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홍산문화

2009. 7. 24. 21:38역사 자료



*여신묘(女神廟) 유적지
*여신두상(女神頭像):크기가 실물에 접근하는 여신의 두상은 받들어 공양하는 주신(主神)의 하나다. 황색점토로 풀, 곡식줄기로 이겨 만든다. 겉 표면은 광택제 활석으로 문지르고 안면부위는 홍색을 입히고, 입술은 붉게 칠하고, 눈은 담청색을 편을 넣어 눈동자로 삼는다. 이 두상의 윤곽과 전체는 모두 아름답고 양눈은 형형하고 전아(典雅)하고 고귀함을 보여주어 신비로움이 이를 데 없는 상이다.

 




*돼지머리형 옥패(猪首形玉珮):돼지는 당시 주요한 가축의 하나로, 사람들은 돼지를 사람이 죽으면 같이 묻는 배장(陪葬) 대상에서 제외했으며, 장식 제조 또한 돼지를 애용해 주제로 삼았다.
*제비형 도기항아리(燕形陶壺):홍산문화의 도기제조업은 상당히 성숙되어, 공예수준이 높았다. 이 작품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 형상을 생동감 있게 만들어, 시끄럽게 짹짹거리며 어미가 먹여줄 것을 기다리는 어린 제비형상이다. 이는 실용적인 협사(夾砂) 홍도(紅陶) 물동이로 이 역시 제기(祭器)다.




종교적 의의(意義)를 갖는 기(玉器)


홍산(紅山)문화의 옥기는 특별히 그 늦은 시기의 작품이 아주 발달하여, 보통의 취락 유적지조차 정교하고 뛰어난 옥기가 출토된다. 이들 옥기는 구멍이 많이 있으니,  마땅히 이는 패물장식으로,  동물형상과 장식품 등 두 종류가 흔히 보인다. 홍산(紅山)문화 기는 제사 유적지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는데, 이는 그것이 종교적 의미가 많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돼지,용의 형상, 구운형(勾云形)의 장식패옥 등은 비교적 복잡한 옥기로, 상당히 광범위한 범위 안에 있으며, 조형이 서로 일치하고 있는데. 이는 일정한 규격으로 원시 예기(禮器)를 만든 것에 따른 것이다. 특별한 것은 산 정상 중심에 있는 대묘(大墓)의 묘 주인 손에서 옥구(玉龜)가 쥐어진 채 발굴되었는데, 이는 당시 씨족 구성원의 등급분화가 이미 매우 명확하게 드러났음을 설명하는 것으로, 집단 수령이 이미 출현하여 기(玉器)가 특수한 의미로 주어졌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정성이 가득 찬 조소예술


홍산(紅山) 문화 제사 유적지에서 출토된 것으로는 동물들과 인물의 진흙 소상(塑像)이 있는데 이들은 채색그림을 그려 넣은 돼지, 용, 큰 새의 잔체(殘體) 등이다. 그 가운데, 우하량(牛河梁)과 동산취(東山嘴) 제사 유적지 가운데는, 전신 인물 소상(塑像)이 출토되고, 우하량(牛河梁)에서 출토된 가장 큰 인물 소상(塑像)은 실재 사람의 세 배 크기에 근접하는 것으로 추산되어 그 완전한 입상(立像)은 마땅히 4-5M높이에 달한다. 이 인물상은 비록 다수가 손상되어 잔해만 남아 있지만, 건장하고 풍체좋은 허우대, 사지는, 거듭 고박(古朴)하고 조확(粗獷), 순후(淳厚)한 미가 있으니, 가히 이는 대륙에서 가장 이른 인체 조형 예술품으로 추산된다. 홍산(紅山)문화의 진흙 소상(塑像)은, 말할 것 없이 인물 또는 동물로 한결같이 그 비례가 적당하여 가장 높은 예술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대형묘장 시의도(示意圖)
*우하량(牛河梁) 적석총:적석총 건축군은 북쪽으로 여신묘까지 거리가 900미터로, 5기 규모의 거대한 적석총과 1기의 적석제단이 있으며, 동서 한줄로 배열되어 총길이 160미터, 남북 50미터다. 적석총은 방(方)형과 원(圓)형이 있으며, 제단은 3층 정원(正圓)형으로 대소의 구별이 있으며, 일정한 규칙을 두어 일자 배열을 하고, 일도(一道)로 구성해 장려한 경관을 보여준다.우하량 유적지에 있는 이러한 적석총군은 한 군데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우하량이 당시 아주 많은 사회집단으로 말미암아 종교활동의 장소로 제사 등을 거행했음을 보여준다.사진 중앙에 돌로 쌓아 만든 원형 적석총과 왼쪽의 방(方)형 적석총이 보인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진 것을 상징한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제단과 묘장(墓葬)


