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는 中原의 역사

2009. 7. 24. 21:33주고받는 정보

이런 글을 發音附號(한글)로 써 놓으면 안 되지라~~~~~~~~
修正하며 읽어봅세~~~~~
시간꽤나 걸리겄넹~~~~~
眞我찾기 放害되나
祖上흔적 바로찾세~~~~~~    
 
* 이하 <東夷(동이)>는  <東夷(동철)>의 誤記임.        / 漆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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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省 省都(성도)에 있는 전촉왕? 王建(왕건)의 靈陵(영릉)은
고려開國王(개국왕) 王建이었다는 주장에 대해
 
사천省 省都(성도:도청소재지)에 있는 王建의 陵(릉:무덤)  :
 
 
*명사[明史], 권320. 외국전[外國傳], 외국[外國]1, 조선[朝鮮] 원문
 
- 후당시왕건대고씨겸병신라백제지도[後唐時王建代高氏兼倂新羅百濟地徒]
후당때 왕건이 고씨대신 신라, 백제의 땅과 백성을 모두 취했다.
 
거송악왈동경이이평양위서경[居松嶽曰東京而以平壤爲西京]
[왕건이] 살았던 송악은 동경이며 평양이며 서경이다.

*삼국사기 37권-지6-지리4-00 雜志第六. 잡지 제 6. 地理四. 지리4. <高句麗>·<百濟>. 고구려*백제 #37卷-志6-地理4-01
 
前略(전략).........以此言之, 今<大同江>爲<浿水>대동강이 패수 , 明矣. 則西京之爲<平壤>, 亦可知矣. .... 則西京之爲<平壤>, 亦可知矣.서경이 평양이란 것을 역시 알수있지 않는가?

*경인문화사 간행 해동역사 하권 627쪽 기록 해동역사 속 권 제 십(海東繹史 續卷 第 十) 烈水 韓 致奫 術(열수 한치윤 술) 지리고 십 (地理考 十) 高麗 一 (고려 일) 彊域總論 (강역총론) 高麗圖經(고려도경);
 
高麗南隔遼海西距夭水北接契丹舊地東距大金又與日本流球耽羅黑水毛人等國
(고려남격요해서거요수북접거란구지동거대금우여일본유구탐라흑수모인등국)
-고려는 남쪽으로 요해에 막혀있고, 서쪽으로 요수에 접하고,북쪽으로 거란의 옛땅에 접하고,동쪽으로는 금나라 그리고 일본, 유구, 탐라, 흑수모인등의 나라에 접해[본문;거距;떨어져 ]있다.

*그 나라에 있는 서울의 1.동북은 연산으로부터 육지로 연결되어 있는 도로를 쭉 따라 요[遼]의 동쪽까지의 경계가 무려 3790리이고 만약 바다로 나간다면 하북성으로 나가야 한다.(하북성은 북경밑임.)
 
京東淮南兩浙廣南福建皆可旺(경동회남양절광남북건개가왕)
(그 나라)서울 2.동쪽은 회지방의 남쪽인 절강성과 광동성의 두성(省)이며
3.남으로는 복건성으로 모두 갈 수 있다.
 
今所建國正與登來濱隸相望舊封境東西二千里南北一千五百餘里
(금소건국정여등래빈예상망구봉경동서이천리남북일천오백여리)
지금 건국한 곳에서 평정한 등주와 봉래, 빈이 속하여 서로 보이는 옛 봉토의 경계까지 동서 2000리, 남북 1500여리로今旣병新羅百濟東北稍廣(금기병신라백제동북초광) 지금은 이미 나란히 있는 신라 백제의 동북보다 약간 넓다.
其西北與契丹相接昔以大遼爲界後爲所侵迫乃築來遠城以爲 固然亦恃押綠以爲險也
(기서북여글란상접석이대요위계위후위소침박내축래원성이위저고연역시압록이위험야)
 
