 신라에게 “대책은 없고 단지 대국의 처분만 바랄 뿐이다”고 한 당이었다.




▲ 고려시대의 지명

쌍성총관부는 철령 이북이 아니라 철령 이서, 백제장성 이남에 설치됐다. 이성계가 살았던 곳은 쌍성총관부가 아니라, 고구려가 여진족을 이주시킨 후 대대로 살았던 채달목분지(동녕부)다. 채달목분지에도 고려장성이 지나가고 있다. 이성계는 동녕부의 고려장성 지역에서 살며 삐뚤어진 야망을 키웠던 것이다.
중국왜가 일본으로 이주한 이후 대마도는 탐라로 불리웠다.

삼국 통일 후 곧 대진국이 건국 되었지만, 그래도 신라는 백제 영토 일부를 차지했다. 대진국사로 치장한 당이 순순히 내줄 수는 없으니까, 7 년 전쟁을 날조한 것이다. 7 년 전쟁 역시 순수창작은 아니고, 삼국통일 전쟁이나 고구려 복흥운동 등에서 몇 개 슬쩍 빼왔을 것이다.

매초성은 어디에 있었는가. 당이 신라와 7 년 전쟁을 했다는 것은 허구가 분명 하지만, 그래도 그 당시의 지명을 보고, 날조했다. 현 사학계는 임진강 유역이라 하지만, 임진강은 회수다. 티벳고원 북부의 소국이 임진강까지 와서 삼국을 통일한 신라와 결전을 벌일 수는 없다. 매초성은 티벳고원 남부에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북부에서 가까운 곳에. 김사강 유역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7 년 전쟁이 신라와 대진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고구려의 옛터를 회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지니고 있다(복고려지구거 유부여유속 속일본기)

고구려는 동북아를 상실했다. 동북아는 백제가 차지했다. 중노가 중국 대륙을 차지 했다면, 대진국이 어떻게 고구려의 옛터를 회복 했다고 선언할 수 있는가.

삼국을 통일했을 당시, 신라의 영토는 티벳고원 북부를 뺀 동아시아다. 실로 엄청난 영토다. 잠깐이긴 해도 고구려 조차 갖지 못한 면적 이었다. 대진국이 고구려의 고토에서 건국하고 백제 고토를 신라와 나눠 가졌다. 이 말은 대진국이 대흥안령산맥 이북을 차지 했다는 말이다. 신라는 중국 대륙 동부를, 대진국은 중부를 가졌기 때문에 그 반대가 될 수 없다.


우리나라는 영토 곳곳에서 천문관측하고 자연현상을 관측한 나라였다. 규원사화도 “첨성대는 천 수 백년이 지났다(첨성대과천수백년이상외외연특립 만설)”고 했다. 북애가 말살되고 은닉된 우리나라 역사를 잘 알고 있었다는 증거다. 북애는 과거에 낙방한 선비가 아니다.

500 년에 신라의 중심지를 한반도로 옮긴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고구려와의 전투가 불가능하다. 신라는 중국 대륙에서 멸망한 나라다. 375 년 신라는 백제 땅 한반도를 침공해 첨성대를 세우고 천문관측했다.

927 년 견훤(甄萱)의 군대가 쳐들어올 당시, 경애왕(景哀王)은 11 월(음력)에 포석정(鮑石亭)에서 놀고 있었다. 포석정은 아열대기후 지역에 있었다. 신라 말기의 수도는 중국 남부에 있는 계림이다. 경주에 계림이라 부르는 초라한 숲에 포석정이라고 더욱 초라하게 만들어둔 곳이 있다. 이씨조선이 만들었다. 이씨조선은 큰 궁궐은 못 지어도 지명 바꾸고, 날조 내용으로 비석 만드는 정도는 할 수 있다. 그 짓을 엄청했다. 중국 대륙에는 아직도 계림(桂林)이 있다. 해남도(海南島) 정북으로 5 백 km 쯤이다. 밀린 지명이 아니다. 계림의 산수는 천하 최고라 했다. 그런 풍광이 여러 곳에 있을 리 없다. 계림은 김성(무한)에서 700 km쯤 떨어져 있는데, 이씨조선은 날조 김성(경주) 안에 계림을 갖다 놓았다. 이 역시 전형적인 지명 포개기 수법이다.

삼국통일 후 신라는 당연히 장안성으로 천도 했지만, 대진국에게 장안성을 빼앗기자, 첫 번째 수도 김성으로 재천도할 수밖에 없었다. 평로치청(平盧淄靑)이 신라 땅을 상당히 잠식해 김성을 위협했는데, 이 당시에 계림으로 천도한 것이 분명하다.



▲ 후삼국 시대의 지명



이 당시 신라는 계림으로 천도해 있었다. 수도 금성 근처에서 후고구려가 건국했기 때문이다. 개성은 오늘날의 합비(合肥)다. 무진주(武珍州 전라도 광주로 날조했다)는 오늘날의 홍콩쯤 된다. 신라장성의 위치에 주목하자. 삼국 통일 후 신라는 당연히 장안성으로 천도했지만, 대진국에게 장안성을 빼앗기자, 첫 번째 수도 금성으로 재천도할 수밖에 없었다. 평로치청이 신라 땅을 상당히 잠식해 금성을 위협하자, 계림으로 천도했다. 신라가 헌덕제 때 패수 유역에 장성을 쌓았다는 것은 신라가 평로치청(761~ 817)에게 한때 금성을 상실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금성을 회복하자, 금성 방어를 목적으로 장성을 쌓았던 것이다. 후고구려는 금성 지척에서 일어났다. 이때도 천도했다. 장성의 위치가 후고구려의 근거지와는 반대편에 있었기 때문이다. 장성을 패수 유역에 쌓았다는 것은 금성의 서북 방향에 쌓았다는 것이다. 후고구려는 금성의 동북 방향에서 일어났다. 신라장성의 위치가 패수 유역이라는 것은 대진국의 침공을 방어하기 위해서 쌓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장성을 축조할 당시는 평로치청이 멸망했기 때문에 신라의 적은 대진국 뿐이었다.

신라가 헌덕제(憲德帝 41 대 ?~826) 때 패수 유역에 장성을 쌓았다는 것은 신라가 평로치청(761~ 817)에게 한 때 김성을 상실 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김성을 회복하자, 김성 방어를 목적으로 장성을 쌓았던 것이다. 후고구려는 김성 지척에서 일어났다. 이때에도 천도했다. 장성의 위치가 후고구려의 근거지와는 반대편에 있었기 때문이다.

장성을 패수 유역에 쌓았다는 것은 김성의 서북 방향에 쌓았다는 것이다. 후고구려는 김성의 동북 방향에서 일어났다. 신라장성의 위치가 패수 유역이라는 것은 대진국의 침공을 방어하기 위해서 쌓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장성을 축조할 당시는 평로치청이 멸망했기 때문에 신라의 적은 대진국 뿐이었다.

고려는 중국 대륙의 신라 땅에서 일어난 후삼국의 경쟁을 통해 건국한 나라다. 후삼국 모두 중국 대륙에 있었기 때문에 경쟁할 수 있었다.

고려사 현종(顯宗)조에 “이 달에 교서 내리기를 고구려, 신라, 백제왕릉, 묘당과 그 소재지 주, 현에 영을 내려서 수리를 깨끗이 하고, 나무하기를 금하고, 지나가는 자는 말에서 내려 가도록 했다(시월교고구려신라백제왕릉묘령소재주현수치금초채과자하마)”고 나와 있다. 황릉을 이씨조선이 왕릉으로 축소한 것이다.

대제국 고려가 과연 한반도에 있는 손바닥 만한 고분을 삼국의 황릉으로 알았을까. 우리나라 식민지 왜 열도에도 응신이 정착했을 당시부터 거대 고분을 만들기 시작했다. 길이 460 m에, 폭 300 m짜리 고분도 있다. 후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식민모국 보다 더 큰 능을 만들 수 있는가. 식민지가 길이 460 m에, 폭 300 m짜리 고분을 만들었다면, 상국 백제와 신라는, 상국의 상국 고구려는 대체 얼마나 큰 고분을 만들어야 하는가. 이에 대한 해답을 태백일사 신시본기에서 찾을 수 있다.

