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8. 22. 02:02ㆍ자랑스런 선조
임주.임향.임사홍.사명대사.문과148명 | ||||||||||||||||||||||||||||||||||||||||||||||||
김진우의 족보이야기-(45)풍천임씨(豊川任氏)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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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명
<뿌리공원 조형물에 새겨진 풍천임씨 유래> 우리 풍천임씨의 시조는 은자광록대부 휘 온(溫)이시고 2세는 휘 가규(可珪) 3세는 휘 비 4세는 휘 도(徒)이시며 검교대장군을 지내셨고 5세는 휘 천유(天裕)이시니 찬화공신으로 풍해군에 봉작(封爵)되셨으며, 6세는 휘 주(澍)이신데 고려 충렬왕 9년(서기1283)에 경상도 안찰사, 어사대부, 감문위대장군을 두루 거쳐 풍천을 관향으로 하사 받으시니 풍천은 황해도에 있는 옛 고을 이름으로 서하(西河)라고도 한다.
--------------------------------------------------- <김진우작가의 해설> <풍천임씨 현대인물>
임영기(풍천임씨중앙종친회회장.2009년).임효순(중앙종친회부회장).임형빈(2대종친회장).임영훈(육군중장예편.2008년중앙종친회장).임종모(대종회장.2008년).임용빈(중앙종친회부회장.2007년).임영재(뉴욕풍천임씨종친회장.2008년).임선준(문충공파회장).임영기(승지공파회장).임세빈(사윤공파회장.2007년).임상호.임선빈 임충빈(육군참모총장(제39대).2008년~2009.9,2006~2008년육사교장.2004~2006년.1군단장.천안출생.한남대에서 명예교육학박사).임성호(육군소장.2009년 32사단장).임영우(논산시교육장).임관희(보령시종친회장).임좌순(전중앙선관위사무총장.2010년 아산시장후보).임세빈(2010년 보령시장후보).임대식(2010년보령시의원후보). 사정공파(司正公派,임계생.묘소-경기도포천시 창수면 오가리 164번지) 임원진 고문-임봉재.임상호.임광호,임문호(회장).임용재(부회장).임기재(부회장).임순재(총무).임홍재(감사).임정호(감사).이사-임문순.임재현.임훈재.임찬재.임덕순.임수호.임점호.임인재.임동빈-이상 2010년3월14일 선출.
<사정공파> 가선대부종회 임원진(2010년3월14일선출)-임봉재(고문).임찬재(회장).임훈재(부회장).임점호(부회장).임철재(총무).임성재(감사).임영순(감사). <이사>-임수호.임용재.임동재.임홍재.임흥순.임순재.임선순.임덕순.임재우.임해순. <사정공파> 통덕랑계종회 임원진(2010년1월30일선출) 고문(임광호.임훈호).임수호(회장).임순재(부회장).임용재(총무).임문호(감사).임성재(감사).이사-임재우.임군재.임환호.임성호.임철재.임판호.임창재.임동재. 임상혁(정승공파대종회장).임두순(정승공파 총무).임관희(간사).임관희(보령시풍천임씨종친회장).임인식(사무국장).임창빈(총무) 등등 <풍천임씨 역대인물> 임원준(任元濬) : 임자송의 5세손으로 조선 세종~성종 때의 총신이며 학자로 아들 임사홍이 중종반정에 연루 관작이 추탈됨 임내신(任鼐臣) : 강원도 관찰사와 전주부윤.| ---------------------------------------------------
임씨(任氏) 우리나라의 임씨(任氏)는 지난 2000년 인구조사때는 장흥임씨(24,523명).풍천임씨(99,986명).곡성임씨(시조-임영진,5,686명).과천임씨(636명).관산임씨(1,461명).광산임씨(1,421명).나주임씨(28,554명).대전임씨(296명).백천임씨(1명).보령임씨(557명).부천임씨(342명).서하임씨(12명).수원임씨(500명).순천임씨(707명). 아선임씨(70명).안동임씨(1,471명).진주임씨(1,578명).청풍임씨(416명).춘천임씨(271명).충내임씨(165명).파평임씨(657명).평택임씨(1명).풍산임씨(995명).함풍임씨(888명).해남임씨(488명).현도임씨(91명).홍천임씨(677명).회덕임씨(92명-시조 임수성-별장을 지냄) 등 29본관으로 조사되었으나 대부분 세거하는 지명이라고 하며 인구는 172,726명으로 조사되었다. 한편 장흥임씨(長興任氏)와 풍천임씨(豊川任氏)는 기록으로는 시조(始祖)를 다르게 받들고 있으나 대내적으로는 상호간에 같은 조상의 자손 이라며 사실상 결혼도 하지 않고 있다.