 
방촌은 공양왕때 부터 고려왕조의 주력세력이 약화되어 고려말에 중심세력이 반도 개경으로 쫓겨가 정몽주 역시 반도 개경의 선죽교에서 이방원에게 죽은 것이라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한(지나) 중심의 손문이 동이 중심의 왕조(청,명,원,고려,금,요,발해,통일신라,당,송,고구려,백제,기자조선 등 혈통상 동이 중심왕조) 멸망이후, 국민당의 민국정부를 세웠으나, 국민당 정부의 장개석이 공산당의 모택동에게 쫓겨 그 정통성을 빼앗긴것과 같이 天子國 高麗王朝도 홍건적을 이끈 주원장에 의한 "明(조선)"에 의해 수도 선양(심양)에서 멸망하니 고려왕실과 중신은 반도 개경(개성;따라서 허도)으로 망명하여 마침내 주원장에게 머리굽힌 협량한 반도파 이성계에게 멸망당했다는 것이다.(방촌은 당시 원나라는 동이 천자국 고려왕실과 함께 같은 동이 주류국으로 일종의 형제국 관계로 주원장의 방계(비정통) "(유)명(조선)"에 의해 동시에 망했다고 보고있으며 天子國 高麗의 멸망은 天子國의 정통을 明에게 넘기고 이성계에 의해 조선제후국이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천자국의 지위는 청으로 계승되어 광서제까지 이어진다(증산도 도전 황극신 공사 참조))

천자국의 정통성을 가진 고려가 망하고 마침내 주원장 세력휘하로 자진해 들어간 이성계 조선에 의해 정통성이 왜곡되었다는 얘기다. 이성계는 여진족이었지만 대륙사관으로 보면 같은 동이 한 민족이라 문제될 것 없으며 주원장 역시 우리 한겨레 핏줄로 아예 명나라를 명조선이라 칭호하는 방촌은 종교적인 금산사가 아닌 정치사적으로 견훤이 신검에 의해 유폐된 금산사는 감숙성 고란현 서북쪽 백탑 산중에 있다 하고(금산사는 남경 위 양자강가에도 있음),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이 있었던곳은 사천성 부능현 동쪽이라 하고(강동6주도 사천성, 산서성 등 대륙소재), 고려의 강화 천도는 반도내 강화도가 아닌 호남성 맨아래 왼쪽에 있는 강화현으로 당시 서경은 반도내 평양이 아닌 섬서성 서안으로 개경 역시 반도의 개경(현재(개성)이 아닌 산서성 평양 분주(현재의 임분)라 하고 당시의 한양성은 반도내 지금의 서울 한양이 아닌 복건성 포성현이라 말한다.

 




방촌 임균택이 고증하는 인류 문명 발상근원지(천산곤륜 문명이동경유도)와 백제 최전성기 및 대륙고려 최전성기 강역도


방촌 임균택이 집대성한 <한경대전> 9부작의 대륙사 대강을 그리면 다음과 같다.
 
최근의 지나 대륙사학자들은 화하족의 조상으로 삼아온 기존의 황제헌원만으로는 부족함을 느껴서인지 대륙을 동이, 묘만,화하로나누고 이들의 조상을 각기 신농(동이), 치우(묘만), 황제(화하)로 분류해 지나족의 공동조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러나 동이계가 석권한 대륙상고사에 묘만계, 화하계의 3분법 "물타기 분류"를 시도하는 이러한 화하사관에 방촌 임균택은 " 자치통감(資治通鑑) 193권 당기(唐紀) 9권에
 
"중국여근본사이(中國如根本四夷)-중국의 근본은 사이(四夷)"라는 기록과 또한 자치통감 195권 당기(唐紀) 11권에 기록된
"중국근간야사이지엽야(中國根幹也四夷枝葉也)-중국사람들의 뿌리는 사이(四夷)의 가지와 잎에 해당한다" 라는 율곤 이중재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상고대륙을 뒤덮고 있었던 그 근본은 모두 동이족 묘민이었다"고 말한다.
          
방촌 임균택은 현실적인 지나 화샤의 시작을 남방계 객가인 출신의 손문의 민국정부로 보고 있으며(북방 동이족 주류 왕조를 꺾고 남방 비주류 동이족 국가의 현대사적 최초출현) 그 정통을 이은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마저도 모택동으로부터 대만으로 쫓겨들어가 그 정통을 공산당 모택동 정부에게 빼앗기고 말았다고 주장한다.
 