고구려에 이르러서 능묘의 규격과 제도가 천하의 으뜸이 되었다(지우고구려능묘규제관어천하)

고려는 신라에게서 물려받은 영토를 기반으로 건국한 나라다. 김부식은 고구려가 동아시아 태반을 차지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고려는 고구려의 계승국이라 천명했던 것이다. 백제가 발해만이 아니라, 한반도 남부에 있던 나라라고 믿었다면, 백제는 중국 동부의 신라와 무수한 전투를 벌일 수 없으므로 삼국사기 자체를 쓸 수 없었다. 김부식은 백제가 백만대군을 보유 했으며 오, 월, 연, 제, 노 지역을 다스렸다고 삼국사기에 기록한 인물이다. 백제가 4 세기 말까지 동아시아 제1의 강대국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불국사는 528 년에 창건되고, 574 년에 중건을 거쳐서 751 년에 크게 개수했다. 751 년 이전에는 그리 크지 않은 가람 이었다. 751 년 부터 중심지도 아닌 한반도에다 불국사라는 공기가 수십 년이나 걸리는, 경내 면적만 11 만 7541 평에 달하는 대가람으로 개수한 이유는 중국 대륙의 혼란 스러운 정치적 상황을 수습하려는 염원 때문 이었다. 대진국이 고구려 땅 대부분과 백제 땅 일부를, 761 년에는 평로치청이 건국해 신라 영토 상당부분을 잠식했다.

768 년 부터, 770 년, 775 년, 780 년에는 신라 지배층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 뒤로 황위 쟁탈전이 이어졌다. 김대성(金大城 : 700~774)이 석굴암(石窟庵)을 창건하고 불국사를 중창한 해가 751 년이다. 평로치청이 건국되기 전부터 신라는 상당한 혼란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실상 신라의 혼란은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직후 이들 나라 사람들이 복흥운동을 하면서 부터 시작됐다.

비록 평로치청도 건국하고 후삼국으로 난립하지만 신라는 고려에게 중국 대륙 동부, 남부와 동북아 남부를 물려 주었다. 다무라 엔쵸(전촌원징)는 백제 멸망 후 “일본사신과 학승들이 당나라에 다닐 때 신라 배를 이용했고, 이들이 일본으로 돌아올 때는 반드시 신라를 경유했다”고 했다. 신라가 동아시아의 해안을 다 차지했으니까, 신라 선박에 동승하고, 신라 항구에서 출발하고 기항해야 했던 것이다.

여기서 당나라는 대진국이다. 역사왜곡 하면서 바꾼 말이다. 천하고 작은 생선(선비) 당은 미개 소국이다. 견당사를 파견해서 보고 배울 문물이 없었다. 신라를 피해 당으로 간 극소수의 고구려인들이 당 문물을 이끌었다고는 하지만, 우리나라에 비하면,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대진국은 대제국이긴 하지만, 이용가능한 해안을 확보하지는 못했다. 대진국의 영토는 시베리아까지 이르렀지만, 해안은 오오츠크(オホーツク)海 이북이다. 대진국의 중심지에서 너무 멀다. 그 외 동아시아의 모든 해안이 신라 영토 였으므로 대진국은 항구를 얻지는 못했다. 그래서 일본이 신라 선박으로 중국 대륙을 오간 것이다.

신라는 백제 땅을 대진국과 나누어 가졌지, 신라 영토는 상실하지 않았다. 왕건(王建 877~943)의 세력기반이 패서지방 이었다. 패수는 현재의 한수이다. 왕건이 일어난 곳은 신라 영토지, 대진국 영토가 아니다. 그랬다면 대진국을 멸망시키고 고려를 건국했을 것이다. 패수 하류는 신라 땅이고, 패수 상, 중류는 대진국 땅이었다.

759 년부터 몇 년간 일본은 신라를 치자고 대진국에 제안 했다는데, 이때도 일본은 항해술이고 선박 제작기술이 형편 없었다. 중국 대륙도 신라 선박에 얹혀서 왕래했다. 그러고는 신라를 치자고 제안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진국은 동아시아 제1의 대제국이고 일본은 속국이라, 신라를 치자고 제안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 그 옛날 신라가 백제 땅 한반도를 침공 했듯이 일본도 단독으로 신라 땅 한반도를 침공하려 했을까. 이 당시 중국 대륙의 신라 땅에 평로치청이 건국되어 어수선하기는 했다.



▲ 일본삼대팔번궁の일つ거(はこ)기궁



일본은 신라를 영원히 칠 수 없었다. 어째서 일본이 신공황후(神功皇后) 전설을 만들고 신라의 침입을 물리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하코자키궁(はこ崎宮)에 이국항복(伊國降伏)이란 현판(신라가 멸망하기 꼭 10 년 전에 그 짓을 했다)만 다는 것으로 끝낼 수밖에 없었는지 분명해 진다. 신라는 일본이 넘볼 수 없는 강대국이었던 것이다. 한반도의 소국이 아니라, 중국 대륙의 대국이었다.

그런데도 왜노는 1945 년 까지 전쟁에 패한 적이 없다고 역사날조하고 있다.

1945 년 9 월 27 일은 일본이 자랑하던 2600 년의 무패 역사에 종지부를 찍는 날이었다[에드워드 베르(Edward Behr)의 ‘히로히토 신화의 저편’에 나오는 첫구절이다. 라이프 2 차 대전에도 나온다. 분명 서양에 소개한 온갖 날조 일본사 책에다 저 말을 써놓았을 것이다].

백강 전투에서 신라에게 전멸 당한 것은? 제1차 여몽 연합군에게 대파 당하고 농성전을 벌여야 했던 것은? 이순신에게 7 년 내내 패한 것은? 진주대첩, 행주대첩에서 방어군의 10 배가 넘는 병력 으로도 패한 것은? 왜사의 실상이다.

왜노민족은 언제나 무패 역사에 종지부만 찍고 있었다.

왜노는 패한 역사는 절대 인정하지 않는구나! 패한 역사는 다 감추는구나! 얼마나 패배에 시달렸으면, 고작 상상 속에서 적을 물리치기를 기원했느냐? 하코자키궁(はこ崎宮)의 현판 이국항복은 왜 쓴 거냐?

신공황후 전설(일본의 역사는 응신이 왜를 세운 395 년 부터 이므로, 신공은 중국 대륙에 있었다. 그러므로 최소한 중국왜가 이주해서 일본의 권력을 장악했을 때에서야 신공황후 전설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신공황후의 모델이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제 남편까지 살해한 악독한 왜노 여자라고 한다)은 또 무엇인가? 왜노의 힘으로는 도저히 안되니, 귀신한테 신라를 물리쳐 달라는 게 아니냐? 오죽하면 침입 하지도 않는 신라를 막기 위해 백제 멸망 직후 왜(倭)열도에다 서둘러 성을 십여 개나 쌓았는가? 그깟 중국왜 한테도 4 차례나 져서 기모노섹스와 혼욕, 요바이의 난잡한 성문화에 빠져든 왜노가 아니냐?

그 결과 제 자식과 남의 자식을 구별할 방법이 없어, 천년 넘게 가계가 단절되어 가문해체의 지경에 까지 이른 나라가 일본이다. 배우자가 낳았으니, 내 자식 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나라가 일본이다. 일본의 가계는 핏줄로 이어진 가문이 아니다.

태고 적에 동아시아를 지배 했다고? 그런데 고작 일본 열도에 쪼그라든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전쟁에 패한 것이 아닌가? 탐욕스런 왜가 순순히 포기 했다는 것인가? 상상 속에라도 전쟁에 패하지 않고 동아시아를 상실할 수 있는가? 혈통조차 제대로 간수하지 못해, 한민족과 75.8%(일본국립유전자협회가 공식인정하는 호라이의 연구이다)나 차이가 나는 왜노민족이다.

백제가 중노와 왜노를 통털어 한위노라고 불렀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백제의 기준에 의하더라도 왜노와 섞인 일본은 더 이상 동아시아를 지배한 한민족이 아니다. 심하게 오염된 유전자를 가진 식민종족일 뿐이다.

미개 중국왜의 저질 문화를 받아들여 국풍이라 하고, 후지와라 시대(藤原時代)라고 부르더니만, 고작 한국어에서 받침 떼고 음절을 늘여 일본어까지 만들 더니만(일본어 모체는 한국어다, 2003. 10. 21, 주간조선), 그래도 한민족이 태고적부터 동아시아를 지배한 사실은 계승하고 싶었는가? 참으로 왜노의 감정은 모순되고도 복잡하다. 일본에 자생한 민족이고 싶은 동시에 수천 년간 동아시아를 지배한 한민족이고도 싶어 하니까.

왜노민족은 홋가이도(北海道)의 아이누족도 1869 년 부터 치열한 전투 끝에 간신히 정복하지 않았는가? 그것조차 메군(米軍)이 남북전쟁 당시 입고 사용했던 골동품 군복이며, 총기로 무장하고 정복한 것이 아닌가?

2600 년 동안 패하지 않는 역사를 가진 민족이 어떻게 일찌감치 세계정복은 못했더란 말인가. 몽고도 하고, 匈奴(훈족)도 하고, 말갈(돌궐)도 유럽까지 그 영토를 넓혀 나가지 않았던가. 욕심만 무한대인 왜노가 어째서 고작 19 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세계정복을 꿈꾸었단 말인가.