원방각의 문화는 동이족의 대표적인 문화다. 천원지방의 묘장은 동이족의 문화로 홍산문화는 대표적인 동이족의 문화다. 홍산문화에서는 다양한 옥기가 출토되고 있는데 동이족의 상징인 호시, 석촉, 실크, 옥 중에서 옥기류가 출토되고 있음은 새삼 신기한 것이 아니다. 대륙을 말아먹은 동이족의 상고 문화를 감안하면 대륙 곳곳의 상고문화 유적지에서 기류가 출토되고 있음은 당연한 것이다. 우하량(牛河梁) 유적지 가운데 별도로 눈을 번쩍 깨게 하는 유적지는 섬돌을 쌓아 만든 적석총 한 기다. 이들은 돌로 성채와 담장을 쌓고, 돌로 묘를 쌓았으며, 돌로 정상을 북돋았다. 적석총은 네모형(방형)과 원형 2 종류가 있어, 천원지방(天圓地方)의 관념과 합치한다. 이들 금자탑식의 높고 큰 적석총과 제단은 같지 않은 규격의 묘장이 있어 상호 유기적으로 조성되었다. 이 같은  종교성지 곳곳의 장관은 계층분화된 인상과 흔적을 보여주고 있으며, 방형(方形)제단은 문명시대의 서광이 뻗쳐 옴을 보여준다.  
우하량(牛河梁) 유적지의 묘장은 규모와 부장품의 수량 등에 따라 대, 중, 소 3 종류로 나뉘어, 당시 사회조직 내에 이미 삼엄한 등급차별이 출현했음을 체현하고 있다. 대형 묘(墓)는 왕왕 적석총의 중앙부위에 자리 잡고 있고, 또 묘실면적은 크고, 부장품은 많고 좋다. 중형묘는 그 다음을 차지하고 있고, 소형 묘 역시 그 다음을 차지하고 있다. 대형과 중형묘는 일반적으로 모두 옥기(玉器) 등의 부장품이 있으며, 부장품들의 종류와 배열방식은 농후(濃厚)한 종교색채를 띠고 있다. 소형묘장의 수량은 중다(衆多)한데, 부장품으로는 옥기가 적게 보이고 있으며, 중형묘, 대형묘보다 부장품의 수량이 비교적 적으며, 하나같이 부장품이 없다. 적석총내 대묘의 주인은 사후에 홀로 적석총 중앙에 묻혔으며. 그 생전의 혁혁한 지위와 더불어 서로 저울질했으며, 중형묘의 묘주도 마땅히 당시 사회의 상층성원이었으며, 소형묘에 이르러서는 묘주의 신분이 비교적 복잡하여, 그들은 진귀한 옥저(玉猪), 룡(玉龍) 등의 부장품을 간직하고 있으며, 이들의 지위가 비교적 높음을 드러내고 있으며, 부장품이 하나도 없는 것은 지위가 아주 낮은 것이다. 그러나 총체적으로  보면  신분이 한결같이 대형,중형 묘주에 미치지 못한다. 이러한 금자탑 형식의 등급의 묘장은 진일보된 것임을 설명해 주는데, 홍산(紅山)문화 후기는 말할 것 없이 종교활동 또는 상장(喪葬) 제도가 아닌 것이 없는데, 이 속에는 계층분화의 낙인이 찍혀져 있다.

우하량 유적지에 함께 묻은 풍부한 기(玉器) 부장품&저용(玉猪龍)


*함께 묻은 풍부한 옥기(玉器) 부장품:우하량(牛河梁) 홍산(紅山)문화 유적지 중심 대묘(大墓) 남성 묘주인은 50 수 세. 옥기 7건을 따라 묻었다. 머리 부위에 두 줄기 큰 옥벽(玉璧) 이 놓여 있고, 또 옥환(玉環)과 옥패(玉珮)가 놓여있다. 양 손에 쥔 거북은 묘주인이 종교 영수(領袖)의 신권을 장악했음을 보여준다.
*옥저용(玉猪龍):홍산(紅山)문화의 선주민은 오직 옥기(玉器)만을 함께 묻었으니, 이같이 오직 옥(玉)만을 묻은 매장의 전통은 바로 홍산(紅山)문화 특징 중의 하나이다. 저용(玉猪龍)을 매장한 주인공은 마땅히 신분이 비교적 높은 인물이다.



