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 檀君世紀 근거 前期 古朝鮮 2096年의 歷史 (Kochosun dynasty chronicle by Dangunsegi)
2010. 9. 13. 11:11ㆍ역사 자료
댓수 | 명칭 | 즉위년도 (BCE) | 역사적 주요사건 | 비고 |
제1대 | 검(儉) | 2333 | 14세에 檀國의 裨王에 오르다. 아사달에 도읍을 세우다. | 2441년 三韓으로 나누어 통치 |
2284년에 홍수가 크게나서 팽우에게 치수를 명하여 평정하다. | 堯시대 홍수, 노아방주시기 일치 | |||
아들 부루를 禹에게 파견하여 황하치수<塗山會盟>을 주재 시키다. | 舜에게 五行治水法 전수 | |||
辰韓(단군직통,12국), 弁韓(좌현왕,12국,만주북), 馬韓(우현왕,54국 한반도와 북부) | 각 수도는 왕검성이라함. | |||
제2대 | 부루(扶婁) | 2240 | 백성의 머리를 땋게하고 푸른옷을 입게하다. 도량형을 통일 | |
2231년 밭을 나누어 주고 밭문서를 만들다. | ||||
2229년 신지 貴己가 七回歷과 丘井圖를 만들어 바쳤다. | ||||
대륙을 9지역으로 나누어 통치 九黎分政을 실시 | 舜을 시킴. | |||
제3대 | 가륵(嘉勒) | 2182 | 2181년 乙普勒에게 가림토 38자를 만들게하다. | 이전 배달국 鹿圖文字(眞書) |
2177년 列陽의 욕살 색정을 弱水로 옮겨 拘禁하고 후에 흉노의 始祖가 되게하다. | ||||
2173년 豆只州 예읍이 반란하여 추장 素尸毛犁를 참수하다. | 소시모리=牛首國 | |||
그 후손중 陝野奴가 바다로 도망 三道에 웅거하여 천황이라 자처함. | 倭 | |||
제4대 | 오사구(烏斯丘) | 2137 | 동생 烏斯達을 蒙古里汗으로 봉하다. | |
2133년 夏나라에서 方物을 바치고 神書를 구해가다. | ||||
2119년 夏임금 相이 덕을 잃자 息達에게 命하여 3부 병력으로 정벌하다. | 3부- 藍,辰,弁 | |||
相의 後王 小康이 사신을 보내와 신년하례를 올리다. | ||||
제5대 | 구을(丘乙) | 2099 | 2098년 메뚜기 피해가 극심하여 제를 올리니 몇일만에 없어졌다.. | |
2096년 처음으로 60갑자를 사용하여 책력을 만들었다. | ||||
2084년 南巡中 松壤에 이르러 병을 얻어 붕어하여 大博山에 장사지내다. | 송양은 平壤 推定 | |||
제6대 | 달문(達門) | 2083 | 2049년 모든 汗들은 常春에 모이게하여 구월산에서 삼신제를 지내게하고 , 神誌 | |
發理에게 誓滧詞를 짓게하다. | ||||
제7대 | 한율(翰栗) | 2047 | 태평성대 였는지 특별한 일들이 기록되어 있지않다. | 羊加 |
제8대 | 우서한( 烏斯含) | 1993 | 1993년 수확의 1/20을 세금으로 내게하는 法을 정하여 널리 쓰이게 하다. | |
1990년 단제가 옷을 바꿔 입으시고 夏나라의 정세를 살핀후 官制를 크게 바꾸다. | ||||
1987년 세 발 달린 까마귀가 궁궐안으로 들어왔는데 날개 넓이가 석자나 되었다. | ||||
제9대 | 아술(阿述) | 1985 | 1984년 靑海褥薩 于捉이 궁성을 침범, 단제가 피신 후 于支와 于栗에게 命하여 토벌하다. | 3년뒤에 환도 |
제10대 | 노을(魯乙) | 1950 | 가축 이외의 큰 동물 우리를 만들어 기르다. | |
1946년 궁문밖에 伸寃木을 설치하여 백성의 소청을 듣다. | ||||
1935년 天河에서 거북이가 윷판과 같은 그림을 지고 나타나다. 또 渤海 연안에서 | ||||