왜노 치켜 세우기에 정신없는 서양인들은 이런 것을 실증사학이고 객관적 증거라고 부른다. 그래도 자신들에게 얽힌 것은, 이리 따지고 저리 따져 사실 여부를 확인한다. 그래서 2 차 대전도 일본이 승리한 것이 아니고 자신들이 승리한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왜노의 무패역사가 2600 년에서 끝장난 것이다, 우리나라와 붙었다가 패했으면, 아직도 왜노사는 무패 행진 진행 중이다.

일본의 날조 역사는 이처럼 하나같이 말도 안되는 거짓말로 일관하고 있다.

2600 년의 역사라는 것조차 거짓말이다. 일본의 역사는 395 년 응신이 열도에 도착한 때로부터 시작됐다. 이전에는 나라가 없었다. 1600 년사에 불과하다. 하물며 1945 년에는 1500 년사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런 일본사마저 대부분의 기간 동안 미개하기 짝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일본은 고작 중국 대륙 남부에 있던 중국왜를 종이 위에서 슬쩍 끌고 와 한반도 남부로 갖다 놓고 임나일본부니, 삼국을 지배 했다느니 헛소리를 늘어 놓지만, 한위노 중국왜가 일본으로 이주한 사실은 숨기기 위해 중국왜와의 전쟁도 아이누족과의 전쟁으로 날조했다. 중국왜가 일본으로 이주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중국왜도, 일본왜도 다 우리나라의 지배를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왜조차 광개토경호태황이 정복하기 전에는 나라가 없었다. 촌락의 연합체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나라 역사책을 베낀 삼국지에도 왜국이 아니라, 왜인조(倭人條)라 했다. 그래서 5 세기 초 부터 부지런히 고구려에 사신을 보낸 끝에 5 세기 말 왜를 통합한 대장군이 되고 왜왕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았던 것이다.


고려가 대제국 이었음은 고려도경, 고려사, 해동역사[海東繹史, 경인문화사 간행 해동역사 하권 627 쪽 기록 해동역사 속권 제 10(海東繹史 續卷 第 十) 烈水 韓致奫 術(열수 한치윤 술) 지리고 10 (地理考 十) 고려 일 강역총론] 뿐만 아니라, 태백일사에도 나온다. “우리 천수(天授) 태조(왕건)께서 창업의 바탕으로 고구려의 다물이 나라를 세운 풍도(風道)를 계승 하였다(아천수태조이창업지자승고구려다물입국지여풍)].”

단 한 치의 과장도 없는 사실이다. 고려는 다물의 국시를 계승했고, 이씨조선은 이를 감추었던 나라다. 이씨조선은 고려의 광대한 영토를 물려 받고도 온세상의 평정은 커녕, 우리나라 5 천년의 속국한테 다 떼어주고 끝내 한반도로 찌그러 들었다가 망한 예맥족의 나라다. 역사말살까지 해가며 미개 소국 명을 문명대국으로 만들어준 예맥족의 나라다. 자신이 창작한 문명대국 명만이 아니라, 청에까지 굽실대던 예맥족의 나라다.

고려는 대제국 이었다. 몽고간섭기(?)에도 황하 이남과 동북아를 영토로 한 대국이었다. 몽고의 영토라고 알려진 땅의 4 분의 1은 고려 영토였다. 이 시기 티벳고원 북부의 중국은 나라 자체가 망했다.

고려가 고작 손바닥만한 한반도를 통일하느라 중앙세력과 지방세력이 타협했던가. 우리나라 수천 년의 피지배종족 흉노도, 몽고도, 말갈도 서유럽까지 제패했다. 그런데 이 땅의 사학자들은 우리가 고작 한반도를 통일하는 것조차 버거워 중앙세력과 지방세력이 타협을 했다고 한다.

서양에 이르는 광대한 땅을 차지한 몽고가 고작 한반도 북쪽 끄트머리에 연연하여 두 곳에다 행정기관까지 설치했던가. 그 인력으로 서양을 계속 정복하면, 훨씬 더 넓은 지역을 차지한다는 것은 몽고가 더 잘 안다. 서양으로 거침없이 뻗어가고 있었는데, 고작 손바닥만한 동압록 강변에 그토록 강한 애착을 가진단 말인가. 굶어죽을 뻔한 소국 당조차 백제 땅에는 웅진도독부를, 고구려 땅에는 안동도호부를 설치 했다고 날조했다. 유라시아를 대부분 차지한 몽고가 고작 백두산 일대에 행정기관을 둘씩이나 설치해 지배했단 말인가. 고작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고 다루가치(달노화적)를 두었단 말인가. 편자 같으면 콘스탄티노플에 총관부를 설치하고 다루가치를 두겠다. 날조 몽고제국에 비하면 한반도는 완전히 점에 불과하다.



▲ 몽고간섭기의 동아시아



쌍성총관부, 동녕부, 8 참(첩), 거란 수비지역 모두 사한국이 아니라 몽한 땅이다. 몽고고원에는 오고타이한국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소종이 몽고고원으로 도주해 몽한의 명맥을 이었다는 사실에서 몽고고원은 몽한의 직할지로 추정된다. 어쨌든 쌍성총관부와 동녕부에 의해 고려는 장성 이남과 동북아로 완전히 분단된 것이다. 몽한은 원으로 날조된 나라의 원래 국명이다.

몽고가 유라시아 대제국을 건설 했다면서 고작 한반도를 정복 하고자 40 년 동안 전쟁을 벌였다는 것인가. 몽고가 한반도에 눈독 들이지 않았으면, 서유럽도 정복하는 것인데, 몽고만 몰랐던가. 우리나라가 지지리도 작은 소국 이라면서 어째서 이럴 때만, 우리나라의 가치를 무한대로 상승 시키는지 모르겠다. 동녕부와 쌍성총관부, 8 참(八站)을 설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우리나라가 강대국이라 몽한의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다.

고려가 한반도 뿐인데, 몽고가 청야전술(淸野戰術)로 타격을 받을 수 있는가. 고작 수백 km를 비웠다고 군수품을 조달하지 못한다면, 몽고는 서방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할 수 없었다. 중앙아시아와 서남아시아에도 사막이 넓게 펼쳐져 있다. 징기스칸(成吉思汗)이 몽고고원을 통일하고 황하 이북도 싸워서 얻었다니까, 고비사막이나 오르도스 사막에서도 전투를 한 셈이다. 날조 몽고제국에 비해 한반도는 인체로 비유하면, 얼굴도 아니고 한쪽 귀에 불과하다. 몽고가 한반도를 침입 했다면, 한반도 내에서 군수품 조달이 불가능할 경우, 한반도 이북에서 조달하면 된다. 그러나 고려는 청야전술 조차 사용할 기회가 없었다. 몽고가 고려를 침입하지 않아서.

서방에는 이슬람인을 다루가치(達魯花赤)로 두고, 고려 땅에는 한때 서경(?)과 서북면 지역에만 72 명의 몽고인을 다루가치로 두었다? 유독 한반도 북부, 그것도 서쪽에만 72 명의 몽고인 행정관을 집중적으로 배치했다? 몽고에게 서경(?)과 서북면 지역이 중요했던 이유는 고려가 중국 대륙에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는 전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고 건조한 나라다(소우기). 동아시아의 무역대국 고려의 수도 개경은 국제적인 무역도시였다. 수많은 외국상인과 사절로 붐비고 이들이 묵는 10 여 개의 객관은 궁궐만한 규모라 했다.

무역대국 고려는 동아시아를 넘어 인도, 아라비아 등과도 교역했다. 이해 하겠지만 이 당시 유럽은 너무 미개해서 고려의 교역 상대국이 될 수 없었다. 메국(米國)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콜럼버스 조차 수백 년 뒤의 사람이다.

고려는 무역에만 힘쓴 게 아니고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자부심으로 잃어버린 옛 땅 회복에 나섰다. 고려의 화약과, 주화(로켓), 대포를 체험한 중노는 이것마저 훔치기에 나섰다. 주화를 모방해 만든 것이 비화창(飛火槍)이다. 송이 아니고, 금한이 만들었다. 금한을 세운 예맥족이 시달목분지에 있으면서 고려의 주화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고려는 예맥족도 병사로 활용했을 것이다. 몽고가 금한의 수도 변경(邊京)으로 쳐들어 갔을 때 변경의 수비군이 고려의 주화를 모방한 비화창으로 대항했다. 이후 몽고는 유럽을 침공 하면서 금한에서 입수한 로켓무기를 사용했다.

최무선(崔茂宣 ?~1395)이 중국으로 가서 화약제조법을 배워 왔다고? 중국 대륙이 고려 영토의 일부이다. 최무선이 염초 제조법을 중노 그것도 100 % 유목민족 몽한인 이원(李元)으로부터 배웠다고? 염초(焰硝)는 4700 년전, 배달 14 세 자오지 한웅 때 벌써 만들었다. 고려인 이원이 중토에 가서 염초제조법을 가르쳐준 것이다. 그것으로 중노도 화약 무기 비슷한 걸 만들었다. 고려의 화약무기가 중국으로, 다시 몽고로 전해진 것이다. 몽고는 고려의 화약 무기로 세계를 정복했다.