*동산취(東山嘴) 유적지 조감:동산취 유적지는 지금의 요령(遼寧) 각라심(咯喇沁) 좌익 몽고족 자치현 대성자(大城子) 동남 대릉하(大凌河) 서안에 위치하고 있다. 곧 각좌현(咯左縣) 대성자(大城子) 동남의 대릉하(大凌河) 서안의 한 산구(山丘) 고지상에 있는데 사방은 일망무제의 대평원이다.
*옥거북(玉ꜫ),옥촉(玉钃),*갈고리구름형 패(勾云形玉珮)




요하(遼河)유역의 제사 중심
종교의 전파

홍산(紅山)문화 만기(晩期)에 종교 유적지는 보편적으로 존재하는데, 별도로 중소형의 제사유적지들이 있어, 규모는 우하량(牛河梁)만은 하지 못하나 단, 상호간에 동일한 특징을 갖고 있다. 이들은 모두 제단이 유사한 제사건축 형식을 하고 있다. 즉 원방각의 동이족 형태를 고스란히 띠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 한 가지 주목할만한 사실은 제단 부근에 시체를 묻은 묘장(墓葬)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 유적지 특유의 유물은 제사용 진흙 채도 통형기(筒亨器) 등 특수한 도기(陶器)와 동물류 그릇, 벽(玉璧) 등이다. 최근 발굴된 이런 종류의 유적지는 적게는 3군데 있으며, 그 가운데 동산취(東山嘴)는 중형 유적지에 속하며, 성자산(城子山)과 호두구(胡頭溝)는 소형 유적지에 속한다.

지모신사(地母神社)-동산취(東山嘴)

동산취 유적지는 지금의 요령(遼寧) 각라심(咯喇沁) 좌익 몽고족 자치현 대성자(大城子) 동남 대릉하(大凌河) 서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3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한 면은 하천에 임한 대지(臺地) 상에 건립되어,  건축은 방형(方形)과 원형(圓形)을 주체로 하여 건축한 단상기지(壇狀基址)로 주위에는 겹쳐 쌓은 석괴(石塊)가 있다. 이곳에는 서로 같지 않은 시기의 유적지 터가 존재하고 있는데, 이는 오랫동안 제사활동을 거행한 장소다. 유적지에는 대량의 돼지뼈와 사슴뼈가 있는데, 이는 마땅히 제사에 희생동물로 바쳐진 것이다. 출토된 도자기는 주로 채도 통형기(筒形器)와 채도 쌍복분(雙腹盆) 등 제사에 사용된 특수도자기이며, 또 쌍룡수(雙龍首) 황형(璜形:璜은 瑞玉,벽옥을 두 쪽 낸 것) 장식과 녹송석(綠松石)을 사용해 만든 부엉이(鴞)가 있다. 가장 사람의 주목을 끄는 것은 진흙을 개어 만든 사람 소상(塑像)이 있는데, 그 중에 소형은 머리가 없고 발이 짧은 나체 임신부(孕婦) 입상(立像)이며, 대형인물은 흙덩어리만 약간 남아 받침에 단정히 앉은 반퇴단좌상(盤腿端坐狀)이다. 이들 소상(塑像)은 마땅히 유적지 제사의 주요대상인 지모신(地母神)으로 여겨진다.

홍산문화 선주민의 묘지-성자산(城子山)

성자산(城子山) 유적지는 지금의 요령(遼寧) 능원시(凌源市) 능북향(凌北鄕) 삼관전자(三官甸子)의 서산파(西山坡) 위에 있다. 동북으로 우하량(牛河梁) 유적지와 약 8천미터다. 홍산(紅山)문화 선주민은 일찍이 이곳에서 거주하다가 후에 딴 곳으로 가 묘지가 되었다. 현재 유적지 서남에는 한 기의 원각방(圓角方:원각방은 동이족 고유의 특징, 천부경 참조) 형의 방 터가 있으며, 부근에는 1개 2M로 보이는 사각형(方形)의 석퇴(石堆:언덕)가 있는데, 석장(石牆:돌담장)과 더불어 서로 연관이 있다. 석퇴(石堆:언덕)와 멀지 않은 곳에 일단의 쇄석대(碎石帶)가 있으며, 위에는 파쇄된 밑바닥 없는 통형기(筒形器)의 조각들이 남아있다. 성자산(城子山)의 홍산(紅山)문화 묘장(墓葬)은 공히 3기가 있는데, 한결같이 토광(土壙:흙구덩이) 석곽묘(石槨墓)로, 그 중에서 한 기의 묘갱의 혈(穴)은 비교적 크며, 부장품은 갈고리 구름형 옥장식, 말발굽형 옥고(玉箍:그릇 둘레의 테), 옥조(玉鳥), 옥월(玉鉞:도끼)과 죽절상(竹節狀) 옥장식 안에 9건의 기(玉器)가 있으니, 묘주(墓主)의 신분은 일반적으로 동일하지 않다.

