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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8. 22. 02:02자랑스런 선조

임주.임향.임사홍.사명대사.문과148명
김진우의 족보이야기-(45)풍천임씨(豊川任氏)
2010년 06월 01일 (화) 14:34:13 김진우 sewoora@naver.com

  

   
뿌리공원에 조성된 풍천임씨 조형물 .전면/대전 중구

          작품명

  • 비상(飛翔)

  • 조각가

    임 선 빈 (전 대전조각가협회장)

  • 작품설명

    조각품의 왼편기둥에 배치된 네 개의 구슬은 백파(伯派)의 4형제분, 오른편 기둥의 두 개의 구슬은 중파(中派)의 형제분을 상징하고 기단부가 원형으로 된 것은 백, 중(伯, 中) 양파(兩派) 6종 형제분 후손의단합을 염원함이며 상단부의 봉황은 우리풍천임씨 문중의 진취적 기상을 나타낸 것임. 

   
뿌리공원에 조성된 풍천임씨 조형물.후면/대전 중구

<뿌리공원 조형물에 새겨진 풍천임씨 유래>

우리 풍천임씨의 시조는 은자광록대부 휘 온(溫)이시고 2세는 휘 가규(可珪) 3세는 휘 비 4세는 휘 도(徒)이시며 검교대장군을 지내셨고 5세는 휘 천유(天裕)이시니 찬화공신으로 풍해군에 봉작(封爵)되셨으며, 6세는 휘 주(澍)이신데 고려 충렬왕 9년(서기1283)에 경상도 안찰사, 어사대부, 감문위대장군을 두루 거쳐 풍천을 관향으로 하사 받으시니 풍천은 황해도에 있는 옛 고을 이름으로 서하(西河)라고도 한다.


어사공께서는 슬하에 두분의 아드님을 두시었는데 장자의 휘는 자송(子松) 호는 허재(虛齋)이시니 충숙왕 11년(서기1324) 익찬공신의 호를 받으시고 충숙왕14년 (서기1327) 일등공신으로 서하군에 봉군되셨으며 충숙왕 복위8년(서기1339) 조적의 난 때 왕을 호종하여 충혜왕3년 (서기1342) 일등공신으로 서하부원군에 진봉되셨고 차자 휘 자순(子順)은 호 화재(和齋)이시며 통헌대부로 개성부사,민부전서를 지내셨다.


부원군께서는 네 분. 전서공께서는 두분의 아드님을 두시어 여섯분 종형제의 후손이 번창하여 고려와 조선의 양조에 걸치어 사회 각 분야에서 뛰어난 인재가 끊이지 않았고 조선시대에 144분(148 ?)이나 대과(문과)에 급제하시어 나라에 큰 공훈을 세우셨다. 이와 같이 가문을 빛내신 자랑스런 조상의 덕업을 기리고 받들면 서 효도하고 공경하는 아름다운 전통을 계승해 닦으며 우리 문중(門中)의 화합 단결과 번영의 전기가 되기를 염원하면서 전국각지에 계신 종인들의 정성을 모아 여기에 이 유래비를 세운다.

1997년 8월 15일

25대손 상호 삼가짓고

28대손 선빈 삼가새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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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우작가의 해설>

                                                          <풍천임씨 현대인물>

 

임영기(풍천임씨중앙종친회회장.2009년).임효순(중앙종친회부회장).임형빈(2대종친회장).임영훈(육군중장예편.2008년중앙종친회장).임종모(대종회장.2008년).임용빈(중앙종친회부회장.2007년).임영재(뉴욕풍천임씨종친회장.2008년).임선준(문충공파회장).임영기(승지공파회장).임세빈(사윤공파회장.2007년).임상호.임선빈

 임충빈(육군참모총장(제39대).2008년~2009.9,2006~2008년육사교장.2004~2006년.1군단장.천안출생.한남대에서 명예교육학박사).임성호(육군소장.2009년 32사단장).임영우(논산시교육장).임관희(보령시종친회장).임좌순(전중앙선관위사무총장.2010년 아산시장후보).임세빈(2010년 보령시장후보).임대식(2010년보령시의원후보).