고려는 권문세족의 나라였다. 이들 권문세족들은 산천을 경계로 삼은 거대농장을 소유했다. 농장에 마당 장(場) 자도 아니고 장전 장(莊) 자를 썼을 정도로 거대했다. 황실 소유의 농장은 360 개에 달했다. 대체 손바닥만한 한반도에 그 땅들이 다 들어갈 수나 있는가.


하음(河陰), 진강(鎭江), 해령(海寧)의 전답에서 수확물을 제왕, 재추(宰樞) 이하 차별을 두어 분급(分給)했다(하음진강해녕지전분급제왕재추이하유차 고려사절요)

고려는 제후, 제왕까지 거느린 황제국이었다. 날조사에서 고종 44 년은 여몽전쟁의 막바지 라면서? 고려 전기도 아니고, 이 당시에도 제후, 제왕이 있었다. 고려는 실상 몽고간섭기(?)에도 제왕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개성에 고려의 궁궐터가 있다고? 현 개성에 있는 궁궐터는 고려 제왕의 왕성터이다. 의종(毅宗 1127~1173)이 직접 썼다는 글에 “일본이 보물을 바치며 의종을 황제라 불렀다”는 대목이 있다고 한다(역사스페셜 4권). 이상한 글이다. 의종이 직접 썼는데, 자신을 의종이라 그러고. 의종이 왕에 불과 했다면 이렇게 썼다. “일본이 보물을 바치며 나를 황제라 불렀다.” 고려는 동아시아의 유일한 황제국이었다. 그러니까 일본이 조공을 하면서 황제라 부르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그로부터 65 년 뒤에는 왜구(倭寇)가 출몰해서 고려 땅에서 노략질을 하기 시작 했다는데...... 일본은 상국으로 섬겨온 고려에서 온갖 잔학행위를 시작한 것이다.

◀ 최무선 영정

주목할 점은 왜구가 중국 대륙을 노략질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한반도만 노략질했다. 고려의 역사는 송에 배당되었다. 왜구가 16 세기에 명을 노략질하던 광경을 그린 왜구도권(倭寇圖券)이 도쿄 대학 사료편찬소에 소장되어 있다. 왜구가 약탈한 명의 유물도 대마도에서 발견됐다. 그런데 송을 노략질 했다는 기록이나 송의 유물로 날조된 중국 대륙에 있던 고려의 유물은 일본에서 발견되지 않았다. 왜구는 중국 대륙이 아니라 한반도를 노략질한 것이다. 최무선이 왜구 500 척의 대선단을 격파했다(?)는 진포대첩(鎭浦大捷)과 이성계(?)가 지휘했다는 황산대첩(荒山大捷)은 한반도에서 일어났다. 실상 진포도, 황산도 아니었던 것이다.

일본은 중국 대륙이 아니라, 한반도에 있던 고려 제왕에게 조공을 했다. 고려 시대에도 중국 대륙을 오갈 능력이 없었다. 일본은 고려 제왕에게 조공하며 황제라 불렀던 것이다. 그 말이 너무 웃겨서 적어 놓았던 것이다. 하지만 고려를 한반도의 나라로 축소시켜 놓았으니까, 일본이 조공하는 제왕을 둘 수 없고, 그래서 의종을 황제라 불렀다고 바꿨다. 일본은 1019 년 한반도의 제왕이 파견한 고려 함대에 정복되었을 때부터 한반도에 조공했다.

기원전 65 년경에 그렸다는 기토라(キトラ) 고분 벽화 천문도에 의해 한반도는 백제 이전부터 북위 38.4° 에서,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주극원의 크기에서 이씨조선 초 까지도 북위 38.4° 에서 천문관측 해왔음이 밝혀졌다. 북위 38.4°는 한반도의 고정적인 천문관측 지점이었다. 고려 시대에도 당연히 북위 38.4°에서 천문관측했다. 그래서 최적 일식관측지와 한반도를 다스리는 고려 제왕의 궁궐 위치가 일치하지 않았다.

고려의 도읍은 고구려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도읍이고 대진국의 도읍인데, 한반도에는 평양성이라고 날조한 장소에서 떨어진 곳에 고려 제왕의 궁궐이 있다 보니까, 천도 사실을 감추고 고려시대 내내 태조 왕건의 고향 개성을 도읍으로 삼았다고 날조한 것이다. 고려는 신라 땅에서 건국해 대진국 고토를 회복한 나라이다. 대진국의 평양성을 회복한 후, 당연히 우리나라 제1 황성인 평양성으로 천도했다.

개성이 왕건의 고향 이었는지도 심히 의심 스럽다. 왕건은 패서세력을 기반으로 고려를 건국했다. 후삼국의 경쟁은 신라 땅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패서지방 이라고는 하지만, 패수 하류만을 가리킨다. 문제는 패서와 개성[Asia 1808에는 개성이 합비 내지 신양(信陽)으로 표시되어 있다]의 거리가 너무 멀다는 사실이다. 왕건이 개성을 기반으로 일어났으면, 패동은 될지언정, 패서는 될 수 없다. 왕건의 부친(隆)은 금성태수(金城太守)니까, 왕건은 개성세력이 아니라 패서세력을 기반으로 고려를 건국한 것이 확실하다. 개성에서 태어나서 금성태수로 임명된 부친을 따라와 김성(武漢)에서 성장했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나, 개성이 개경이라고 날조하기 위해 왕건의 고향이라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

개성의 궁궐터에서 봉황무늬가 새겨진 기와막새가 출토되었다. 한반도(혹은 동북아)를 다스리던 제왕은 고려의 황족 이었던 것이다. 고려 황족은 몽한에 볼모로 갔다고? 고려를 침략하지도 못한 몽고가 무슨 수로 고려의 황족을 줄줄이 끌고 간단 말인가.

왜구가 강탈해간 고려 불화 미륵하생경변상도(彌勒下生經變相圖) 및 관경변상서품도(觀經變相序品圖)에는 한반도의 고려제왕이 살던 궁궐이 그려져 있다. 옛날에는 사진이 없었으니까, 고려인이라도 중국 대륙의 장안성 근처에 살지 않으면 고려 황제가 사는 궁궐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한반도에 있는 장인이 만든 미륵하생경변상도, 관경변상서품도에는 한반도에 있던 고려 제왕의 궁궐을 그려 넣은 것이다.

고려의 궁궐은 고려 말 홍건적의 침입으로 불탄 이후 다시는 제 모습을 찾지 못했다고? 참 편리도 하네. 대진국의 장안성도 불탔다고 하더니, 우리나라는 궁궐도, 역사책도 모조리 불타는군. 아무 것도 불탄 게 없다. 대진국의 황성도, 고려의 황성도, 대진국의 역사책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날조 고려사에는 강화 천도 당시, 개경의 호수가 10 만 이라고 했다. 개경은 장안성이다. 그런데 겨우 10 만? 개경에는 외국 사절과 상인들이 묵는 객관도 궁궐만한 것이 10 개라고 했다. 그런 곳에 고작 10 만호만 산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남북국 시대 신라의 수도 계림(계림)에도 17 만 8 천 9 백 36 호가 살았다고 했다. 그나마 계림에는 신라 귀족과 부유층만 모여 살았다. “47 대 헌강왕 때 성 중에 초가집이 없었고 처마가 서로 맞붙고 담장이 서로 이어져 있었다(금지민간 복옥이와 부이모 취반이탄 부이신 삼국사기).”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통일왕조이자 동아시아의 지배자로 군림한 고려의 개경에는 몇 가구가 살아야 하는가. 6 세기 초 백제의 인구는 4600 만 명이었다. 고구려와 신라도 있다. 고려의 인구는 2 억을 상회했을 것이다.

일본의 쇼유키(소우기)를 보면, 1019 년에 벌써 우리나라 에서는 대포를 장착한 전함을 만들어 실전에 배치하고 있었다. 화약과 전함의 개발은 너무도 중요한 사건이라 절대 고려가 누락시켰을 리가 없다. 화약을 발명하고, 화전(火箭), 화구(火毬), 질려포(翐藜砲), 비화창(飛火槍)을 개발했다는 송이 전쟁만 했다 하면, 여지없이 박살이 났다. 요한, 서하, 금한을 거쳐 결국 몽고에게 망했다. 화약은 송이 발명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가 발명했다.

화약은 장식품으로 발명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왜도 위협했던 것 아닌가. 고려는 무력에 있어서도 강력한 나라였고, 이런 나라이니 만큼 실지 회복에 나선 것은 당연하다. 고려가 흑룡강 유역 혹은 그 너머에서 관측한 일식기록이 일본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다.