주목할 문화가 <홍산문화>입니다. 이 홍산 문화는 실로 엄청난 문화입니다. 이 문화를 발굴하므로 인해서 중국은 황하중심 문화 전파론을 지양하고 이른 바 '다중심문화론'을 인정하게 되었으며 산동 반도에서 발견되는 북신문화-대문구-용산문화가 바로 이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이론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문화가 바로 고조선 중심지였다고 우리나라에서도 공식화되고 있는 요녕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중국학자 부사년이 주장하였던 이하동서설의 주인공인 夷가 바로 고조선인이거나 그 선조였다는 이론으로까지 확산될 기미가 보이고 있습니다. 또 우리나라 학계의 일부에서도 이 문화를 가지고 고조선이 실제로 기원전 2333 년에 건국이 되었을 가능성을 제기 하기도 하였고 기존의 고조선의 중심이 평양으로 주장하는 학자와 논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이 문화는 또한 환단고기를 중심으로 하여 꾸준히 강단 사학계를 한반도 중심의 식민사관이라고 비판했던 재야사학자들에게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홍산 문화는 황하문명 보다도 빨리 고대 국가를 형성한 유적이 보이며 성곽이나 왕궁터등이 발견되어 고조선이 건국되기 전에 이미 고대국가의 발판을 만들었다는 재야사학자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까지 되었습니다.

환단고기에서 나오는 배달국이 바로 홍산 문화(B.C.4500∼B.C.2500), 더 나아가 홍산 문화의 전신인 흥륭화 문화,신락 문화(B.C.6000∼B.C.5000)를 기반으로 세워졌다는 주장이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라고 매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홍산 문화는 요녕 지역과 내몽고동부 지역에 광범하게 전개된 6천년(B.C.4,000)의 신석기시대중기에 해당하는 2단계 신석기문화로 인식됩니다.

홍산 문화는 앙소 문화의 채도와 이전 단계의 연속 고선문계 토기와 세석기 등을 융합하여 한 단계 발전하여 전개되었는데 후에 이 지역 하가점하층문화에 연결되고 중국 황하유역과 산동 반도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東夷族'의 활?font color=FF001E style=background-color:FFF000;>옥
熾だ?문헌상으로 보면, 하북성 동북부와 산동 일대, 양자강하류 유역 등입니다.

산동 지역에서 가장 앞서는 신석기문화유적은 북신 문화인데, 북신 문화는 7천년 전까지 소급되어지고 황하의 자산, 배리강 문화와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또한 B.C. 4500년경의 이지역 대문구 문화와도 직접적인 연원관계에 있습니다. 대문구문화는 하남성 서쪽의 앙소 문화와 대비되는 문화로써 東夷系 문화로 추정되고 있고 이후의 용산문화에 연결됩니다.

홍산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석묘계(石墓系) 돌무덤입니다. 돌을 쌓아 묘실을 구성하는 적석총(積石塚-돌무지무덤)과 돌 판을 잘라 묘실 벽을 짜는 석관묘(石棺墓-돌널무덤)가 대능하상류 역 요녕성 우하량 유적에서 발굴되었습니다.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시하게 여기는 분야가 묘장법인데 죽은 사람을 장례 치르는 의식이야말로 오랜 기간 변하지 않는 그 민족 고유의 전통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경우 은 이전에는 땅을 파서 묘실을 만들고 시신과 유물을 안장하는 토광묘가 유행하고 있고 주대(周代)에 들어와서야 나무로 곽을 짜서 묘실을 만드는 목관묘가 유행합니다.