금덩이가 13섬이나 나왔다. | ||||
1916년 처음으로 監星을 두었다. | 천문대를 말함. | |||
제11대 | 도해(道奚) | 1891 | 五加에 명을 내려 명산에 國仙 蘇塗를 설치케하다. 겨울 大始殿을 세우도록 장려하다. | 박달나무로 桓雄像을 모시다. |
1864년 사방 珍貴한 것을 모아 展示하다. | ||||
1854년 選士 20명을 夏나라로 보내 나라의 가르침을 보내 威勢를 보였다. | ||||
1846년 松花江 기슭에 관청을 세워 배와 관계되는 물건이 크게 세상에 퍼졌다. | ||||
제12대 | 아한(阿漢) | 1834 | 1833년 외뿔가진 짐승이 송화강 북에 나타나다. | 牛加 |
순행하여 요하 남쪽에 巡狩管境碑를 세우다. | 歷代 檀帝의 이름 銘 碑石. | |||
1806년 菁莪 욕살 丕信, 서옥저 욕살 高士琛 ,맥성 욕살 突蓋를 봉하여 王으로 삼다. | 좌현왕, 우현왕 | |||
제13대 | 흘달(屹達) | 1782 | 1767년 州와 縣을 나누어 정하고 직책의 한계를 정하다. | 牛加 |
殷나라가 夏나라를 정벌하니 夏나라 桀王을 구원하였다. 단제가 邑借 末良으로 | 사기 殷本紀에도 나옴. | |||
九韓의 군대로 돕게하니 殷 湯王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다. | ||||
夏의 桀王이 조약을 깨려하자 殷과 함께 神誌 于亮을 파견하여 하나라 桀王을 | ||||
樂浪과 합쳐 關中의 邠, 岐에 웅거하여 관청을 설치하다. | ||||
1763년 蘇塗를 많이 설치하고 天地花를 심었다. | ||||
1733년 五星이 모여들고 누런 학이 날아와 소나무에 깃들었다. | ||||
제14대 | 고불(古弗) | 1721 | 1716년 큰 가뭄이 들어 기우제를 지내니 비가 수천리에 삼대 처럼 내렸다. | 牛加 |
1680년 오색의 큰 닭 봉황이 城東 자촌의 집에서 태어나다. | ||||
1666년 호구조사를 하니 인구가 1억8천만인 이었다. | ||||
제15대 | 대음(代音) | 1661 | 殷나라왕 少甲이 사신을 보내 화친을 구하였다. 1/80의 세법을 정하였다. | |
1660년 홍수가 크게일어났다. 곡식을 滄海蛇水의 땅으로 옮기다. | ||||
1652년 단제가 서쪽 弱水로 가서 신지 于粟에게 명하여 金鐵 및 膏油를 채취하도록 했다. | 膏油는 石油이다. | |||
가을 7월 우루국 사람 20인이 투항해 鹽水 근처에 정착하도록 하다. | ||||
1634년 태백산에 歷代王의 공적비를 세우다. | ||||
제16대 | 위나(尉那) | 1610 | 1583년 구한의 여러 한들을 영고탑에 모이게하여 三神上帝에게 제사 지내다. | 愛桓의 노래를 부르다. |
제17대 | 여을(余乙) | 1552 | 1501년 蓋斯城에 이르러 푸른 도포의 노인에게 하례하다. | |
제18대 | 동엄(冬奄) | 1484 | 1465년 支白特 사람이 와서 특산물을 바치다. | |
제19대 | 구모소(緱牟蘇) | 1435 | 1412년 남장인이 벼슬을 얻어 조정에 들어왔다. | 南裳=南掌 ?=운남성부근 |
1436년 支離叔이 周天歷과 八卦相重論을 짓다. | ||||
제20대 | 고홀(固忽) | 1380 | 1370년 가을 하얀 태양이 무지개를 뚫다. | 牛加 |
1345년 영고탑을 改築하고 別宮을 지었다. | ||||
1341년 公工인 工忽이 九韓의 지도를 만들어 바쳤다. | ||||
