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2008. 10. 8. 09:49시와글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이해할 때에 믿음이 생겨납니다.

이 믿음(信)이란 주관적 믿음이 아니며 객관을 통달함으로
일체 현상의 확고 부동한 이치를 철저히 이해하여
무아(無我) 무법(無法)으로서 불이(不二)를 습득하고
평등성지를 이루며
시공을 철저히 관찰함으로써
무상(無常)을 벗어나 항상하고 여여(如如)한
실체로서의 상(想)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이는 나를 두고서 부처를 믿는다거나
불경을 믿고, 또 단상(斷想)을 믿는 주관이 아닌 것입니다.

‘나’라고 함은 과연 무엇을 말함인가?
없는 것에서 생겼다가 사라져버리는 육신인가?

우리의 몸은 음식, 물, 공기, 온도의 공급이 끊어지면
죽어서 흩어지고 윤활히 공급되면 생명을 유지한다.
이것을 본다면 우리의 몸은 그 네 가지의 축적임을 알 수 있다.
음식은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가고
체액은 물에서 섭취되었으니 물로 돌아간다.
그리고 나머지 공기와 체온은 허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 이 네 가지의 집합체에게 움직임을 명령하고 먹이고

버리게 하여 육신의 상태를 유지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는 분명히 ‘나’라고 하는 마음일 것이다.

이 마음은 물질이 아니어서 돌아갈 곳도, 돌아 갈 것도 없다.
돌아갈 곳이나 돌아갈 것이 없으면 오고 감이 없다.
그러니 죽고 남(生死)도 없다.

그러면 이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머리에 있는가?
가슴에 있는가?
아니면 몸 전체에 있는가?

머리는 눈, 코, 귀, 혀, 몸이 감지한 것을 전달 받아서 생각하는 것이므로

마음이 머리에 있는 것은 아니다.
가슴 역시 머리처럼 전달 받는 역할을 한다.
감각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를 이름하여 마음이라 하는 것이지

마지막 결과만을 마음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온몸에 두루 퍼져있는가?
하나의 마음이 온몸에 두루 퍼져 있다면
발가락을 찔리면 온몸이 아파야 할 터인데 발가락만 아프다.
이러하니 마음이 온몸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도 옳지 않다.

그러면 몸이 어디에 있는가를 본다.
나의 몸은 방에 있고
그 방은 동네에 있고
동네는 나라에 있고
나라는 지구에 있고
지구는 허공에 있고
허공에는 별과 달과 해 등 우주가 펼쳐져 있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하며 느끼고 있는 마음은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

우주를 바라보고 있으니 우주밖에 있고
이해 납득하고 있으니 이 마음이 ‘나’란 것은 의심할 바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의 몸은 대상이 된 것이다.
마치 내가 바라보던 세상 모든 것들처럼 남이 된 것이다.

남이란 타물체(他物體), 또는 타물질(他物質)인데 마음과는 어떤 상관이 있는가?

모든 물질은 변해간다.
어느 순간이 대상으로서의 정확한 진면목인가.
잠시라도 정지해 있는 자성(自性)이 없다면 그것은 현상이며

허상과 같고 뜬구름, 그림자, 안개, 풀잎의 이슬, 물위에 뜬 물방울 같은 것이다.

즉 생멸법에 있어서의 현상인 것이다.

이제 ‘나’라고 하는 마음은 어떠한 것인지 되돌아 봐야 한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색도, 크기도 알 수 없다.
분명히 느끼고 표현하는 것을 보니 없는 것은 아니나
절대 있다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있으나 없고, 없으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없는 것이 ‘나’로 이름 지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무아(無我)가 ‘아(我)’가 되는 것이다.
모든 사물을 이 시각에서 본다면 드디어 둘이 없는 것이 된다.
너도 내가 없는 것이 ‘너’이고
나도 내가 없는 것이 ‘나’이니
내가 너이며 네가 곧 내가 된다.
우주 만물과 하나인 사실이 보여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은 둘이 아닌 것이다.

이제 그 하나인 순수 마음체를 알아야 한다.

나는 나의 몸을 키우며 살려가며 사용해왔다.
새도 새의 몸을 관장(管掌)해왔다.
꽃도, 나무도 모두 그렇게 해 오고 있다.
관장하는 마음이 ‘나’이듯이
새도, 꽃도, 나무도, 타인들도 모두 관장하는 이,

주도(主導)하는 이가 ‘그’인 것이다.

또한 ‘나’, ‘아(我)’, ‘그’란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면서 발끝에도 있었다.
이것은 따로 정해진 곳에 존재하지 않으며
공간에 구애됨이 없이 허공을 두루 비행하고 있으니 걸림이 없다.
곧 온 우주 공간과 통해 있는 것이다.

또 ‘나’는 어느 시간 속에 존재 하겠는가?
어제, 오늘, 내일.
과거, 현재, 미래.
죽을 수도 죽일 수도 없는
마음이 어느 시간에 존재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지금은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가면 과거이니
도대체 언제가 지금인가.
시간은 생(生)과 사(死)에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지
생사(生死)와 관련이 없다면 시간의 의미는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시공을 초월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곳, 인간계(人間界)라고 일컬어지는 곳은
물질의 집합체인 몸을 나로 착각한 마음이 만들어 낸
이름의 세계이며
생각 속의 약속인 것이다.

그러니 실제의 생을 살아야 함에도
몸을 나로 착각하여
본성에서 멀어져 그릇된 길을 걷게 되고
이치에서 멀어져 고통 받게 되고
지옥을 자초하기도 한다.

큰 나무는 비를 많이 흡수해야 하며
작은 풀은 조금 흡수해도 된다.
그러나 비가 오지 않으면 모두 사라진다.
그러므로 평등하다.
나무는 재목으로 쓰이고 풀은 약초로 쓰인다.
그래서 평등하다.

인간은 말할 것도 없고 ‘아(我)’를 가지고 주어진 몸을 관장하는 모든 생물은

평등한 ‘진아(眞我)를 가지고 있음이다.

모두가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진 몸이라는 것을
관리하며 유지시키는 ‘성(性)’과
그 몸의 조합물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바로 그 ‘성(性)’을 주인으로 생각하여
영원 불멸한 마음이 ‘나’가 되어
스스로로부터 부여 받은 몸을 고귀하고 위대하게 사용하며 살아가는 것,
그리하여 스스로의 비워져 있던 그릇을 가득히 채우면
그 마음은 넘치게 되어 비로소 타인들에게 깨우침을 환원(還元)하여 주는 것이다.
성인으로의 삶을 사는 것이다.

성인(聖人)이란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든 천상에 있든 어느 곳에 서든
위대한 깨우침을 주는 스승으로 존재하며,
어느 곳에 서든 죽음과 아집(我執)과 교만(驕慢)을 멀리하므로
삶이 안락하고
어떤 것에도 장애(障碍)됨이 없으며
장애 됨이 없으니 대자유(大自由)가 따르고
대자유가 있으니 공포가 사라져 지옥이나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
천상이든 인간계 또는 신선계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대도사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착하고 정직한 이들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