역사상에서 홍산 문화와 동일한 석묘계의 묘장법을 채용하고 있는 나라가 고조선이므로 고조선의 전 단계인 홍산 문화는 고조선의 선조들이 이룩한 문화로 보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이 그래서 힘을 얻고 있는 것입니다. 돌을 이용하여 구조물을 축조하는 방식이 고조선이후 부여, 고구려에도 계속하여 전승되는 고유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중국의 고전이나 사서에 나오는 황제헌원과 대결을 벌였던 치우의 세력근거지로도 지적이 되기도 하는데 황제헌원과 결전을 벌이며 하북과 산동 일대를 개척하여 청구국을 세웠다는 기록은 [사기]에 더 자세히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홍산 문화 이후 하가점 하층문화(B.C.2000∼B.C.1300)가 그 지역에 보다 광범하게 확산되어 등장하는데 홍산 문화는 하가점하층문화로 이어졌고 하가점하층 문화는 바로 고조선의 문화였다는 주장으로 이어졌습니다. 홍산(紅山) 문화는 소하연(小河沿) 문화를 거쳐 하가점하층 문화로 연결된다는 것은 중국학계에서 거의 공식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소하연 문화에 이어지는 하가점하층 문화, 구체적으로 풍하(豊下)문화에서 고조선의 건국연대보다 조금 앞서는 서기전 2천4백년 경으로 보이는 청동기 유적이 발굴되었는데 출토된 유물을 보면 화살촉, 칼, 창 등도 발굴되어 기원 전 2333년에 고조선이 건국되었다는 기록의 신빙성을 높여주고 있습니다.
이 요동, 요서 일대에 발굴된 이 청동기 유물은 황하유역에서 발굴되는 청동기 유물보다 연대가 훨씬 빨라 중국동부지역에 발견되는 청동기에도 상당한 영향 을 주었을 것으로 예상되기까지 합니다.

이 홍산 문화의 발견은 우리나라와 중국의 고대역사를 다시 써야 할 정도로 파장이 실로 큽니다. 중국의 학자들은 지금까지 중국의 앙소 문화와 대비되는 문화로 대문구 문화와 용산 문화로 보았었는데 홍산 문화를 발견한 이후로 이 대문구 문화와 용산 문화의 주인공으로 홍산 문화를 들고 있습니다.

즉 홍산 문화의 주인공을 고조선이나 그 선조로 파악하였을 경우에는 중국의 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하북, 산동 등지의 동이족이 한민족의 선조였다는 근거가 됩니다. 또한 북신 문화-대문구 문화-용산 문화-악석 문화로 이어지는 산동 문화와 흥륭화 문화, 신락 문화-홍산 문화-하가점하층 문화(풍하문화)로 이어지는 요령문화의 주인공이 한민족의 선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국의 학자들도 산동 문화의 주인공인 동이족이 동북에서 기원하였다고 주장을 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느 민족이었나를 밝히기를 꺼려하고 전백찬같은 중국학자의 일부가 사적 상에 보이는 辰國(고조선?)이 동이족의 중심지였다고 주장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과연 홍산 문화는 고조선인의 선조가 일으킨 문명일까?

분명한 것은 중국학계에서도 은나라 때까지 화하 족이 하북 성과 산동 성을 넘어오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홍산 문화의 주인공이 동이족이라는 것은 중국학계가 인정하는 것인데 중요한 것은 그 동이족이 과연 고조선인이냐하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학계에서도 고조선의 중심을 예전의 평양에서 요서, 요동 등 요녕으로 보고 있습니다. 한민족의 기원도 그곳에서 발생하여 한반도로 이주를 해왔다는 이론이 점차로 신빙성을 더해 가고 있기 때문에 홍산 문화의 주인공 나아가서 중국의 문화의 중요한 획을 그었던 세력이 누구냐 하는 중요한 기로에 서있게 되었습니다. 이 홍산문화의 주인공이 누구냐 하는 것을 떠나서 분명한 것은 이 문화가 고조선을 건국하는데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입니다.

1.B.C.6000~B.C.5000 황하유역(화하족) - 자산문화,배리강문화
산?font color=FF001E style=background-color:FFF000;>옥熾?동이족) - 북신문화
요녕지역(동이족) - 흥륭화문화,신락문화
2.B.C.4500∼B.C.2500 황하유역(화하족) - 앙소문화
산?font color=FF001E style=background-color:FFF000;>옥熾?동이족) - 대문구문화
요녕지역(동이족) - 홍산문화
3.B.C.2000∼B.C.1300 황하유역(화하족) - 이리두문화
산?font color=FF001E style=background-color:FFF000;>옥熾?동이족) - 용산문화
요녕지역(동이족) - 하가점하층문화 -

중국 작가협회 회원이자 소주(蘇州)시 산문학회 부회장 겸 강소성 곤산(昆山)시 문화국 부국장 진익(陳益)은 치우의 정체에 대해 중국인의 선조는 치우이고 치우의 선조는 바로 오월(吳越)의 조상이라 말한다. 오월은 임혜상이 바로 동이족이라 한 것과 일치한다.