제21대 | 소태(蘇台) | 1337 | 殷나라왕 少乙이 사신을 보내 貢物을 바쳤다. | |
1291년 殷王 武丁이 鬼方을 쳐 이긴후 索度 令支국등을 침공하였으나 조선에게 대패하다. | 殷, 화해 請하며 조공하다. | |||
1289년 褥薩 고등이 鬼方을 멸망시키니 一群, 양운국 사신이 조공하다. | ||||
高登이 우현왕 임명을 청하니 마지못해 수락하고 豆莫婁라 하다. | ||||
1286년 우현왕 고등이 죽으니 손자 색불루가 우현왕이 되다. | 단군 1048년간 마침. | |||
제22대 | 색불루(索弗婁) | 1285 | 우현왕 索弗婁가 부여의 新宮에서 玉冊등 國寶를 받고 즉위하다 | 후계자 徐于餘는 庶人으로 되다. |
伯夷와 叔齊도 孤竹君 子孫으로 나라를 버리고 東海 해변가에 살다. | ||||
1285년 鹿山을 개축하고 官制를 改定하다. | ||||
9월 장당경으로 행차 廟를 세우고 高登王의 제사를 지내다 | ||||
11월 九韓의 군사를 이끌고 殷나라 서울을 격파하고 화친 후 또 다시 대승하다. | ||||
1284년 2월 黃河 周邊에서 殷으로부터 승전축하를 받고 弁韓 백성을 淮垈 땅으로 옮겨 | ||||
살게하다. | ||||
1280년 神誌 陸右가 遷都하길 청 하다. | 아사달->영고탑 | |||
1266년 강성한 藍國이 남으로 이동하여 殷 땅과 가까웠다. 여파달로 하여금 분병하여 | ||||
진격하여 岐에 웅거하면서 나라를 세워 黎라하였고 멀리 恒山에 이르게 하였다. | ||||
1250년 申督이 군사를 믿고 亂을 일으켜 단제가 영고탑으로 被하다. | ||||
제23대 | 아홀(阿忽) | 1237 | 固弗加에게 명하여 樂浪忽을 통치하도록 하고,雄乫孫을 보내 藍國의 왕이 殷에 六邑을 | |
설치 감독하다. | ||||
7월 申督을 誅殺하다. | ||||
1236년 藍國王 금달외 2王이 몽고리군과 합쳐 은나라 淮垈땅을 평정하다. | ||||
蒲古-淹, 寧古 -徐, 邦古 -淮에 임명하다. | ||||
1235년 二韓 및 五加를 불러 영고탑 천도 논의 중지시키다. | ||||
제24대 | 연나(延那) | 1161 | 皇叔 古佛加를 섭정으로 삼다. | |
1160년 여러 汗들이 朝書를 받고 蘇塗를 증설하다. | ||||
제25대 | 솔나(率那) | 1150 | 1114년 箕子가 西華에 있으면서 사신의 인사도 謝絶하였다. | 箕子가 西華에 살다. |
1104년 上蘇塗에 머물면서 의례를 강론하시다 侫臣과 直臣의 구분을 묻다. | ||||
1092년 풍년이 들어 한 줄기에 다섯 이삭의 조가 있었다. | ||||
제26대 | 추로(鄒魯) | 1062 | 가을 7월 백악산 계곡에 흰사슴 200여 마리가 와서 뛰어 놀다. | |
제27대 | 두밀(豆密) | 997 | 天海에 물이넘쳐 阿蘭山이 무너졌다. | |
큰 가뭄 뒤끝에 큰비가 내려 수확이 없으먀 구휼하다. | ||||
제28대 | 해모(奚牟) | 971 | 961년 태풍이 크게일어 폭우가 내리더니 땅위로 물고기가 쏟아졌다. | |
954년 氷海의 뭇 汗들이 사신을 보내 공물 하였다. | ||||
제29대 | 마휴(摩休) | 943 | 周나라 사람이 공물을 바쳤다. | |
936년 여름에 지진이 있었다. | ||||
935년 南海의 潮水가 3척이나 물러갔다. | ||||
제30대 | 내휴(奈休) | 909 | 西로 淹督忽에 이르러 제후국 여러 汗들과 만난후 병사를 査閱하고 周사람과 수교 맺다. | 周와 修交 |
905년 흉노가 공물을 바쳤다. | ||||
제31대 | 등올(登屼) | 874 | 859년 봉황이 백악에서 울고 기린이 와서 上苑에서 노닐었다. | |