 사정공파(司正公派,임계생.묘소-경기도포천시 창수면 오가리 164번지) 임원진

 고문-임봉재.임상호.임광호,임문호(회장).임용재(부회장).임기재(부회장).임순재(총무).임홍재(감사).임정호(감사).이사-임문순.임재현.임훈재.임찬재.임덕순.임수호.임점호.임인재.임동빈-이상 2010년3월14일 선출.

 <사정공파> 가선대부종회 임원진(2010년3월14일선출)-임봉재(고문).임찬재(회장).임훈재(부회장).임점호(부회장).임철재(총무).임성재(감사).임영순(감사).

<이사>-임수호.임용재.임동재.임홍재.임흥순.임순재.임선순.임덕순.임재우.임해순.

<사정공파> 통덕랑계종회 임원진(2010년1월30일선출)

고문(임광호.임훈호).임수호(회장).임순재(부회장).임용재(총무).임문호(감사).임성재(감사).이사-임재우.임군재.임환호.임성호.임철재.임판호.임창재.임동재.

임상혁(정승공파대종회장).임두순(정승공파 총무).임관희(간사).임관희(보령시풍천임씨종친회장).임인식(사무국장).임창빈(총무) 등등

                                             <풍천임씨 역대인물>

임원준(任元濬) : 임자송의 5세손으로 조선 세종~성종 때의 총신이며 학자로 아들 임사홍이 중종반정에 연루 관작이 추탈됨
임사홍(任士洪): 임원준의 아들, 임광재가 예종의 사위,임숭재가 성종의 사위가 되면서 정권의 중심에 등장하여 권신 류자광 (柳子光)과 함께 조정의 기강을 어지럽히고 갑자사화를 일으키게 하여 중종반정 때 피살.
임희재(熙載) : 임숭재의 동생, 성종 때 직제학지냄.아버지,형과는 달리 연산군을 비방하여 갑자사화 때 화를 입었다.
임열(任說) : 임자송의 8세손, 명종 때 한성판윤(정2품).제학을 지냈다.
임유겸(任由謙) : 임자순의 7세손, 중종 때 한성판윤, 공조판서 역임.
임추(任樞) : 임유겸의 큰아들, 대사간, 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호조참판 지냄.
임권(任權) : 임유겸의 아들, 이조정랑, 예조참판을 거쳐 관찰사 및 병조 예조 판서를 역임한 뒤 좌참찬(의정부 정2품)지냄
임병(任柄) : 임유겸의 아들, 홍문관 박사 및 이조좌랑을 지냈으며 글씨에 탁월한 재질이 보였다.
임호신(任虎臣): 임추의 아들, 형조판서(정2품 법무장관)
임보신(任輔臣) : 형조참의(정3품)

임내신(任鼐臣) : 강원도 관찰사와 전주부윤.|
임탁(任鐸), 임현(任鉉) : 임몽신(夢臣)의 아들로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움.
임유후(任有後) : 임열의 후손, 현종 때 병조참판이며 명신으로 유명.
임한백(任翰伯) : 소현세자가 심양에 볼모로 갈 때 배종한 뒤 춘추관기사관으로 "효종실록" 편찬에 참여.
임홍망(任弘望) : 문장과 글씨가 탁월하고 경사에 정통,동지중추부사,기로소(耆老所: 정2품 이상의 관직을 지낸 70세 이상의 국가원로나 임금(태조.숙종.영조)이 들어감)에 들어감.
임방(任堕) : 대사성, 공조판서 지냄
임원숙(任元淑) : 평장사(정2품)
임원순(任元順) : 평장사.
임극충(任克忠) : 인종 때 문과에 급제한 후 한림학사를 거쳐 사공,중서시랑 평장사(정2품)
임극정(任克正) : 호부상서(정3품 장관)
임유(任濡): 금자광록대부로 문하시중 평장사를 거쳐 태자태사(정1품벼슬)
임원후(任元厚) : 인종의 비 공예왕후의 아버지
임경숙(任景肅) : 임유의 아들,고종 때 좌복야를 거쳐 평장사 지냄
임방부(任邦富) : 금자광록대부로 중서문하 평장사(정2품)
임방수(任邦壽) : 좌리공신에 책록되고 금자광록대부에 올라 태자태부(정1품)
임헌(任獻):가선대부(종2품 품계)로 예조참판,대사헌.
임희중(任稀重) : 경서와 문장이 뛰어났고 천문,지리 병법 등에 탁월 후진 양성에 전념
임백영(任百英),임계영(啓英),임희진(希進):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왜군(倭軍)에 대항
임발영(任發英) : 임진왜란 때 세운 공으로 호성공신에 녹훈.
임용재(任龍材) : 정조 때 유학의 종사로 동지중추부사 역임
임병관(任炳琯) : 일문의 삼절(三節, 충.효.열)로 세인의 칭송을 받음.
임병국(任炳國) :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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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씨(任氏)