인당(印璫) 최영(崔瑩) 등 여러 장수들을 보내사 압록강 이서의 8 참(八站)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인당최영등제장공압록강이서팔참파지 태백일사)

여기서도 ‘압록강 이서’라고 했다. 강동육주가 방위와는 상관없는 명칭이라는데, 그렇다면 강의 이서, 이동, 강의 이남, 이북도 바꾸어 말한단 말인가. 동쪽하면, 서쪽으로 알아듣고, 북쪽하면 남쪽으로 알아 들었단 말인가. 고려 때는 동쪽이 남쪽이었고, 북쪽이 서쪽이었던가.

강동6주는 서압록강(嘉陵江)에 위치했다. 그래서 강의 동쪽 6주가 된 것이다. 태조 왕건이 서경을 중시하라 유시하고, 4 대 광종이 서압록강 밖의 예맥족을 시달목분지로 내쫓았는데, 6 대 성종 때 어떻게 거란이 고려 영토인 서압록강 이동을 줄 수 있는가.

강동 6주를 설치한 것은 성종이 아니라 태조이다. 지금의 압록강에서 어떻게 강동 6주를 확보하는가. 수도 없이 고려사를 날조 하면서도 이씨조선은 강동 6주를 미처 강남 6주로 고치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서압록강이 사라진 것은 대대적인 고려사 날조가 끝나고 한참 후인 숙종 때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역사축소는 이씨조선 내내 계속됐지만, 남북으로 흐르는 서압록강이 사라졌으니 강동 6주를 고쳐야 한다는 것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역사날조가 얼마나 어려운 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 수월관음도 일본에 있는 수월관음도는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알려져있다

우리나라 영토를 한반도로 축소시키기 위해 생여진을 종이 위에서 신라 말, 고려 초에 남하시키고 숙여진을 시달목분지에서 동쪽으로 끌고 왔다. 고려 말, 이씨조선 초라고 하지 않은 것은 물론 예맥족이 책임을 면하기 위해서다. 숙여진(만주족)의 나라 금한을 생여진이 세운 나라라 날조한 것은 후대의 일이다. 생여진은 이씨조선에 조공하고 있었다고 고려사와 이씨조선실록에 실려 있다. 생여진도 이씨조선의 억압 및 차별, 멸시에 분연히 봉기해서 명을 정복하고 청을 세웠던가.

고려의 수도가 한반도 개성이라면, 흑룡강 상류의 생여진을 정복한 고려는 절대 동북구성을 둘 수 없다. 북구성을 설치해야 한다. 고려는 만주에서도, 흑룡강에서도 일식관측한 나라다. 이씨조선도 1599 년 까지 만주에서 일식관측한 것이 일본 역사책에 남아 있다.

동북구성은 반드시 고려의 동북쪽에 위치해야 한다. 강동육주는 반드시 강의 동쪽에 위치해야 한다. 5 천년 천문강국이, 책력까지 중국에서 갖다 썼다고 날조 당하면서 방위라도 정확해야지, 그것마저 포기하면, 천문관측은 취미활동이었나.

고려의 영토는 여러 책에 나와 있다.

고려는 남쪽으로 요해(遼海)에 막혀 있고, 서쪽으로 요수에 접하고, 북쪽으로 거란의 옛 땅에 접하고, 동쪽으로는 금나라 그리고 일본, 유구, 탐라, 흑수, 모인(毛人) 등의 나라에 접해(距;떨어져) 있다[고려남격요해서 거요수북접글란구지동거대김우여일본유구탐라흑수모인등국 해동역사(열수 지리고 고려 강역총론)]

고려는 남쪽으로 요해에 막혀 있고, 서쪽으로 요수에 접하고, 북쪽으로 거란의 옛 땅에 접하고, 동쪽은 금나라와 맞닿아 있다. 또한 일본·유구·탐라·흑수·모인 등의 나라와 견아상제(犬牙相制) 모양으로 되어 있다(고려남격요해서거요수북접글란구지동거대김우여일본유구탐라흑수모인등국견아상제 고려도경)

고려도경이 원출처이다. 고려의 강역을 기술한 저 대목 역시 슬쩍 고친 날조기사이기 때문이다.

이 땅의 사학자들은 저 기사가 고구려 영토에 대한 기술이라고 단정한다. 왜냐하면, “고려가 신라를 계승 하였다고는 하지만 강토는 이미 압록강에서 밖으로 단 한 발자국도 나서지 못하는 땅이 되었으며, 북방과 더불어 스스로 관계를 가지지도 않았었다. 또한 요나라와 금나라의 기세가 국경을 위세로 억누르니, 구구하게 압록강 이남의 수천 리 땅으로 다시금 웅혼하고도 거대했던 나라와 비교될 수가 없었기에, 백성의 기세가 저절로 쇠미해짐이 옛날보다 심하게 되었다(고려기승라후 이강토부출압수이외일보지지 자여북방무섭 차료김지세 위압경상 구구압수이남수천리지 갱비웅방거국지비 칙민기지쇠미자유심어고자의 규원사화)."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라면, 금한이 있을 리 없다. 금한은 1115 년에 세워진 나라다. 고구려는 동북아를 상실했다. 고려도경은 고려에 대해 기술한 책이었던 것이다.

우선 고려의 영토가 “일본·유구·탐라·흑수·모인 등의 나라와 견아상제(犬牙相制) 모양으로 되어 있(일본유구탐라흑수모인등국견아상제)”으려면, 반드시 중국 대륙과 한반도 이북에 땅을 갖고 있어야만 한다. 한반도 뿐인데, 어떻게 일본·유구·탐라·흑수·모인 등의 나라와 견아상제(개 이빨 형상)가 되겠는가.

요수는 오늘날의 요녕성에 있는 요수가 아니다. 가릉강을 말한다. 이씨조선 초에도 요수는 상건하였다. 그리고 요서도 고려 땅이다.

고려는 “남쪽으로 요해에 막혀 있다(고려남격요해)”에서 요해는 발해만이다. 고려의 영토가 한반도고 요해가 남해라면, 황해, 동해로는 안막혔는가. 요해가 황해, 동해가 아님은 “고려는 ‘남쪽’은 요해(遼海)로 막”혀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고지도를 고쳐서 지명을 밀어낸 중국 고지도에는 한반도를 아예 생략했다.


1824 년에 요수로 돌변한 현 요수는 요한(916~1125)하고 전혀 관계가 없다. 우선 청이 날조한 지리도에는 요한 때의 요수가 난하(灤河)라고 표시되어 있다. 794 년 에서 1183 년 까지 흑룡강 이북에서, 1343 년에서 1599 년 까지 만주에서 관측한 우리나라 일식을 일본이 베꼈다. 물론 요한은 발해만을 차지해본 적도 없다. 요한이 차지한 대진국의 동북아 영토는 대흥안령산맥 이북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발해는 국명이 아니다. 대진국이다. 따라서 대진국의 바다라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라면, 대진해라고 불렀을 것이다. 오늘날의 오오츠크해가 대진해로 추정된다. 시베리아가 대진국의 영토였기 때문이다.

삼성기전 상편에서도 발해만을 요해라 했다. “위만이 몰래 서쪽 변방 한 모퉁이에 살았는데, 번한의 준이 그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바다에 들어가 망하였다. 이로부터 삼한의 무리는 거의 한수의 남쪽으로 옮겨갔으나 한때에는 여러 영웅들이 요해의 동쪽에서 군대를 일으켰다(위만절거서비일우번한준위전불적입해이망자차삼한소솔지중태천민어한수지남일시군웅경병어요해지동).”

이씨조선의 시각에서 우리나라 강역을 한반도와 그 이북으로 축소한 날조기사다. 그래서 고작 우리나라 영웅들이 발해만 동쪽에서 군대를 일으켰던 것이다. 안함로의 삼성기전은 실사에 날조사[“병진년, 주나라 고왕 때(병진주고시)” 이후)를 덧붙인 글이다. 축소시킨 강역으로 보건데, 요해를 발해만으로 바꿔 부른 것은 이씨조선이 발해만을 상실한 18 세기 쯤일 것이다.

거란의 옛 땅이래야 중앙아시아고, 캐시미르를 통해 들어온 티벳고원 북부의 서쪽이다. 티벳고원으로 들어와 있다가 나라를 세워 티벳고원 북부를 일부(송)만 남기고 다 차지했다. 중요한 것은 대진국 까지 멸망 시켰다는 사실이다 고려도경을 쓴 시점에서는 거란은 고려에 의해 3 차례나 격파되어 중토 내로 축소되었다. 그러나 고려는 대진국의 고토를 전부 회복 하지는 못했다. 무신정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무신이 정권을 잡았으니, 국방이 강화되겠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개인의 이익 외에는 관심이 없는 집단 이었다. 거란의 옛 땅이란 고려가 회복하지 못한 대진국 고토이다.