즉 漢(支那) 중심의 손문은 소위 청,명,원,고려,금,요,발해,통일신라,당,송,고구려,백제,기자조선 등 혈통상 東夷(동철) 중심의 왕조 멸망이후, 民國정부를 수립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방촌은 支那 中國을 漢族이라 규정하는 것이 아주 잘못된 것이라 지적한다. 즉 支那 한족(漢族) 이외의 여타민족을 소수민족으로 분류해 55개 소수민족으로 분류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상고 대륙사를 크게 양분하면 대륙 전체는 東夷(동철) 諸族이 席卷(석권)하고 있다가 하우 (夏禹)의 아들 계(啓)에 이르러 주류와 비주류로 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중원대륙은 조이족인 東夷(동철) 주류계이며 東夷(동철) 남방 지류 지나계란 진나라 말기에서 유방의 한나라에 이르러 구강(九江)이 도읍지로 정착하게 된 후, 그곳을 중심한 남방계 삼국인 촉(蜀),오(吳),위(魏) 그리고 진(晋)-수(隋)-당(唐)-오대(五代)-송(宋)-명(明)이 인도지나계로 연결됨으로써 남방 지나계의 시조가 東夷(동철)족인 하우 (夏禹)의 아들 계(啓)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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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재의 새 고려사(대륙사)Click here!

다음은 오재성의 대륙사 고증 역저들이다.







30년간의 연구결과를 집대성한 방촌 임균택 저서 한경대전 9부작은 상고 대륙사의 근원이 환단 東夷(동철)구려족이었음을 밝히고 현재 대륙의 모든 소수민족이 실은 上古 東夷(동철) 諸族의 兄弟族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高麗는 半島에 없었고 대륙에 있었다는 주장을 대륙의 상고사료를 총동원하여 조목조목 입증해 체계화한 그는 9부작 <한경대전> 중 그 정수를 뽑아모아 검인정 교과서 시대를 대비 <우리역사(한국사)>를 따로 내놓아 주목을 받고 있다. 한편, <高麗는 三國과 더불어 한국땅에 없었다! 支那大陸과 한반도 그리고 日本열도는 高麗가 통일했다. 그래서 '코리아'라는 단어가 태어났다.>는 율곤 이중재의 저서<새고려사>는 다음내용을 담고있다.
 
1. 왕건은 877년 정유년 음력 1월 14일에, 중국 사천성 성도(成都) 남쪽인 한주(漢州) 송악군(松嶽郡)에서 태어났다(高麗史節要 참조).
2. 왕건(王建)의 조상은 고구려인(高句麗人)이다. 漢, 梁, 後晋 唐나라가 王建의 조상나라다.
3. 고려가 들어서자 신라유민들이, 서역(西域)인 돌궐로 도망.
4. 왕건의 묘는 사천성 성도에 지금도 있다.(현지답사 결과 사진으로 제시)
5. 고려의 도읍지, 엄청난 강역.
6. 강감찬 장군은 강한찬(姜邯贊)이다.
7. 고려의 흥망과 몽고의 침탈.
8. 왜구(倭寇)들의 침탈과 한양 천도설.
9. 조선왕조가 건국되는 과정.이성계(李成桂)의 고향은 함주(咸州)이다.함주는 함경도 함흥이 아니라 하남성(河南省) 통허현 의주(義州)이다.
 
오재성은 숨겨진 역사를 찾아서 / 리역사 쇠집 / 동이문자의 옛음과 작법 / 광개토평안호태왕비 연구/ 지도로 보는 우리의 역사 / 백제는 중국에 있었다 / 우리는 東夷(동철)민족이다 / 삼국지 東夷(동철)傳은 황해서쪽의 기록 / 중국에 사로신라가 있었다 등의 저서를 통해 한민족 대륙사의 실체를 고증하고 있다.
 
* 칠통이도 몇 년 前 徐兢(서긍)이 저술한 <선화봉사高麗圖經>을 읽어봤다.
   모두 (한반도와는 무관한) 딴 나라 내용이었다. 