 우리나라의 임씨(任氏)는 지난 2000년 인구조사때는 장흥임씨(24,523명).풍천임씨(99,986명).곡성임씨(시조-임영진,5,686명).과천임씨(636명).관산임씨(1,461명).광산임씨(1,421명).나주임씨(28,554명).대전임씨(296명).백천임씨(1명).보령임씨(557명).부천임씨(342명).서하임씨(12명).수원임씨(500명).순천임씨(707명).

아선임씨(70명).안동임씨(1,471명).진주임씨(1,578명).청풍임씨(416명).춘천임씨(271명).충내임씨(165명).파평임씨(657명).평택임씨(1명).풍산임씨(995명).함풍임씨(888명).해남임씨(488명).현도임씨(91명).홍천임씨(677명).회덕임씨(92명-시조 임수성-별장을 지냄) 등  29본관으로 조사되었으나 대부분 세거하는 지명이라고 하며 인구는 172,726명으로 조사되었다.

한편 장흥임씨(長興任氏)와 풍천임씨(豊川任氏)는 기록으로는 시조(始祖)를 다르게 받들고 있으나 대내적으로는 상호간에 같은 조상의 자손 이라며 사실상 결혼도 하지 않고 있다. 

 

                                                      풍천임씨(豊川任氏)

                           조선때 문과에 148명,정승 임향.사명대사 원불.원장 발견

천임씨(豊川任氏)의 시조 임온(任溫)은 문헌에 의하면 중국 소홍부 자계현 사람으로 고려 때 우리나라에 건너와 황해도 풍천에 살았다.

 시조 임온의 6세손 임주(任澍)가  서기 1283년(충렬왕9)에 경상도 추동 안찰사(按察使:1012년에 절도사가 혁파되고 안찰사를 설치함,고려 최고지방행정 구획인 5도의 장관)를 거쳐 어사대부(御史大夫:판사와 함께 어사대를 이끌던 초기의 사헌대를 어사대로 개편하면서 둔 정3품 벼슬로 1298년에 사헌부로 개칭하고 조선시대로 이어짐),

감문위 대장군(監門衛 大將軍:감문위는 궁성내외의 모든 문을 경비하는 군대로 938년에 설치됨 대장군은 종3품 무관 벼슬)을 지내고 이후에 풍천을 관향으로 하였다.풍천은 황해도에 있는 옛 고을 이름으로 서하(西河)라고도 한다.

 풍천임씨(豊川任氏)는 임 주(任澍)의 아들대에서 충숙왕 때 삼사판사(三司判事:삼사의 으뜸벼슬) 임자송(任子松)과 민부전서(民部典書:정3품 벼슬로 장관) 임자순(任子順) 대에서 백파와 중파로 나뉘면서 고루인물을 배출 번성하게 된다.