거란이 한 때 대진국을 멸망 시켰으나, 그것은 거란이 강해서가 아니고, 대진국이 내부분열로 한없이 나약해졌기 때문이다. 12 세기 이전부터 거란도 요한이라는 빈 껍데기만 남은 상태였다. 금한은 강성한 요한을 멸망시킨 것이 아니라, 고려의 침공으로 겨우 명맥만 남아 있는 요한을 멸망 시켰던 것이다.

“동쪽은 금나라와 맞닿아 있다(동거대금)”는 말은 명백한 왜곡으로 금한은 고려와 서쪽으로 맞닿았다. 시달목분지에 살던, 고려의 속민 숙여진은 고려의 허가를 구하고 중토로 들어가 금한을 세웠다. 그러므로 금한의 태산은 티벳고원 북부에 있었다. “동쪽으로는 금에 접해 있다.”고 날조한 이유는? 우리나라 강역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라고, 도저히 못 찾으면 날조 중노사를 순순히 받아들일 것이라고 판단한 때문이다.

유구(流球)는 류큐다. 지금의 오키나와(沖繩)로 일본과 대만 사이에 있는 섬이다.

탐라(耽羅)는 제주도가 아니다. 탐라가 제주도라면, 일본을 쓸 필요가 없다. 또 탐라가 제주도라고 한다면, 대마도도 써야 하지 않는가. 탐라는 대만이다. 하지만 탐라는 고려 영토였다. 고려도경 자체가 완전히 날조됐다.

삼국지는 3 세기의 동부여를 설명하면서 “남쪽 으로는 고구려와 동쪽은 읍루와 서쪽은 선비와 접하고 있다. 북쪽에는 약수가 있다(부여재장성지북거현토천리남여고구려동여읍루서여선비접북유약수방가이천리).”고 날조했다. 동천제가 242 년 서안평을 공략했다. 이 당시 서안평은 요서에 있지만, 날조 역사책에는 요동 이라고 나온다. 날조사에서 이 당시 고구려는 길림시 일대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동부여는 동북평원에 있었던 셈이다. 동북평원 북쪽에 약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삼국지가 우리나라 역사책을 분해해 쓴 책이라는 점에서 약수는 중토 북쪽에 있었다. 동북평원 북쪽에는 흑수가 있었던 것이다. 남쪽 고구려와 동쪽 읍루와 서쪽 선비와는 ‘접’한 반면, 북쪽의 약수는 접했다는 말이 없는 것은 날조 동부여 영토가 흑수와 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토도 약수와 상당한 거리로 떨어져 있었다.

대진국도 흑수말갈을 비롯한 대부분의 말갈 세력을 복속 시켰다. 그런데 동북아는 3, 4 세기 이후 백제 영토였고, 백제 영토는 대진국과 신라가 분할했다. 신라가 중국 대륙 동부에 있었으므로 동북아 남부는 신라, 북부는 대진국이 가질 수밖에 없다. 몽고고원이 중국 대륙 동부를 가진 신라의 영토라면, 대진국은 동북아로 줄어든 백제 땅을 한 줌도 차지할 수 없을 뿐더러, 시베리아에서 일식관측할 수도 없다.

영토도 자연지형을 기준으로 나눈다는 점에서 대흥안령산맥 이남은 신라, 이북은 대진국의 땅이다. 일본이 베낀 710 년에서 792 년 사이의 일식기록을 보면, 몽고고원 이북에서 흑룡강 상류가 빠지고, 흑룡강, 중, 하류 유역 너머(스타노보이산맥)가 일식관측지로 나온다. 흑룡강 중, 하류는 신라 영토지만, 중, 하류 저편은 대진국 영토다.

고려사에는 “여진의 강역은 서쪽으로 우리나라와 경계를 접해 있기 때문에 일찍이 거란과 우리나라를 섬겨 몇 번 와서 조회했다.”고 했다. 저 글만으로는 서여진인지 동여진인지 애매하다. 고려의 서쪽인지, 여진의 서쪽인지 적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여진은 고려의 수도 지척에서 거주하는 탓에 수시로 와서 조회 해야지, 몇 번만 조회할 수가 없다.

흑수여진은 거란과 고려를 동시에 섬긴 것이 아니라, 거란과 영토를 접했을 때는 거란을, 고려와 영토를 접했을 때는 고려를 섬겼다. 대진국이 거란한테 멸망하고 나서 거란이 차지한 대진국의 영토를 고려가 탈환했다.

대진국은 시베리아에서 일식관측했다. 국경지대에서 천문관측하는 나라는 없다. 신라와 고려가 흑룡강 중, 하류에서 천문관측 했다는 것은 흑룡강 중, 하류 너머도 우리나라 영토라는 의미다. 고구려가 흑룡강 상류에서 일식관측한 시기는 2, 3 세기 까지이고, 이 당시는 생여진이 흑수로 이주하기 전이다.

생여진이 신라가 아니라 대진국에 복속했고, 흑룡강 상류가 대진국 일식관측지(일본이 베낀 710 년 에서 792 년 까지)에서 빠졌고, 이후에도 흑룡강, 중, 하류에서 일식관측(일본이 베낀 794 년 에서 1183 년 까지)했다는 사실에서 흑수여진이 거주 했다는 흑수는 흑룡강 전체가 아니라 흑룡강 상류만을 가리킨다. 그러나 흑수가 내내 우리나라 국경선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동쪽은 창해, 서쪽은 요서, 남쪽은 남해, 북쪽은 서비로에 이르렀다(단기고사)

2 세 단군 부루 당시의 국경이라고 하나, 신인왕검 당시의 국경일 가능성이 높다고 전술했다. 여기서 문제는 그것이 아니고, 서비로가 시베리아라는 설이다. 일본이 베낀 710 년 에서 792 년 까지 대진국의 일식관측지가 시베리아인 걸로 보아, 한때 시베리아가 우리나라 영토였던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그때가 언제냐는 것이다. 고구려의 일식도 흑룡강 상류에서 관측했다. 흑룡강 상류 너머가 우리나라 땅이니까, 그곳에서 천문관측할 수 있었다. 고구려 이전부터 우리나라 영토는 시베리아를 일부 혹은 전부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시베리아를 일부만 차지 했다면, 서비로가 아니라, 남서비로라고 하지 않았을까.

대저 구한(九桓)의 족속은 나뉘어 5 종이 되고 피부의 색깔과 모양을 가지고 구별을 짓게 되었다. 그 풍속은 모두다 실제에 임하여 이치를 찾고 일을 계획하여 그것이 옳음을 구함이 같았다. ...... 백부의 사람(白部之人)은 피부는 밝고 뺨은 높고 코도 크며 머리털은 회색이다(개구환지족분위오종이피부색모위별야개기속취실구리책사이구기시칙동야......백부지인피부석협고비융발여회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

백부인에 대한 설명은 백인종을 가리킨다. 오늘날 시베리아는 백인종과 혼혈이 많이 이루어 졌지만, 고시베리아인은 황인종 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고고학 ·언어학 등에 의하면 슬라브족의 조상은 고대에 아시아로 부터 이동하여 3 세기 까지 적어도 1000 년 이상 카르파티아산맥(Muntii Carpati) 북방의 비스톨라강 유역에서 드네프르(Dnepr)江 유역에 걸치는 지방에서 살고 있었다고도 한다. 타림분지(塔里木盆地)에 사는 백인은 7 세기 이후 이주한 아랍인이다. 서투르키스탄(Turkestan) 북부의 철도 연변에는 슬라브족이 살고 있다. 이주민일 것이다. 어쨌거나 저 기사는 조선의 강역 어딘가에 백인이 살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조선의 강역이 서남아시아에 이르렀다면, 후대에 강역이 축소 되었다는 뜻이다. 바이칼호 일대는 우리민족이 살았으므로 백인은 북시베리아에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에서 북부여로 또 다시 고구려로 이어지는데 무력 사용은 없었다. 시베리아를 상실할 이유가 없다. 고구려의 일식관측지가 흑룡강 상류이다. 시베리아는 고구려 영토였던 것이다.

시달목분지에 눌러앉은 숙여진과 마찬가지로 흑수여진도 우리나라 영토 내에 주저 앉았다. 유일한 선택이었다. 신석기인처럼 떠돌며 살았던 전투력이 없던 흑수여진 으로서는 우리나라 영토 바깥으로 나가 남의 나라 영토를 확보할 수가 없었으니까. 흑룡강 상류에 눌러앉은 흑수여진을 내버려둔 것은 이 시기에 고구려가 동북아 북부를 상실 했거나 흑수여진도 백제의 침공을 방어하는데 활용할 수 있으리라 판단한 때문이다.