필자는 역사를 파면 팔수록 이러한 대륙사에 대한 실체들이 강력한 진실로 다가와 종교적 충격에 버금가는 엄청난 충격으로 인해 자랑스런 조상의 감동스런 과거 역사와 일제식민지 반도 노예史學을 뿌린 이병도 신석호의 죄악에 희비가 엇갈려 소스라칠 수밖에 없었으며 한민족이 경험하고 있는 이러한 모순적 현실에 몸둘 바 몰랐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생각해 보라. 모든 이가 성군으로만 여기고 있는 소위 세종대왕이 高麗史 歪曲(왜곡)의 주범이라는 아이러니한 사실을!  역사는 실로 아이러니하게도 선악, 명암을 함께 한다는 점에서 차라리 유장한 동시에 냉엄하고도 비장한 것이다. 어떠한 역사시기가 되었든 당대의 특정한 약점을 숨기고 체제와 권력을 정당화하기위해 역사적 진실을 수면아래 영원히 감추려 한다는 점에서 모든 시기의 역사는 동일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한국사의 중추인 고려사가 통째로 허구였으며 어느 특정시기의 통치자들에 의해(태조 이성계로부터 태종 이방원 세종 이충녕) 수 십년간 조직적으로 조작되고 은폐, 왜곡되었다는 사실은 실로 가공할 충격의 차원을 능히 넘어서는 것이며 이를 왜곡한 장본인이 우리가 성군으로 여겨왔던 어느 특정인이라고 생각하면 실로 그 충격의 크기는 능히 평생 자애로운 의지처였던 친부모가 장년이 되어서 양부모였다는 사실을 갑자기 접한 만큼이나 충격과 혼란일 수 있다.

따라서 필자는 이러한 대륙사의 진실이 밝혀지지 않는 한, 해방후 이병도 신석호가 길러낸 반도 식민지 노예 사학자들이 뿌려놓은 역사왜곡에 의해 소위 중국의 "동북공작 프로젝트"가 이루어지고 있어도 말한마디 벙긋못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

*참고 ; 타고르의 "동방의 등불"이란 詩 탄생의 진짜내용:
 
이 詩는 타고르가 일본에 왔을 때 한국의 모 신문사 기자의 부탁으로 쓴 시이다.  타고르는 인도의 시성이다 그는 歷史학자며 초창기 부터 전해 내려오는 흰두교 경전 베다 연구의 거목이며, 철학자며, 교육자며, 정치가며, 외교가였다. 그가 베다를 연구 하다가 발견 한 아리안족의 인도 진입 과정을 읽게 된다. 아라랏 고개를 넘어 검은 바다를 지나 우랄산맥을 넘어 타림분지를 지나 흰두쿠시 산맥을 넘어 왔는 아리안족의 행적을 접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함께 길떠난 무리의 주류를 추적하게 된것이다. 처음에는 일본이라 생각 했는데 한국의 단군 신화를 접하고 베다의 나타난 단군의 나라와의 수많은 교류와 그들의 가르침을 발견하고 그게 우리나라라는 사실을 일본에 오기 전에 알게 되었다.그래서 그는 참으로 힘 없고 인구도 얼마 안 되고 한 우리 나라를 창조주가 계획한 숨겨논 앞날을 바라보고 이나라를 그토록 극찬 할수 있었다 한다./ (타고르의 자서전에서 발췌)
 
필자는 타고르의 사관이 일만년 한 민족 대륙사의 핵심을 꿰고 있다고 보고 있으며 방촌의 사관은 대국적으로 타고르의 관점을 밝힌 大 東夷(동철) 史觀이며 율곤 이중재의 史觀 역시 이러한 관점에 서 있다고 보고 있다. 현재 모든 東夷族(동철족)의 상고 고고학 유적지가 대륙에 있는 상황에서 상고시절 한반도는 東夷族(동철족) 문명의 숨결이 빛깔만 비추어진 외진 구석에 불과했던 곳이다. 대륙사관은 일제의 반도 노예사관의 관점으로 보면 사료부족으로 인해 많은 문제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진리의 광명은 반드시 어둠을 몰아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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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 스페셜 동영상-20031012 한·중 역사 전쟁 - 고구려는 중국사인가 Click 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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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찾은 희망(kbs이것이 인생이다<이중재편>;(방영)Click here! pensword

분명한 진실은 우리의 대륙사가 너무나 엄청나서 현재의 상황에서 이를 주장하면 머리가 반쯤 돈 정신병자가 되거나 완전히 바보가 된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장개석이 독립운동을 하던 이시영(전 부통령) 에게 자신의 조국 上古史는 제대로 알고 계시냐는 그 알듯 모를듯한 화두같은 말한마디가 항상 우리의 현실과 대비되어 나타나는데 그 대답은 장개석 스스로 모택동에게 쫓겨 대만으로 도망갈때 北京의 모든 上古史書와 보물을 싹쓸이해 가져간 것을 통해 해답이 내려졌다고 본다.
 