임자송(任子松,?~?,고려때의 문신)

임자송의 본관은 풍천(豊 )으로 서기 1319년 복국장공주(濮)의 죽음을 알리러 원나라에 다녀왔다. 서기 1321년 밀직사동지사(), 1324년 익찬공신()의 호를 받고 첨의평리(理:첨의부의 종2품 벼슬)가 되었다.

1327년 1등공신으로 서하군(西)에 책록되었으며 1330년(지순(至順) 경오년.충숙왕 17)봄에 원나라에 가 있던 세자 정(:충혜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원나라 객성부사(使) 칠십견()이 와서 국인(印,국왕인)을 가져갈 때 서하군 임자송과 만호 권겸 등이  국인을 가지고 원나라에 갔다.

출처-<고려사절요 제24권,1329년(경오17년)>

같은해 찬성사(事:정2품 벼슬)가 되었으며 1339년(충숙왕 복위 8) 조적의 난(頔亂)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扈從:왕가를 뒤따름)하여 1342년 1등공신이 되었다.

"조적의 난"은 고려 충혜왕때 조적등이 심양왕 왕고(王暠)를 왕으로 옹립하고자 일으킨 반란이다.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은 풍천임씨의 집성촌이다. 보령 일대에는 풍천임씨 1천3백여 가구가 집단을 이루어 살고 있다. 특히 웅천읍 에는 3백여 가구 가 살고있는데,풍천임씨가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은 6백여 년전 고려 공민왕 말년 민부전서(民部典書:정3품 장관)를 지낸 임자순(任子順)의 큰 아들 정승공(政丞公) 임 향(任珦) 이 신돈에게 쫓겨 홍성으로 유배됐다.

 그 뒤 남포 죽도로 이배(移背) 되어 귀양을 살던 중 귀양이 풀려 돌아가던 시기에 이성계의 조선 개국으로 이성계일파의 부름을 받았으나 고려에 대한 불사이군(不事二君:한사람이 두임금을 섬기지 아니함) 정신으로 절의(節義)를 지키며 남포(藍浦) 오상동(五相洞)에서 시서(詩書)를 즐기며 일생을 마쳤다.

 그 이후부터 풍천임씨는 이곳에서 터주 대감 노릇을 하며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부터 대성(大姓)으로 기록되며 대대로 600여년을 살고 있으며 입향조인 정승공 임향 묘소가 웅천읍 평리 동막동에 위치 하고 있다. 

   

                                      정승공 임 향(任珦)사당  염지재(念止齋)

               동막동 염주봉(念主峰)아래 재실을 "염지재"라고 함

  

   
                                     염지재기(念止齋記)

 풍천임씨는 이들의 후손에서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대과)급제자만 148명(144?)을 배출하고 호당(湖堂:독서당의 별칭으로 문과급제자 중 유능한 사람을 뽑아 오로지 공부하도록 한곳으로 독서당)에 6명이 들었으며 청백리 2명,공신 1명,장신 3명을 배출한다.

임자송의 5대손으로 세종때 우찬성(右贊成:의정부 종1품 벼슬)을 지낸  임원준(任)은 세종조와 성종대의 총신(寵臣:임금의 총애를 받는 신하)으로  학자였는데 아들 임사홍(任)이 중종반정으로 치죄되면서 관작이 추탈되었다.

임사홍은 아들 임광재(任)가 예종의 사위이며 임숭재(任)가 성종의 사위가 되면서 정권의 중추에 등장하여 권신 류자광()과 함께 조정의 기강을 어지럽히고 

   

경기도 여주시 여주읍 능현리 산25-5

  <임사홍 묘역>

정헌대부(조선때 정2품 문무관의 관계) 이조판서 풍천임사홍지묘

배(配)는 정경부인  효령대군(세종대왕 형)의 손녀 전주이씨

임사홍[任士洪, ?∼연산군 12년(1506)], 초명은 사의(士毅), 자는 이의(而毅), 본관은 풍천, 증조부는 병마사 임거경(任巨卿), 조부는 임견(任肩), 아버지는 좌찬성 임원준(任元濬),  배위는 보성군(寶城君) 이합의 딸로 전주이씨이다. 임사홍은 그 자신뿐만 아니라, 세 아들 희재,광재.숭재 중 두명이 왕실의 사위가 되었다. 광재(光載)는 예종의 딸 현숙공주(顯肅公主)의 남편으로 풍천위(豊川尉)가 되고, 숭재(崇載)는 성종의 딸 휘숙옹주(徽淑翁主)에게 장가 들어 풍원위(豊原尉)가 되었다.