고려도경은 책 전반에 걸쳐 날조된 책이다. 고려의 강역에 대한 기술조차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고려가 요수에 접했다는 것이나 금한이 고려의 동쪽에 있다는 것도 거짓말이다. 그러나 고려 이전에 흑수 이북을 상실했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도경은 원래 고려인이 쓴 책을 뜯어 고쳤기 때문이다. 시베리아를 상실한 시기는 대진국이 멸망했을 때다.

대진국 영토가 거란에게 넘어 갔지만, 시베리아는 거란의 지배에서 독립했던 것이다. 하지만 일식기록상 흑룡강 중류 이북은 여전히 고려 영토다. 거란이 차지한 대진국의 고토를 찾겠다는 것이 고려의 북벌정책 이니까, 시베리아 회복도 포함 되었지만, 무신정변이 일어난 후에는 북벌정책도 폐기 되었다. 무신정권은 개인적 이익 외에는 몽고가 취한 고려 땅을 탈환할 의지도, 고토 회복 의지도 없었다. 고려가 시베리아를 탈환하지 못했으니, “고려는 북쪽으로 거란의 옛 땅에 접한다(북접글란).”

고려도경을 고려인이 썼다는 점에서 원문은 이렇다.

고려는 북쪽으로 대진국의 옛 땅에 접한다.

모인은 홋가이도(北海道)가 아니다. 왜냐하면 일본[일본은 메이지(明治) 때 홋가이도를 정복했다]의 바로 지척에 있기 때문에 굳이 연달아 밝힐 필요가 없다. 사할린(サハリン) 섬이다. 日本이 베낀 794 년에서 1184 년 까지의 우리나라 일식의 최적관측지가 사할린의 맞은편이다.

일본, 유구, 탐라, 흑수, 모인이 섬이나 강이라서 고려와의 사이에 바다 내지 물이 끼어 있었기 때문에 떨어질 거(距)를 사용했던 것이다. 고려도경의 글이 사실이면, 고려 영토는 스타노보이(Stanovoy) 산맥 까지이다.

1421 년 아메리카를 발견한 정화(鄭和, 1371~1435)함대는 명이 아니라, 고려의 함대이다(후대의 이씨조선의 태종조와 세종조에 해당된다). 아무리 우리나라로 기어들어 왔다고 해도 명은 역법조차 만들지 못해 수시력을 베껴서 대통력이라 한 나라다. 명, 청과 이씨조선으로 분할된 이후 한문명은 퇴보를 거듭했다. 한문명은 고려에 이르러 절정을 맞이했다. 고려는 세계 최고의 조선술과 항해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1421 년은 신라가 동중국해를 건너 한반도를 침공한 지도 천년이 넘었을 때다.

그러나 시베리아를 상실한 고려 때 이르러 아메리카 탐험을 나섰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정말 고려는 “흑수·모인 등의 나라와 견아상제 모양으로 되어 있”(고려도경)었을까. 사할린 너머의 땅을 차지하지 못했을까. 고려의 영토가 추코트반도(Chukot Pen)에 이르러야 영토 끝에 서서 베링해를 바라보며 그 너머의 대륙에 관심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

중국은 고구려도 고려라 부르기도 했다면서 고려도경 속에 고구려에 대한 기술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선 고려도경은 송인이 아니라, 고려인이 쓴 책이다. 날조 하면서도 고구려와 고려를 명확히 구분하고 있다. 그래서 고려도경 1 권에서 “고려의 선조국 고구려를 한나라의 현토군으로 예속시켰다.”라고 날조 한사군을 더욱 발전시켰다.

을유 2 년(B.C. 1236) 남국(藍國)의 임금 금달(今達)이 청구의 임금, 구려(句麗)의 임금과 주개(周愷)에서 회합하고 몽고리(蒙古里)의 병력을 합쳐 가는 곳마다 은(殷)나라의 성책을 부수고 깊숙이 오지로 들어가 회대의 땅을 평정 하였다(을유이년남국군금달여청구군구려군회우주개합몽고리지병소도파은성책심입오지정회대지지 단군세기)
부소(夫蘇)와 부우(夫虞) 및 작은 아들인 부여(夫餘)는 모두 나라의 서쪽 땅에 봉하니, 구려(句麗)와 진번(眞番) 및 부여 등의 여러 나라가 바로 그것이다(부소부우급소자부여개봉우국서지지구려진번부여제국시야)부여후(夫餘侯)가 설유(稧兪) 때문에 어려움을 치르자 웅가(熊加)와 구려후(句麗侯) 및 진번후(眞番侯) 등이 도와서 이를 평정하였다(부여후유계유지난웅가여구려진번후조평지)
구려후(句麗侯)인 우타(于佗)가 들어와서 용가(龍加)가 되었다(구려후우타입위룡가)(이상은 규원사화 단군기)

구려와 구분하기 위해 고자를 붙였던 것이다. 고려라고 부르는 것은 결국 ‘여’라는 소리니까, 중토의 소국이 고려라고 부를 수는 없다. 고구려를 고려라 부른 것은 백제다. 더 심하면 여적(麗賊)이라 불렀던 것이다.

국명이 비슷해서 중노가 착각해? 중국에는 아예 똑같은 이름을 가진 나라 천지다. 연만해도, 북연, 후연, 전연, 남연에 서연이 있고, 여기에 원연(原燕)이 붙는다. 원연은 춘추전국 시대의 연이다. 연뿐이 아니다. 누군가 이름 짓는 노력을 무척 아끼느라 위, 제, 주, 진 등 모두 방위와 전, 후를 붙였다. 후한도 셋이나 된다.

왕망의 신나라 이후에 세운 후한 말고도 304~ 329 년까지 존속한 후한과 947~ 950 년까지 존속한 후한도 있다. 중노도 창피한지 유방의 한나라를 전한, 후한에서 이제는 서한, 동한이라 고쳐 부른다. 그래도 역사책은 전한서, 후한서다. 남한, 북한 까지 있다.

춘추전국 시대는 나라가 백 개나 난립했던 터라 엄청 골치가 아팠던지 모조리 외자 국명을 붙였다. 하지만 정복민들이 중토의 나라, 그것도 춘추전국 시대의 소국들의 이름을 따르길 원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전혀 없다. 춘추전국 시대의 소국처럼 고작 중토 한 줌을 차지하고 싶지는 않았을 테니까, 극구 피해갔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북연, 후연, 서연, 전연, 남연, 북위, 동위, 서위...... 했을 가능성은 전무하다. 거란, 예맥, 몽고만 해도, 요한, 금한, 몽한이라 했다. 단, 청은 가짜 문명대국 중노가 되고자 기를 쓴 나라다. 3 백년 사이에 금한에서 청이 되길 원했던 것이다.

번한 만을 조선으로 알고 있다고? “한국의 마한 땅이 적당할 것 같아 마한의 동쪽을 나누어 같이 살았으며 말은 진나라와 비슷하여 그런 이유로 나라 이름을 진한 이라고 하였다(적한국이마한할동계지이여지 상호위도 유사진어 고혹명지위진한 후한서)." “신라국은 본래 변한의 후예다(신라국본변한지묘예야 구당서)." 비록 번한을 변한이라 썼지만, 그것은 제대로 부르기 싫어서 한 소리고 진한, 번한, 마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후한서와 삼국지에서는 “마한 사람들은 잠상을 알며 솜과 베를 만든다(마한인지전잠작요포).”고 했다. 신라는 3 차 진한의 후예이다.

포정박(鮑廷博, 1728~1814)은 고려도경을 날조 하면서 이런 말은 남겨두었다.

북송(北宋)의 사신들이 고려에 입성하여 조서를 받을 때는 용호군(龍虎軍: 친위병) 수만 명이 갑옷을 입고 길 양쪽으로 행진한다.

북송(?)의 사신을 영접한 것이 아니고, 송나라 사신이 고려에 왔을 때, 길 양옆으로 병사들이 끝없이 행군하는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미쳤다고 동아시아라는 광대한 영토를 가진 고려가 손바닥만한 송의 사신을 수만 명을 동원해 사열케 할 것인가. 조서를 받는 주체도 북송의 사신이다. 사열도 아니고, 길 양쪽으로 행군한다고 했다.

설령 북송(?) 사신이 조서를 받는 장소에 고려 황제의 대규모 친위부대가 도열해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고려 황제의 권위를 과시하고 미개 송인을 위압하기 위해서지, 송을 대우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런데 포정박은 송나라 사신을 대우해 주느라 사열 이라도 해준 것으로 착각하고 남겨 놓았던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대목은 고려 수도에서 수만 명이 한꺼번에 행군을 하더라는 것이다. 한 번에 수만 명이나 행군할 정도면, 고려 황제의 친위병이 수십 만 명은 족히 됐다는 것이다. 백제와 고구려는 국가의 명운을 걸고 싸우느라 백만대군을 육성 했지만, 고려에게는 대적하는 나라가 없었다. 그러나 고려의 영토는 티벳고원 북부의 중토만 제외하고, 동아시아 전체로 광대했다. 거대한 영토를 수비하는 병력이 없으면 소국조차 침범하기 마련이다. 또한 인구도 삼국시대보다 훨씬 증가했을 테니까, 2 백만 이라고 해봐야 총인구 대비 1 % 에 해당한다. 결국 고려는 백만 대군 내지 2 백만 대군을 실제로 보유했다.