그는 사료에 흔적만 겨우 보이는 희미, 모호한  하(夏) 이전의 시대를 만장(漫長:뭐가 뭔지 모르는 시대) 시대라 하고, 중국의 역사가 3황이니 5제니 하여 역사를 덮어버렸으나, 오월문화는 세세대대 (양자강)강남의 땅에 토착한 사람들이니, 그들이 곧 오월의 조상, 선조라 말한다.-

 



*여인이 앉아 있는 모습의 도기소상 일부(陶塑女坐像局部):이 상(像)은 대략 실제 사람 크기의 3분지 1 크기이다. 받침대위에 무릎을 정좌한 자세로 공양해 받들어진 신상(神像)을 표현한 것이다.
*홍산문화(紅山文化) 통형기(筒形器):이런 종류의 통형기는 가운데 구멍이 있고 밑바닥이 없으니, 이는 단지 우하량(牛河梁) 홍산문화 적석총 위에 대량으로 출토된 것이다. 이는 마땅히 전적으로 적석총 매장을 위해 만들어져 설치된 특별한 종류의 그릇이다.
*동북지구 신석기시대 기 출토 지점 분포도

 

삼국유사 정덕본(正德本, 1512)의

석유환국(昔有桓國, "아득히 먼 옛날 환국이 

있었다")기사와 홍산문화(紅山文化)...,

 

   현재의 요하(遼河) 유역 인근에 해당되며 적봉(赤峰)시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2차세계 대전 이후에 엄청난 고대 유적이 발견되기 시작했고 이 유적을 "홍산문화(紅山文化)"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유적은 동아시아 일대에서 발견된 그 어떤 선사시대(?)유적과 비교를 하여도 매우 앞선 시대의 것이고, 심지어는 매우 큰 규모의 원시적 성곽형태 유적이 남아 있는 것과 같이 국가(國家)체계를 갖추기 시작하는 초기단계의 모습을 보이고도 있다고 한다.

  이 유적과 동 시대 또는 이후 시대의 유적을 비교한다면, 황하유역이나 양자강 유역의 어떤 문화와 비교하여도 매우 앞선 시기의 선진적 문화이었음을 부인 할 수 없는 것은 전문가가 아니라도 쉽게 알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현재 이 지역을 영토로 하고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은 지금 아주 당연(?)하게도, 이 문화는 자국의 문화이며 자국의 역사라고 서슴없이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역사적 서술을 위한 것이 동북공정을 넘어서는 "탐원공정(探源工程)"이라고 그들은 애기를 하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은 홍산문화 유적과 동 시대 또는 이후 시대 유물ㆍ유적과의 비교를 통해  이 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이 어떤 신석기 문명이었고 이 문화의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이 어떤 문화이었는가 하는 것일 것이다.

 

  유물ㆍ유적을 통해 비교 해 본다면, 중화인민공화국이 주장하는 것처럼 스스로를 중화(中華)민족이요 그 시원이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하상은주(夏商殷周)로 이어지는 황하유역의 역사보다는, 옛 조선[古朝鮮] - 부여 등의 열국(列國) - 고(구)려/백제/신라(후 고(구)려라고 할 수 있는 발해 및 통일신라 포함) - 고려 - (근세)조선 -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우리의 문화에 더욱 가까운 문화가 바로 홍산 문화인 것이다.

 

   그리고, 문헌적 근거로도 또한 이와 같음이 너무도 명명백백하다. 삼국유사에  "석유환국(昔有桓國)"이라는 기사가 정덕본(正德本:1512년)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반면 "석유환인(昔有桓因)"이라는 기사가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인쇄하여 배포하였던 영인본에 기록(엄밀하게는 조작임)되어 있어서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우리 역사왜곡의 한 단면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그 기사를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고 우리는 알고 있다.


 ㅇ 위서(魏書)에 이르기를 “지나간 2천 년 전에 단군(壇君) 왕검(王儉)이라는 이가 있어 도읍을 아사달(阿斯達)에 정하고 나라를 창건하여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하니 요(堯)와 같은 시대이다”라고 하였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옛날 환인(桓因)의 지차 아들 환웅(桓雄)이라는 이가 있어 늘 천하에 뜻을 두어 인간세상을 욕심내었다. …<중략>… 환웅은 무리 3천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 꼭대기 신단수 아래 내려와 그 곳을 신시(神市)라 이르니 …<중략>… 때마침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있어 같은 굴에 살면서 항상 신령스러운 환웅에게 기원하기를, 사람으로 진화하고 싶다고 하였다. …<중략>… 3․7일을 조심하니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호랑이는 조심하지 않아 사람의 몸이 되지를 못하였다. …<중략>… 환웅은 잠시 사람으로 변화하여 그녀와 혼인하여 아들을 낳아 이름을 단군(壇君) 왕검(王儉)이라 하였다.