임사홍은 세조 12년(1466)에 춘시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홍문관교리.도승지.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중국말에 능통하여 관압사(管押使)·선위사(宣慰使) 등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승문원에서 중국말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성종 8년(1477)에 서얼출신인 류자광(柳子光)과 손을 잡고 지평 김언신(金彦辛)을 사주하여 효령대군의 손자 서원군(瑞原君)의 사위인 도승지 현석규(玄錫圭)를 왕안석(王安石)과 같은 소인이라고 탄핵하도록 하였다. 김언신에 이어 류자광이 다시 현석규를 공척(攻斥)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성종은 이를 붕비(朋比,붕당을 지어 자신의 편을 두둔)로 보고 김언신을 하옥하였다. 뒤에 이 일이 임사홍의 사주에 의한 것으로 밝혀져 그는 의주로, 류자광은 동래로 각각 유배되었다. 이후 그는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성종조에서는 정권에서 소외되어 큰 활약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연산군 때 재기하여 사화를 주도하였는데, 류자광은 연산군 4년(1498)에 무오사화를 일으켜 김종직(金宗直).김일손(金馹孫) 등 사림계열에 보복을 가하였으며, 임사홍은 연산군 10년(1504)에 갑자사화를 주도하여 훈신계열을 축출하는 데 앞장을 섰다. 즉, 그는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愼守勤)과 제휴하여 연산군의 생모가 죽은 내막을 밀고함으로써 폐비사사 당시의 중신들을 타도하고, 사림계 인사들에게도 다시 화를 입혔던 것이다.

  그의 아들 임희재(任熙載)는 김종직의 문하로 무오사화 때 곤장 100대를 맞고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으나, 1504년 갑자사화 때 죽임을 당하였다. 기록에보면 임사홍은 아들 희재가 죽임을 당하던 날에도 그의 집에서 연회를 베풀고 고기를 먹으며 풍악을 울리니, 연산군이 사람을 시켜 이를 엿보고는 더욱 신임하였다고 한다.

  또 임숭재(任崇載)는  채홍준사로서 남의 첩을 빼앗아 왕에게 바침으로써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도 연산군 11년(1505) 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다음 해 중종반정 시 죽임은 면했으나 부관참시(剖棺斬屍)와 함께 관직을 추탈당하였다.

갑자사화(禍:1504년(연산군 10)에 일어난 사화로 연산군이 어머니 윤씨의 폐위사실을 알고 성종의 후궁들과 왕자 그리고 김굉필,윤필상 등 십여명의 신하를 죽인 사화)를 일으키게 하여 중종반정 때 피살되었다.

 또 임숭재의 아우 임희재(任)는 성종때 직제학(直提學:예문관.홍문관의 정3품 벼슬 집현전의 종3품)을 지냈는데 아버지와 형과는 달리 연산군을 비방하여 갑자사화때 화를 당했다. 

 

   
<사명대사생가지>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 399.400번지에 있는 사명대사생가지이다. 1992년 10월 21일 경상남도기념물 제116호로 지정되었으며 조선 후기의 승려 유정(惟政:사명대사)이 태어난 곳임.

 그 뒤 임자송의 7대손으로 명종 때 제학(提學:홍문관.예문관의 종2품)을 지내고 한성판윤(判尹:정2품벼슬)을 지낸 임 열(任)의 후손과 임자순의 6대손으로 중종 때 한성판윤,공조판서(工曹判書:정2품벼슬로 대사공이라고도 함)를 역임한 임유겸(任)과 감찰(監察: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정6품 벼슬) 임유손(任) 형제의 후손이 번창하여 풍천임씨의 2대 인맥을 이룬다.