후백제 이후로 적다운 적이 없었던 고려는 대군을 해산하지 않고 주변 속국들을 위압하는 수단으로 적극 활용했다. 이를 테면 고작 거란을 침공 하면서 80 만 대군이나 동원하고, 수도방위군을 수십 만이나 두고 고려 수도를 찾는 속국 사신이나 세계에서 몰려드는 상인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하는 것 등이다. 고구려나 백제는 중토의 날만 새면 사라지고 등장하는 나라들과 중국왜를 가리켜 한위노국이라 부른 오만과 자만심의 나라지만, 고려는 그런 면에 있어서 한술 더 뜬 나라였던 것이다.


고려도경에 있는 고려의 영토에 대한 또 다른 기술을 보자.

오직 신라와 백제가 스스로 그 국경을 견고히 하지 못하여 고려 사람들에게 합병되니, 지금의 나주도(羅州道)와 광주도(廣州道)가 이것이다. 그 나라는 경사(京師 : 송나라 수도 개봉)의 동북쪽에 있는데, 연산도(燕山島)로부터 육로로 가다가 요수(遼水)를 건너 동쪽으로 그 나라 국경에 이르기까지, 무릇 3790 리(1516 km)이다.

현 사학계는 광주도가 “경기 광주의 덕풍역을 중심으로 한 역도(驛道)”라고 한다. 그러면 전라남도 나주에 신라가 있었단 말인가. 백제와 신라가 도시국가란 말인가.

고려도경 역시 날조의 음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연산도로부터 육로로 가다가 요수를 건너 동쪽으로 그 나라 국경에 이르기까지”라는 대목만 보아도 확실하다. “고려사의 광종 10 년조에 ‘압록강 밖의 여진을 백두산 밖으로 몰아내어 살게 하였다(고려사광종십년축압록강외여진 어백두산외거지 규원사화)." 요서는 광종 10 년(958) 이전부터 우리나라 땅이다. 광종 10 년조, 압록강 밖의 여진을 백두산 밖으로 몰아내어 살게 하였다는 기록은 요서에 살게 내버려둔 여진족을 시달목분지로 옮기고, 요서에는 고려인들만 살게 했다는 뜻이다. 요서도 고려 영토라서 태조 왕건이 서경(현 중경)을 중시하라고 했다. 연산도조차 고려의 영토였던 것이다. 연산도는 섬이 아니고, 행정구역명이다. 도를 음이 같은 도로 바꿔치기 했을 뿐이다. 백제성에서 백제성으로, 황하를 황수로 바꾸었듯이.

고려의 수도 개경은 송 수도 개봉의 동북쪽에 있다고 했다. “연산도로부터 육로로 가다가 요수를 건넌다”고 했으므로 연산도 이전에 수로(수로 강물)를 건넜다는 뜻이다.

라사(拉薩)에서 장안은 북동쪽에 있으면서 3790 리(1516 km)쯤 떨어져 있다. 개봉이 노강 이북에 있었다면, 개경에서 동쪽에 위치한다. 라사가 송의 수도 개봉 이었다(물론 당의 장안이기도 했다). 개봉에 있다가, 중토 서쪽에서 금한이 영토를 확장하자, 송은 수도까지 빼앗기고, 영토가 더욱 축소 되었다. 요서는 고려 영토니까, 송은 티벳고원 북부 동쪽에 간신히 붙어 있었던 것이다.

원래부터 송은 티벳고원 북부 동쪽에 있었고, 더욱 축소되어 티벳고원 북부 대부분을 금한이 차지했다. 북송도 없었고, 남송도 없었다.

고려의 행정구역도 알 수 있는데, 신라가 있던 양자강 하류에 나주도, 백제가 있던 양자강 중류 이남에 광주도가 있었다.

1388 년(강능제 14) 5 월, 明의 전진기지로 변한 요동정벌에 나섰다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했다. 이 땅의 사학자들은 현 압록강 하류에 있는 섬이 위화도라고 우긴다. 그러나 위화도는 절대 섬이 아니다. 위화도를 위화도로 고친 것이다.

출정하는 군대가 뭐 하러 섬에 들어간단 말인가. 이성계에게 대규모 육군을 섬으로 이동시킬 수단이 있었단 말인가. 헤엄쳐서 갔는가. 회군을 결심 했으면, 진격로상에 그냥 주저 앉으면 된다. 실제로 그렇게 했다. 위화도는 가릉강 근처에 있던 행정구역 이었던 것이다. 이성계는 압록강(가릉강)을 건너 태천(부강)에서 회군했다. 위화도는 부강까지 포함하는 압록강 이서의 행정구역이다.

강화도 역시 행정구역명이다. 도자만 도에서 도로 고쳐 한반도의 섬이라 우긴 것이다. 한반도의 섬 강화도는 도저히 39 년간이나 외부와 고립한 채 항쟁을 할 수 있을 만한 크기가 아니다. 우선 수만의 장병이 주둔하자면, 그만한 주둔지가 있어야 하고 군량미(軍糧米)를 거둘 농경지가 있어야 한다. 군대가 사용할 무기와 훈련장...... 더구나 강화도에는 정부와 군대만이 아니라 개경 주민들까지 이주했다고 날조했다.

그래서 해결책으로 고려의 백성들이 강화도에 이중으로 세금을 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당시 세금이란 쌀 등의 현물일 텐데, 강화도에 주둔한 수만의 장병을 먹이고 무기를 만들 금속을 배로 운반 하자면, 이 또한 장난이 아니다. 군수품도 수송할 수 있는데, 고려를 정복하려는 몽고군이 과연 40 년간 진입하지 못할 것인가. 날조사에는 몽고도 해전까지 수행했다.

차라대(車羅大)가 일찍이 수군 70 척에 깃발을 줄지어 세우고 압해도(押海島)를 치려고 윤춘(尹椿)과 한 관인을 시켜 배를 타고 독전케 했다. ...... “우리 배가 대포를 맞으면 반드시 가루가 될 것이니, 당할 수 없다”하고, 다시 배를 옮겨 치게 했으나 압해인(押海人)들이 곳곳에 대포를 배치했기 때문에 몽고인들이 드디어 수공의 장비를 모두 파(破)하고 말았다(고려사절요)

몽고인은 안전한 곳에 있고, 고려인 보고 독전케 했다는 것에 주목하자. 몽고의 실상이다. 압해도는 섬이 아니다. 도를 도로 고치면 행정구역을 간단히 섬으로 날조할 수가 있다. “압해인들이 곳곳에 대포를 배치했다.”고 했다. 고려의 군대가 아니라, 압해도의 주민이라는 것이다. 이 당시 고려군은 사병화되어 권력투쟁에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몽한 으로서는 거저 얻은 고려 땅에 동녕부, 쌍성총관부 등을 설치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몽한간섭기에 강화도에는 개경에도 뒤지지 않은 만큼 번듯한 관료들의 저택이 즐비했다? 그러면서 한반도의 강화도에는 동헌과 이방청(吏方廳) 건물만 남아 있다고 한다. 지상건물은 사라져도 황궁터, 관료들의 집터는 남아 있어야 한다. 하물며 황룡사도, 구층탑도, 안압지(안압지)도, 불국사도 매몰된 땅에서 유적을 찾아 복원 했다면서 어째서 강화도만 텅 비어 있단 말인가.

고려사절요에는 이 당시(고종 44 년 9 월), 강화 등에서 수확한 농산물에 대한 기록이 있다.

강화의 공공전답에서 쌀 2,000 섬, 조 3,000 섬을 수확했다. 똑같이 최의(崔竩)의 집에서 수확했다(강화전이천결속공속삼천결속최의가 고려사절요)

공공전답에서 5 천섬, 최의(崔竩) 집에서 5 천 섬 해서 합계 1 만 섬을 수확했다. 4,000 만평의 농지가 있어야만 1 만 섬을 수확할 수 있다고 한다(☞ 강화도와 팔만대장경 참조). 그 외 군소 농장도 다수 있었을 것이다.

섬에 황실 농장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땅의 사학자들은 몽고가 해전에 약하다고 강화도로 천도 했다고 한다. 강화도가 섬이 아니므로 고려는 천도하지 않았다. 고려가 강화도로 천도 했다면 그 틈에 몽한이 개경과 황하 이남을 차지해 버렸다. 무신정권의 사병 삼별초가 강화도로 이동한 기사를 천도 했다고 날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