항우가 아방궁의 보물만을 먼저 손에 넣었다면
유방은 가장 먼저 손에 넣은 것이 역사를 비롯한 각종 문서였다.(이것이 한무제때 東夷(동철)족 주류의 역사를 마름질해 왜곡한 사마천의 사기가 된다. 필자가 섬서성 연안 황허(황하) 호구폭포에서 황허변을 따라 서안으로 내려오며 보니 황허 강변에 세종로 이순신 장군 동상의 10여배 크기(은진미륵 크기)의 사마천 동상이 있음을 보고 묘한 묵상에 잠긴 기억이 있다)
 
장개석은 아마 당시 이시영씨에게 겉으로 표현은 안했지만 다음과 같이 물었는지도 모른다.

-대륙의 주인이었던 당신 겨레의 과거를 알고 독립운동을 하는게요?  당신들의 일본 식민지 역사교육은 반도 사학인데 동포들은 후대에 뭐가 되겠소.! 어서 나라를 독립시켜 제대로 교육이나 시키시오. 역사는 역시 힘이 있어야 하오.
 
우리 대륙의 역사는 다 東夷(동철)의 역사인데 크게 둘로 나누면
 
ⓐ 북방 조이족 정통 東夷(동철) 주류와
 
ⓑ 하우의 아들 계에 의해 시작된 남방계 東夷(동철)족 지류가 남방 객가인 출신 손문 선생의 민국건설로 비로소 현대사에 있어 우리 화샤(화하) 역사의 실질적인 시작을 했소.
 
정치적으로는 우리가 대일본 식민지 제국주의 전쟁의 동지이지만 내피역사로 보아 실상을 알면, 우리 민국과 당신 조상의 왕실과의 관계는 남의 둥우리에 알을 까는 뻐꾸기의 관계요. 그나마 모택동은 북방 東夷(동철)족 주류 역사에 쐐기를 박은 손문선생이 씨뿌린 화샤의 국민당 역사를 방해하고 있으니 결론적으로는 모택동과 북방 東夷(동철)의 주인공인 당신나라는 메두사의 두 얼굴이요. 당신들의 섭리사 속에는 모택동이 받은 무슨 역사의 섭리, 즉 먼 훗날 東夷(동철)의 주체적 역사 종주권을 쥐는 프로그램이라도 있는 것이요?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이것이 증산도의 위대한 북한 공산화의 금강산 공사이며 프리메이슨 세력의 기획에 의한(막스 레닌은 유대인이었으며 러시아 혁명 참여자 유대인 족보 현황Click here! 로베스삐에르 역시 프리메이슨 얼굴마담이었다) 프랑스 혁명, 러시아 혁명, 헝가리 혁명에 의한 공산화 프로그램이다)-

현재 해방이후 역사교육을 받은 세대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하면 그야말로 고식적으로 또는 공식외우듯 상상하면서 역사를 대하며 한반도에 그리는 것이 기본 베이직이라는 사실에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음을 안다. 각설

삼별초가 도망 간 제주는 산동성 거야현인데 우리의 제주도와 한문이 똑같은 제주 제북군이라 했다 하며(방촌의 사관으로 상고사를 보면 서긍의 고려도경에서 송의 사신이 임안(항주)의 전단강을 배타고 지나며 풍광좋은 고려의 땅을 지나고 있다는 서술이 곧바로 이해된다. 따라서 삼별초난이라는 것은 반도내 강화도에서 지금의 제주도로 간 것이 아니라 실은 호남성 남쪽에 있는 강화에서 산동성 거야로 도망갔다는 얘기가 되겠다.(최후의 저항자 김통정 사당을 제주도에 세운 것도 얼마 안된다)
     
고려의 正史인 정인지 高麗史는 王建이 唐나라 숙종의 혈통임을 기록하고 있으며 세종의 학우이자 신료로 세종의 명을 받아 극비리에 사서를 대대적으로 燒却(소각)한 김문기 가문의 유훈은 개성이 허도임을 밝히고 있고