임 열의 후손에서는 고종 때 우의정(右議政:정1품 벼슬.정승)에 오른 임백경(任)과 학자로서 이름을 날린 임성주(任), 선조때 이조판서(吏曹判書:정2품벼슬.장관)를 지낸 임국로(任), 현종 때 병조참판(兵曹參判:종2품 벼슬로 차관)이며 명신으로 이름난 임유후(任) 등이 가문을 빛냈다. 

임유겸의 후손에서는 중종 때 예조참판(參判:종2품 벼슬로 차관)을 지낸 임 추(任)와  역시 중종 때 병조와 예조의 판서(判書:정2품벼슬로 장관)를 지낸 임 권(任), 임 추의 아들로 명종 때 호조판서(戶曹判書:정2품 벼슬)를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된 임호신(任),형조참의(參議:정3품벼슬로 차관보급)를 지내고 역시 청백리에 오른 임보신(任) 등이 유명하였다.

임유손의 후손에서는 남원부사(府使:정3품 벼슬) 임 현(任),숙종때 형조참판(刑曹參判:종2품벼슬) 임홍망(任), 정조 때의 학자 임태춘(任),헌종 때 형조판서(刑曹判書:정2품 벼슬.법무부장관)을 지낸 임성고(任)와

고종 때 훈련대장(訓鍊大將:조선시대 훈련도감의 종2품 벼슬로 주장 主將) 임태영(任),철종 때 성리학의 대가 임헌회(任) 등이 배출되었다.

 특히 사명대사로 잘알려진 사명당() 유정(:송설대사 )도 풍천임씨이며 그는 임진왜란때 의병장으로 활약하고 전 후 1604년,일본에 건너가 전란 중 포로가 된 3,500명의 조선인을 구출해 오기도 하였다.


                                              <사명대사 원불·원장 발견>

한국전쟁때 소실된 것으로 알려졌던 사명대사의 원불(願佛:호신불)과 원장(願狀)이 지난2007년 발견됐다.

당시 문화재청은 '불교문화재 일제조사 사업'의 하나로 포항 대성사에 보관 중이던 높이 10㎝ 남짓한 금동여래좌상에 대해 조사를 벌인 결과 복장 유물 등을 통해 사명대사의 원불임을 최종 확인했다고 밝혔다.

포항 대성사의 금동여래좌상은 1800년 남공철의 '사명대사 기적비(四溟大師記積碑)'에서 사명대사 원불임이 처음 알려졌고 1912년 일본 조선총독부도 이 불상을 촬영해 자료를 남겼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대대적인 폭격으로 사명대사 관련 유물이 대부분 소실되면서 사명대사 원불도 종적을 알 수 없게 됐지만 지난 2007년 조사를 통해 다시 햇빛을 보았다.


이 불상은 고려 말과 조선 초 금강산 일대에서 조성된 불상 중 하나로 추정된다고하며 당시 유행했던 라마교 불교양식에 따라 품격과 예술성을 갖춘 작품이라고 한다.

불상 복장에서 나온 원장(願狀)은 서기 1584년 사명대사가 승려로서의 염원을 한지에 직접 쓴 뒤 꼼꼼하게 접어서 원불 안에 보관해왔다.

사명대사 유정(惟政, 1544~1610)은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켰으며, 전후 정전회담에도 참여해 일본에 잡혀간 백성과 약탈된 통도사 불사리를 되찾아 왔었다.

   
        사명대사 원불(願佛).우측은 1912년 조선총독부가 촬영한 사진

 

   
                                               사명대사 원장(願狀)

 입향조인 임 주(任澍)의 묘는 풍천 전석산 아래에 있으며 음력 9월 13일에 향사(제사)한다.