     그는 당요(唐堯)가 제위에 오른 지 50년인 경인(庚寅)에 평양성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일컬었다.<이하 생략> ” <三國遺事 券一 奇異 古朝鮮條>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조선일보의 문화부 기자였던 고(故) 서희건(徐熙乾)씨의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고려원, 1986)”라는 책에서 아주 흥미롭고도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과거 일본이 대한제국을 불법 강점하고 나서 조선 총독부는 “조선사 편수회(朝鮮史 編修會, 1925년 6월 (일본천황)칙령 제218호 '조선사편수회관제'(朝鮮史編修會官制)에 근거)”를 만들고 우리의 나라의 역사를 철저히 왜곡한 일이 있었다. 당시 여기에 참석하였던 한국인으로는 을사오적을 포함한 친일파로 “이완용(李完用)·박영효(朴泳孝)·권중현(權重顯)”등이 있었으며, 학자로서는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이 참가하고, 광복후 우리나라 역사학계의 태두라고 일컬어 졌으며 이완용의 가까운 친척(조카뻘)으로 알려져 있던 “두계(斗溪) 이병도(李丙燾)”(1896~1991)도 수사관보(修史官補)로 참여를 하게 된다.

 

   한편, 여기서 우리는 삼국유사에 아주 사소해 보이지만 매우 심각한 왜곡이 있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즉, 고 서희건씨의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①” p.33에 보면 육당 선생이 조선사 편수회에 참석을 하였다가, 고조선(古朝鮮)의 역사를 일본의 관변 사학자 금서룡(今西龍:1875~1931)이 왜곡한 것에 분노하여 항의하는 것이 조선사 편수회 회의록(제6회 회의)에 기록되어 있다. 그 핵심은 금서룡이 만든 삼국유사의 영인본(影印本)과 그 저본(底本)인 정덕본(正德本:1512년, 경주부윤 이계복(李繼福) 중간, 서울대 도서관 소장)에 그 차이가 분명히 나타나 있다. 즉, 정덕본의 “석유환국(昔有桓國)”을 “석유환인(昔有桓因)”으로 조작하여 경도제대 영인본(京都帝大 影印本)으로 각계에 배포한 것이다.

   실제로 금서룡의 영인본과 정덕본의 차이는 국(國)자와 인(因)자 한 글자 차이이다. 그러나, 흔히 환인(桓因)이라 하여 하느님 또는 천제(天帝)의 의미를 갖는 막연한 사람 또는 신격(神格)의 존재와 환국(桓國)이 갖는 의미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즉, 요하(遼河)유역의 홍산(紅山)문화 유적과도 고고학적으로 일맥상통하게 되는 “아득히 먼 옛날 환국(桓國)이 있었다.”라는 역사적 기록과 “아득히 먼 옛날 환인(이라고 불리던 막연한 신화적인 존재)이 있었다.”는 역사적 왜곡은 그 근본 출발부터가 다른 것이다.

 

  잠깐 개인적인 생각을 말하자면, 과거 1980년대 2차세계대전의 장본인인 소화 천황의 20세기 초반 일본제국주의의 대한제국 불법 강점 및 식민지배에 대한 역사적 반성과 함께 "20세기 초반 불행한 역사에 대한 통석(痛惜)의 념(念)"을 금치 못 함과 함께...., "6~7세기 백제국(百濟國)의 도움으로 일본이 건국되었다"는 언급을 하였고 그의 아들인 현 일본 국왕은 "일본 왕가의 혈통속에는 백제 무령왕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언급하고 현 일본 국왕의 당숙이 "무령왕릉을 백제 멸망후 어언 1,300여년만에 찾아와 참배하고 최고의 예물를 바치고 돌아가면서 일본서기에 기록된 "백촌강 전투에서 패하고..., 백제가 멸망함에..., 어찌 조상을 다시 찾아 조상의 무덤을 돌 볼 것이며..., 어찌 고국을 고국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인가"라는 백제망국의 비통함을 그대로 애절하게 기록했던 것과 같이 조상의 묘를 어언 1,300여년간 찾지 못했던 백제 망국의 한(恨)을 달래야만 했던 또 다른 가슴아픈 사연도 있었지만, 일본이 제국주의적 망상에 사로잡혀서 과거 20세기 초반 자신들의 역사의 초라한 출발을 숨기고, 자신들 조상(祖上)의 뿌리가 되는 나라를 무력으로 불법 강점하고는 스스로의 자기 모순과 열등감과 식민통치의 편의성을 위해서 우리의 역사를 깍아 내리고, 훼손하였던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일터이니...,