북벌파 최영을 친 이신벌군의 역적 이성계부자가 주원장의 유교를 들여와 존주사대를 통해 지나를 천자로 모시는 대신 제후로서의 통치적 명분을 얻고(민족 사학자 복초 최인은 이신벌군의 역적이자 북벌파 최영을 친 사대주의자 이성계가 북벌파를 치고 고려 왕조를 멸망시키고 세운 조선왕조의 통치명분을 얻기 위해 주원장에게 넙죽 엎드려 조아리고 천자국의 지위를 내팽개치고 중화 사대주의의 썩은 망건을 받아써 중화의 노예가 되었노라 말하고 있다)
동이족 혈통인 진시황이 분서갱유를 저지른 것 처럼 여진족인 이성계 가문을 숨기기 위해 대대적인 焚書坑儒를 저질렀다고 한다. 정용석은 이성계의 출생지 및 성장지에 대해 이성계는 타타르인이라는 제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 중화부도에서 밝히고 있는 실로 충격적인 上古 高句麗 疆域(강역) 실체圖와 통일신라 疆域圖 및 朝鮮 淸나라 국경. 고구려와 병립했을때 唐의 강역과 고구려를 없애고 소위 통일신라를 건설했을때 唐의 위치와 통일신라의 강역을 비교해 보면 된다.
 
高句麗의 疆域이 이와 같을 때
 
율곤 이중재가 지적하듯이 비로소 三國史記 고구려편에 보이는
 
고구려 24대 양원왕 8년때 장안성에 성을 쌓고(축장안성)
25대 평원왕 28년에 장안성으로 수도를 옮겼다(이도장안성)는 기록이 진실이 될 수 있다. 
 
또 현 중화부도에서 밝히고 있는 상고 고구려 강역 실체도의 시각에서 唐태종과 연개소문에 대한 갓쉰동전의 내용? 즉, 규염객, 장삼랑의 이야기를 들여다 보면 아! 그래서 지금까지의 반도사관으로는 이 이야기의 실체를 이해할 수 없었구나 하고 그 내막을 알 수 있다.Click here!

-사학도는 역사의 사실(史實)들을 연구 발굴함에 있어 지금껏 조명(照明)되지 않던 쪽에 중점을 둘 필요가 있다. 특히 국가나 민족의 기원(起源) 및 왕조(王朝)의 始源 문제에 대해서는 각별한 살핌이 있어야한다고 보여진다. 역사에 있어 국가와 민족의 기원에 대한 사화(史話)나 왕조의 시말(始末)에 대한 기록들에는 다른 분야에서 보다 심각한 조작(造作)이 자의 타의로 수반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가(史家)들이 나름대로의 의미 있는 사관(史觀)을 보고자 한다면 역사 속의 긍정과 부정을 모두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기록에 있어 곡필(曲筆)이 필요에 의해 어떻게 생기었으며 해설 속의 에고이즘 존재 이유도 알게된다. 어쩌면 사가(史家)들이 선행할 의무는 역사서라는 기록물들의 실체를 긍정과 부정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닌 모두를 이해하는 것이어야 할 것으로 보여진다
.
 
필자는 여기서 14C말 이성계(李成桂)란 군벌(軍關)에 의해 시작되는 조선왕조(朝蘇:李民)에 대한 시원(始原)을 새로운 관점에서 제시하고자 한다. 근세(近世)에 해당하는 왕조의 사건이자 인물들이기 때문에 왕조의 개국성격과 인물들에 대한 긍정과 부정에 대해서는 나름대로의 많은 개진(開陳)이 있었기 때문에 이미 밝혀져 있는 내용들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하고자 한다.

단지 이성계란 폭력 군벌이 창건했다는 조선국지(朝解國地)의 始源地와 創國 장소에 중점을 두어 14C말 조선의 개국을 말하고 싶고, 이성계(李成桂) 일족의 고향 땅과 출향지(出椰地)을 기준으로 14C말 이후의 조선역사를 이야기 하고자 한다. 역사의 성격은 연속성을 논하고 싶어하지 토막 토막의 원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토막이라는 부분(部分)은 결국 전체(全體)속에 녹아있기 때문에 역사에 있어 부분과 전체의 유기적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문제와 의문을 해소하는 데 주안점으로 작용한다.