풍천임씨(豊川任氏) 조선때 문과에 148명,정승 임향.사명대사 원불.원장 발견 천임씨(豊川任氏)의 시조 임온(任溫)은 문헌에 의하면 중국 소홍부 자계현 사람으로 고려 때 우리나라에 건너와 황해도 풍천에 살았다. 시조 임온의 6세손 임주(任澍)가 서기 1283년(충렬왕9)에 경상도 추동 안찰사(按察使:1012년에 절도사가 혁파되고 안찰사를 설치함,고려 최고지방행정 구획인 5도의 장관)를 거쳐 어사대부(御史大夫:판사와 함께 어사대를 이끌던 초기의 사헌대를 어사대로 개편하면서 둔 정3품 벼슬로 1298년에 사헌부로 개칭하고 조선시대로 이어짐), 감문위 대장군(監門衛 大將軍:감문위는 궁성내외의 모든 문을 경비하는 군대로 938년에 설치됨 대장군은 종3품 무관 벼슬)을 지내고 이후에 풍천을 관향으로 하였다.풍천은 황해도에 있는 옛 고을 이름으로 서하(西河)라고도 한다. 풍천임씨(豊川任氏)는 임 주(任澍)의 아들대에서 충숙왕 때 삼사판사(三司判事:삼사의 으뜸벼슬) 임자송(任子松)과 민부전서(民部典書:정3품 벼슬로 장관) 임자순(任子順) 대에서 백파와 중파로 나뉘면서 고루인물을 배출 번성하게 된다. 임자송(任子松,?~?,고려때의 문신) 임자송의 본관은 풍천(豊 川)으로 서기 1319년 복국장공주(濮國長公主)의 죽음을 알리러 원나라에 다녀왔다. 서기 1321년 밀직사동지사(密直司同知事), 1324년 익찬공신(翊贊功臣)의 호를 받고 첨의평리(僉議評理:첨의부의 종2품 벼슬)가 되었다. 1327년 1등공신으로 서하군(西河君)에 책록되었으며 1330년(지순(至順) 경오년.충숙왕 17)봄에 원나라에 가 있던 세자 정(禎:충혜왕忠惠王)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원나라 객성부사(客省副使) 칠십견(七十堅)이 와서 국인(國印,국왕인)을 가져갈 때 서하군 임자송과 만호 권겸 등이 국인을 가지고 원나라에 갔다. 출처-<고려사절요 제24권,1329년(경오17년)> 같은해 찬성사(贊成事:정2품 벼슬)가 되었으며 1339년(충숙왕 복위 8) 조적의 난(曺頔亂)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扈從:왕가를 뒤따름)하여 1342년 1등공신이 되었다. "조적의 난"은 고려 충혜왕때 조적등이 심양왕 왕고(王暠)를 왕으로 옹립하고자 일으킨 반란이다.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은 풍천임씨의 집성촌이다. 보령 일대에는 풍천임씨 1천3백여 가구가 집단을 이루어 살고 있다. 특히 웅천읍 에는 3백여 가구 가 살고있는데,풍천임씨가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은 6백여 년전 고려 공민왕 말년 민부전서(民部典書:정3품 장관)를 지낸 임자순(任子順)의 큰 아들 정승공(政丞公) 임 향(任珦) 이 신돈에게 쫓겨 홍성으로 유배됐다. 그 뒤 남포 죽도로 이배(移背) 되어 귀양을 살던 중 귀양이 풀려 돌아가던 시기에 이성계의 조선 개국으로 이성계일파의 부름을 받았으나 고려에 대한 불사이군(不事二君:한사람이 두임금을 섬기지 아니함) 정신으로 절의(節義)를 지키며 남포(藍浦) 오상동(五相洞)에서 시서(詩書)를 즐기며 일생을 마쳤다. 그 이후부터 풍천임씨는 이곳에서 터주 대감 노릇을 하며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부터 대성(大姓)으로 기록되며 대대로 600여년을 살고 있으며 입향조인 정승공 임향 묘소가 웅천읍 평리 동막동에 위치 하고 있다.