  무려 20여만권의 고서(古書), 고지도 등을 불태웠음을 물론, 심지어는 무수한 "명산(名山)에 민족의 정기를 끊어 놓는다" 하여 쇠말둑까지 박아 놓는 어처구니 없는 일 들을 벌였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이니 영인본(影印本)을 만들어 새로이 인쇄를 하면서 글짜 한자를 국(國)에서 인(因)으로 바꾸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었을 것이며, 어찌 역사의 교훈을 알고 이를 거울로 삼아야 할 역사학자로서의 양심을 갖고서  학문을 연구해야 한다는 학자로서의 본분과 학문적 양심의 외침이 그 들에게 들렸을리 있을 것이며, "곡학아세"를 통한 일신의 영달과 대일본제국 천황폐하에 대한 황국신민으로서의 충성스러운 행동보다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하였을까 ?

 

  그러나, 역사가 주는 교훈은 너무도 명백한 것이며, 역사라는 커다란 물줄기 앞에서 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은 너무도 왜소해 지는 것인데.., 어찌 하늘을 손바닥으로 가리고서 천하를 다 가렸다고 생각할 것인가 ?

 

 먼 훗날, 손으로 하늘을 가리고 천하를 다 가렸다고 주장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과연 후세의 역사는 그리고 역사가들은 어떻게 기록할 것이며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 또한,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 과거의 금서룡 등과 같이 스스로 부끄러워하지도 역사를 두려워하지도 않는다면 진정으로 역사를 알고 역사를 연구했던 학자들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 스스로가 역사 앞에서 겸손해져야 하는 것이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의 기본적 자세가 아닐런지 ?

 

  만일,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옛 조선의 역사나 고구려의 역사 또는 홍산 문화 등과 관련되어 역사를 연구하는 이 들도 스스로의 학문적 양심에 따른 연구가 아니고, 이념적(理念的) 또는 자신의 출신과 관련된 민족적(民族的) 관계에 의해 스스로의 연구를 곡학아세로 만들거나.., 하늘을 손으로 가리는 일들로 만들게 된다면 이 또한 먼 훗날 역사에서는 웃음거리 밖에 되지는 않을런지 ?  

 

 ※ 참고 - 홍산문화와 한국고대사와의 연관관계를 연구한 서적으로는 현재 선문대학교 교수이며 1990년대 한국정신문화원 자료조사실장 겸 역사연구실 교수였던 이형구(李亨求) 교수의 『한국고대문화의 기원(도서출판 까치, 1991)』[신석기시대-“발해문명의 여명”(3. 빗살무늬토기문화의 발생, 4.고인돌의 시원, 5.고인돌 문화, 6. 용(龍) 신앙의 탄생, 7. 지모신의 숭상, 8.갑골문화와 점복신앙, 9.토기 문자, 10.동방의 예악, pp76~pp124)]에도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한편 이승휴의 제왕운기를 보게 되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ㅇ 요동(遼東)에 별천지가 있으니 중조(中朝=역대 중국왕조)와는 뚜렷이 구분되며, …<중략>… 제석(帝釋)의 손자 이름은 단군(檀君)일세 …<중략>… 이름을 단군이라 하여 조선의 땅에 살면서 왕이 되었다. 이런 까닭에 시라(尸羅=신라)․고례(高禮=고(구)려)․남북옥저(南北沃沮)․동북부여(東北扶餘)․예(穢)․맥(貊)은 모두 단군의 자손인 것이다. …<중략>… 요제(堯帝)와 같은 해 무진(戊辰)년에 나라를 세워<이하 생략>


 한편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는 “요동(遼東)에 별천지가 있으니(遼東別有 一乾坤)”이라고 하여서, 황하 유역 중심의 중국과는 별개의 독립된 또 다른 하나의 천하(天下=乾坤)가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또한 단군을 제석(帝釋=上帝=天帝)의 손자로 함으로써, 고(구)려․부여 계통의 천손(天孫)의식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 단군조선 이후에 나타났던 여러 국가들[북부여․동부여, 예․맥, 남․북옥저, 고(구)려, 신라 등]이 모두 단군의 자손이라고 하여, 우리의 역사가 천손(天孫)의식을 갖는 독립된 천하관(天下觀)을 갖고 “아득히 먼 옛날(=환인의 나라인 환국)로부터 옛 조선[古朝鮮]-고(구)려․신라․부여․옥저 등의 열국 및 3국 시대(고구려․백제․신라) - 발해․신라 - 고려왕조 - 조선왕조”로 이어진 역사임을 일목요연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출처 : 박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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