이성계1:
http://blog.naver.com/yepu/80005589460
이성계2:http://blog.naver.com/yepu/80005600522

14C중반 원(元)나라 말기(末期) 역사서에 등장하는 홍건적(紅巾城:홍건군) 봉기의 시작과 활극의 무대는 고려(高麗)의 강역과는 관련이 있어도 한반도와는 관련이 없다. 역사에 있어 疆域이라 하는 지리(地理)는 연극으로 말하면 무대에 해당하기 때문에 지리의 판정은 중요하다. 역사서(배우들과 연극 무대의 각본)에 쓰여진 지리(기후 및 토질 등 땅의 구조)를 모르고서 역사를 논할 수 없고 말할 수도 없다. 그것은 땅에 대한 정보와 확인도 없이 농부가 농사를 지어 품질 좋은 농산물을 미리 생각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다음은 율곤 이중재 홈피에 게재된 李氏 뿌리에 대한 글이다.
참고로 보기로 한다.
-오늘날의 전주이씨(全州李氏) 대종보(大宗譜)에는 新羅의 35대 경덕왕(景德王)때 사공(司空)을 지낸 이한(李翰)을 시조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신라의 35대 경덕왕(景德王 AD. 739~761년)때 사공(司空) 벼슬을 하였던 이한(李翰)이 중국인명대사전(中國人名大辭典)에 실려있다. 중국인명대사전(中國人名大辭典)은 1958년 장여화(藏勵 )가 편저한 중국지명대사전과 맥을 같이 하는 책이다.

이한(李翰)은 신라(新羅)인 으로 신라가 대륙에 있을 때 사관(史官)으로서 사공(司空)의 벼슬을 한 인물이다. 그러기에 중국인명대사전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사실은 신라(新羅)가 대륙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볼 수 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하면 중국인명대사전(中國人名大辭典) 447쪽에는 이한(李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한(李翰)의 아버지는 이화종(李華宗)이다. 李翰은 일찍 문과에 급제하여 사공(司空)의 직급을 받았다. 당(唐)나라 천보(天寶 AD. 742~756년)말 때 방관(房琯)의 벼슬을 했다고 적고 있다. 태어난 곳은 휴양( 陽)이라 했다.

*방관(房琯)은 방관(房官)으로써 동방관(同房官)과 같은 직책으로 향시동고관(鄕試同考官)이다. 향시동고관과 합시동고관(合試同考官)을 겸임하여 시험관의 직급이다.
*사관(史官)은 나라에서 귀중한 자료를 왕명을 받아 기록하고 저술하는 직책을 뜻한다. 죽기 전에는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임무를 수행했다.

*휴양은 하남성(河南省) 상구현(商丘縣)남쪽이다.(중국고금지명대사전)

이한(李翰)의 22세손이 이성계(李成桂)이고 이성계의 父母는 여진(女眞) 사람이다.

그러면 신라 사람의 후손이 여진국에서 태어나는 이유를 설명 하겠다.

이성계(李成桂)가 태어난 곳과 동기는 다음과 같다.

太祖 이성계는 함주(咸州)에서 태어났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 603쪽에는 함주(咸州)를 요(遼)나라가 두었는데 그곳은 함평(咸平)이라고 적고 있다.
함평현(咸平縣)은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통허현(通許縣)이라고 되어있다. 이곳은 금(金)나라 때 地名을 함평로(咸平路)라고 적고있다. 함주(咸州)인 함평(咸平)은 하남성(河南省) 의주(義州)가 있던 급현(汲縣)땅이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아버지는 이인인(李仁人)이며 환조(桓祖)로 되어있다. 이인인(李仁人)이 환조(桓祖)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혈통의 계보로는 태조의 아버지가 환조(桓祖)로 되어있다. 환조의 아버지는 도조(度祖)이며 도조의 아버지는 익조(翼祖)이며 익조의 아버지는 목조(穆祖)라고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공양왕(恭讓王)편과 고려도경(高麗圖經)편에 기록하고 있다.

이성계(李成桂)의 혈통은 여진족(女眞族)이며 여진국(女眞國)은 글란(契丹)과 요(遼)나라때 제후국이었으므로 女眞國의 역사년대표는 누락되어 보이지 않는다.
女眞國이 있었던 곳은 지금의 하남성(河南省)동북부에 있었다. 본시 여진국(女眞國)에서 부장으로 있던 아골타(阿骨打)는 高麗의 스님과 女眞의 여자 몸에서 태어난 사람이며 여진국(女眞國)에서 반란을 일으켜 금(金)나라를 세워 이름을 완안민(完顔旻)이라 하였다.