 풍천임씨는 조선시대에 임원준(任元濬,1423년생)이 1456년(세조 2년)식년시문과 (式年試 文科:식년마다 보던 과거로 대과.동당) 을과에 장원급제하는 등 6명의 장원급제자와 문과(文科:대과)에 148명(144명?),무과(武科:무관을 뽑기위해 보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였으며 초시.복시.전시로 나뉘었음)에 24명,

 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 던 과거)에 308명,역과(譯科:중국어.몽고어.일본어.여진어에 능통한 사람을 역관으로 뽑아 쓰기 위하여 보이던 과거)에 1명 등 모두 481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여 명성을 떨쳤다.

인구조사에 의하면 풍천임씨는
1985년에는 24,682가구에 인구는 103,108명이었으며
2000년에는 30,974가구에 인구는 99,986명으로 조사되었다.

 

                                                                   <풍천임씨 계파>

 파(伯派) :임자송(任子松)- 서울파를 비롯200여 분파가 있으며 많은 학사(學士)와 율사(律士)를 배출함.

중파(仲派) : 임자순(任子順)

전서공파,중파 - 지명으로 부르지 않고 중파와 전서공파를 함께 사용함. 정승공파(政丞公派)유래 -자순공(子順公)- 향(珦)공의 후손을 정승공파라고 하며 일명 남포파(藍浦派)라고도 한다.

 

남포는 옛날 남포현(藍浦縣)에 정승공이 고려말 정착하였기 때문에 붙인 이름 이며 지금도 남포라는 이름이 남아 보령시 남포면이 있다.지금은 남포면(藍浦面) 웅천읍(熊川邑) 주산면(珠山面) 미산면(嵋山面) 성주면(聖州面)에 해당된다.


 정승공파(남포파)분파- 14세손에 이르러 3개파 외성파(外城派),내성파(內城派), 부당파(富堂派)로 나뉘는데.외성과 내성은 웅천읍의 성동리(城洞里)중 외성과 내성이고 부당은 웅천읍 수부리(水芙里)의 부근당이라는 마을의 옛 이름이다.


15세손에서 2개파 황율파와 부여파로 나뉘며, 황율은 주산면 황율리 이고, 부여는 충남 부여군이다.


17세손에서 마지막으로 2개파로 나뉘는데 간치파와 늑전파이고, 간치는 주산면 김암리의 중심 되는 마을이고 늑전은 미산면 늑전리이다.

사윤공파 - 자순공 - 瑨공의 후손을 사윤공파라고 하며,조선때 아산지역에정착한 동기가 되어 아산파(牙山派)라고 정했다. 아산의 현지명은 충남 아산시다.

  <집성촌>

경기도 포천군 창수면 운산리

강원도 철원군 갈말면 내대리, 상사리

강원도 평강군 남면 정연리

강원도 철원군 동송면 대위리

충남 보령시 미산면 근전리, 봉성리

충북 옥천군 동이면 세산리

경북 경주시 남산동

전남 무안군 몽탄면 양장리

풍천(豊川)은 황해도에 있었던 옛 지명으로 757년(신라 경덕왕 16) 굴현현(屈峴縣)으로 개칭하고 양악군(楊岳郡: 安岳)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초에 풍주(豊州)로 바꾸고 995년(성종 14) 도호부로 승격하였다가 방어사(防御使:지방관직으로 요지를 지키는 병권을 가진 종2품벼슬로 병마절도사 다음 직위)가 설치되었다.

1395년(조선 태조 6) 진(鎭)이 설치되었고  병마사(兵馬使)가 지주사(知州使)를 겸했으며 1413년(태종 13) 군현제 개편 때 은율(殷栗)을 합병하여 풍율군(豊栗郡)이라 하였다가 곧 분리하였다. 1469년(예종 1) 왕비 안순왕후 한씨의 외향(外鄕)이라 하여 풍천도호부(豊川都護府)로 승격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풍천군이 되어 해주부 관할이 되었다가 1896년 황해도 풍천군이 되었다.1909년 풍천군을 폐지하여 송화군(松禾郡)에 합병했으나 1967년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 때 대부분의 옛 풍천도호부 지역이 과일군으로 분리 개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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