풍천임씨는 이들의 후손에서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대과)급제자만 148명(144?)을 배출하고 호당(湖堂:독서당의 별칭으로 문과급제자 중 유능한 사람을 뽑아 오로지 공부하도록 한곳으로 독서당)에 6명이 들었으며 청백리 2명,공신 1명,장신 3명을 배출한다. 임자송의 5대손으로 세종때 우찬성(右贊成:의정부 종1품 벼슬)을 지낸 임원준(任元濬)은 세종조와 성종대의 총신(寵臣:임금의 총애를 받는 신하)으로 학자였는데 아들 임사홍(任士洪)이 중종반정으로 치죄되면서 관작이 추탈되었다.
갑자사화(甲子士禍:1504년(연산군 10)에 일어난 사화로 연산군이 어머니 윤씨의 폐위사실을 알고 성종의 후궁들과 왕자 그리고 김굉필,윤필상 등 십여명의 신하를 죽인 사화)를 일으키게 하여 중종반정 때 피살되었다. 또 임숭재의 아우 임희재(任熙載)는 성종때 직제학(直提學:예문관.홍문관의 정3품 벼슬 집현전의 종3품)을 지냈는데 아버지와 형과는 달리 연산군을 비방하여 갑자사화때 화를 당했다.
그 뒤 임자송의 7대손으로 명종 때 제학(提學:홍문관.예문관의 종2품)을 지내고 한성판윤(判尹:정2품벼슬)을 지낸 임 열(任說)의 후손과 임자순의 6대손으로 중종 때 한성판윤,공조판서(工曹判書:정2품벼슬로 대사공이라고도 함)를 역임한 임유겸(任由謙)과 감찰(監察: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정6품 벼슬) 임유손(任由遜) 형제의 후손이 번창하여 풍천임씨의 2대 인맥을 이룬다. 임 열의 후손에서는 고종 때 우의정(右議政:정1품 벼슬.정승)에 오른 임백경(任百經)과 학자로서 이름을 날린 임성주(任聖周), 선조때 이조판서(吏曹判書:정2품벼슬.장관)를 지낸 임국로(任國老), 현종 때 병조참판(兵曹參判:종2품 벼슬로 차관)이며 명신으로 이름난 임유후(任有後) 등이 가문을 빛냈다. 고종 때 훈련대장(訓鍊大將:조선시대 훈련도감의 종2품 벼슬로 주장 主將) 임태영(任泰瑛),철종 때 성리학의 대가 임헌회(任憲晦) 등이 배출되었다. 특히 사명대사로 잘알려진 사명당(泗溟堂) 유정(惟政:송설대사 松雲大師)도 풍천임씨이며 그는 임진왜란때 의병장으로 활약하고 전 후 1604년,일본에 건너가 전란 중 포로가 된 3,500명의 조선인을 구출해 오기도 하였다.