여기서 글란(契丹)의 뿌리에 대하여 기록해본다.
진(秦)나라가 망한 후 일부 군신(君臣)의 무리는 진한(秦韓)에서 진한(辰韓)으로 갈라져 나가고 일부 군신(君臣)은 말갈(靺鞨)로 떨어져 갔다.

말갈(靺鞨)은 발해(渤海)를 패망시킨 후 글란(契丹)국이 되었다. 글란국은 다시 요(遼)나라가 되어 女眞國을 제후국으로 두었다. 그후 金나라 아골타(阿骨打)는 金나라를 세워 완안민(完顔旻)으로 변신하게 된다.

그러니깐 新羅와 말갈(靺鞨)은 같은 혈통이기에 新羅 사공(司空)이었던 이한(李翰)의 후손은 女眞國에서 남게 되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같은 뿌리의 혈통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성계(李成桂)의 부모가 女眞國의 사람이라 하여 하나도 이상할 것 없는 歷史的인 사실이다.


오늘날의 족보는 상업화의 바람을 타고 많이 변질 되어 가짜 족보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조선 후기부터 시작되었는데 원래 왕족만 가지던 족보가 명문세가를 거쳐 조선후기 평민들의 지위가 상승하면서 명예를 소중히 하던 서민들도 점차 족보를 만들게 되었고 이로부터 많은 성씨 들이 생겨났다. 가짜 족보도 이때부터 생겨났다. 그리고 족보의 상징성은 점차 퇴색해 갔다. 들리는 말로는 조선후기에 너무 많은 족보가 만들어져서 지금 남아있는 대다수의 족보는 거짓이 반정도 썪여 있다고 한다.

요즘은 출세를 하고도 족보가 형편없는 사람들 중 일부가 자녀의 장래를 위해서 일부러 옛날 유명한 집안의 족보에 자신의 조상 이름을 끼워넣는 수법으로 가짜 족보를 생산하고 있다.
현재 중국에 1억명, 우리나라에 약 300만명 정도가 있을것으로 추산되는 이씨는 단일 성씨로는 세계최고 이지만 성씨의 뿌리라는 사실이 어쩌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깨닫게 된다.

끝으로 율곤 이중재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성씨와 본관에 대한 짧은 한마디를 싣고 이 글을 맺는다.

"한국의 경우 족보가 생긴 이래 혈족(血族) 간의 격차는 더욱 심화되어 갔다고 볼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이씨(李氏)나 김씨(金氏) 박씨(朴氏) 장씨(張氏), 조씨(趙氏)등 할 것 없이 모두가 환인씨(桓因氏)에 의해 한일(一)자의 성씨에서 유래된 단일민족이라 할 수 있다. 고로 굳이 같은 본관(本貫) 같은 성씨(姓氏)를 고집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씨족(氏族)간의 李氏니 金氏니 朴氏니 하여 혈족 간에 지나친 경쟁심리를 유발하여 급기야는 상쟁(相爭)의 불씨를 유발하는 요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 말하는 전주(全州)의 위치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287쪽에 全州를 찾아보았다.
全州는 全縣을 참고하라 했으므로 全縣을 살펴보니 漢나라때 영릉현(零陵縣)이라고 기록하고 있었다. 영릉현(零陵縣)을 찾으니 漢나라때 호남성(湖南省) 영주부(永州府)라고 되어있다.

영주부를 중화인민공화국의 분성지도집(分省地圖集)에서 찾아보니 호남성(湖南省) 남쪽에 있었다. 다시 말해 광서성(廣西省)과 호남성 접경지대에 있었는데  현대 지도에는 광서성(廣西省) 북쪽 계림(桂林) 위에 全州가 있다. -위 글은 "이씨의 뿌리역사" 에서 도움 받은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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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종은 수없이 고려사 개찬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고기록의 이성계 고향 함주를 함흥이라 한 것 까지는 좋은데 개경으로 풀이한 개주는 원문에 함주의 서북에 있다 한 모순은 합리화 할 아무런 명분이 없다. 바로 대륙이라는 뜻이다.
출처 :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는 中原의 역사
글쓴이 : 세느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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