입향조인 임 주(任澍)의 묘는 풍천 전석산 아래에 있으며 음력 9월 13일에 향사(제사)한다. 풍천임씨는 조선시대에 임원준(任元濬,1423년생)이 1456년(세조 2년)식년시문과 (式年試 文科:식년마다 보던 과거로 대과.동당) 을과에 장원급제하는 등 6명의 장원급제자와 문과(文科:대과)에 148명(144명?),무과(武科:무관을 뽑기위해 보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였으며 초시.복시.전시로 나뉘었음)에 24명, 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 던 과거)에 308명,역과(譯科:중국어.몽고어.일본어.여진어에 능통한 사람을 역관으로 뽑아 쓰기 위하여 보이던 과거)에 1명 등 모두 481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여 명성을 떨쳤다.
<풍천임씨 계파> 백파(伯派) :임자송(任子松)- 서울파를 비롯200여 분파가 있으며 많은 학사(學士)와 율사(律士)를 배출함. 중파(仲派) : 임자순(任子順) 전서공파,중파 - 지명으로 부르지 않고 중파와 전서공파를 함께 사용함. 정승공파(政丞公派)유래 -자순공(子順公)- 향(珦)공의 후손을 정승공파라고 하며 일명 남포파(藍浦派)라고도 한다.
남포는 옛날 남포현(藍浦縣)에 정승공이 고려말 정착하였기 때문에 붙인 이름 이며 지금도 남포라는 이름이 남아 보령시 남포면이 있다.지금은 남포면(藍浦面) 웅천읍(熊川邑) 주산면(珠山面) 미산면(嵋山面) 성주면(聖州面)에 해당된다. 정승공파(남포파)분파- 14세손에 이르러 3개파 외성파(外城派),내성파(內城派), 부당파(富堂派)로 나뉘는데.외성과 내성은 웅천읍의 성동리(城洞里)중 외성과 내성이고 부당은 웅천읍 수부리(水芙里)의 부근당이라는 마을의 옛 이름이다. 15세손에서 2개파 황율파와 부여파로 나뉘며, 황율은 주산면 황율리 이고, 부여는 충남 부여군이다. 17세손에서 마지막으로 2개파로 나뉘는데 간치파와 늑전파이고, 간치는 주산면 김암리의 중심 되는 마을이고 늑전은 미산면 늑전리이다. 사윤공파 - 자순공 - 瑨공의 후손을 사윤공파라고 하며,조선때 아산지역에정착한 동기가 되어 아산파(牙山派)라고 정했다. 아산의 현지명은 충남 아산시다. <집성촌>
경기도 포천군 창수면 운산리 강원도 철원군 갈말면 내대리, 상사리 강원도 평강군 남면 정연리 강원도 철원군 동송면 대위리 충남 보령시 미산면 근전리, 봉성리 충북 옥천군 동이면 세산리 경북 경주시 남산동 전남 무안군 몽탄면 양장리 풍천(豊川)은 황해도에 있었던 옛 지명으로 757년(신라 경덕왕 16) 굴현현(屈峴縣)으로 개칭하고 양악군(楊岳郡: 安岳)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초에 풍주(豊州)로 바꾸고 995년(성종 14) 도호부로 승격하였다가 방어사(防御使:지방관직으로 요지를 지키는 병권을 가진 종2품벼슬로 병마절도사 다음 직위)가 설치되었다. 1395년(조선 태조 6) 진(鎭)이 설치되었고 병마사(兵馬使)가 지주사(知州使)를 겸했으며 1413년(태종 13) 군현제 개편 때 은율(殷栗)을 합병하여 풍율군(豊栗郡)이라 하였다가 곧 분리하였다. 1469년(예종 1) 왕비 안순왕후 한씨의 외향(外鄕)이라 하여 풍천도호부(豊川都護府)로 승격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풍천군이 되어 해주부 관할이 되었다가 1896년 황해도 풍천군이 되었다.1909년 풍천군을 폐지하여 송화군(松禾郡)에 합병했으나 1967년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 때 대부분의 옛 풍천도호부 지역이 과일군으로 분리 개편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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