제32대 | 추밀(鄒密) | 849 | 847년 鮮卑山의 추장 們古가 공물을 바쳤다. | |
838년 楚나라 大夫 李文起가 조정에 들어와 벼슬을 했다. | 楚나라 李文起 | |||
837년 3월에 일식이 있었다. | ||||
835년 크게 흉작이 들었다. | ||||
제33대 | 감물(甘勿) | 819 | 818년 周나라 사람이 와서 호랑이와 코끼리 가죽을 바쳤다. | |
813년 영고탑 서문 甘勿山 밑에 三聖祠를 세우고 친히 제사를 올리다. | ||||
제34대 | 오루문(奧婁門) | 795 | 오곡이 풍성히 익고 도里歌를 지어 불렀다. | |
786년 두개의 해가 나란히 뜨더니 누런 안개가 사방에 그득했다. | ||||
제35대 | 사벌(沙伐) | 772 | 767년 메뚜기의 피해와 홍수가 있었다. | |
759년 범이 宮殿으로 들어왔다. | ||||
748년 큰비가 내려 산이 무너져 내리니 골짜기를 메웠다. | ||||
723년 장군 彦波弗哈을 보내 바다의 熊襲을 평정하였다. | ||||
707년 祖乙을 파견하여 바로 燕나라 서울을 돌파하고 齊나라 군사와 臨淄의 南 교외에서 | 산동 제나라 平定 | |||
승리하였다. | ||||
제36대 | 매륵(買勒) | 704 | 677년 지진과 해일이 있었다. | |
673년 西村의 백성집에서 다리가 8개달린 송아지를 낳았다. | ||||
670년 龍馬가 天河에서 나왔는데 별무늬가 있었다. | ||||
667년 陝野候, 裵幋命을 보내 바다를 평정하였다. | ||||
653년 須臾의 군대와 燕나라 정벌. 齊나라 燕을 구원키위해 孤竹에 침공하였으나 패함 | ||||
제37대 | 마물(麻勿) | 646 | 591년 南巡中 淇水에 이르러 崩御 | |
제38대 | 다물(多勿) | 590 | 특별한 일들이 기록되어 있지않다. | |
제39대 | 두홀(豆忽) | 545 | 특별한 일들이 기록되어 있지않다. | |
제40대 | 달음(達音) | 509 | 특별한 일들이 기록되어 있지않다. | |
제41대 | 음차(音次) | 491 | 특별한 일들이 기록되어 있지않다. | |
제42대 | 을우지(乙于支) | 471 | 특별한 일들이 기록되어 있지않다. | |
제43대 | 물리(勿理) | 461 | 426년 隆安의 于和中이 서북 36군을 함락시키다. 신하들과 海頭로 피난가신 후 붕어. | 于和中 반란 |
白民城 욕살 丘勿이 군대를 일으켜 藏唐京을 점령하니 九地의 군사들이 동조 | ||||
제44대 | 구물(丘勿) | 425 | 큰물이 도성을 휩쓸자 이틈에 檀帝가 만명의 병사를 이끌고 정벌하여 于和中을 죽였다. | 丘勿 장당경에서 卽位 |
국호를 大夫餘라 고치고 三韓을 三朝鮮이라 개칭하다. | 대부여로 개칭 | |||
海城을 개칭하여 平壤이라하고 離宮을 지었다. | ||||
424년 三神迎鼓를 하였다. | 三六大禮 | |||
409년 감찰관을 각 州,郡에 파견하고 민정을 위무하다. | ||||
403년 燕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신년인사를 하다. | ||||
제45대 | 여루(余婁) | 396 | 長嶺 狼山에 성을 쌓다. | |
380년 燕人이 침범하매 장수 苗長春이 쳐부수다. | ||||
365년 燕人 倍道가 침입하여 요서를 함락시키고 雲障에 육박하자 番朝鮮 대장군 于文言 | ||||
에게 막도록 하고 眞, 莫조선 군대를 파병 하여 연,제군대를 五道河에서 쳐부수다. | ||||
364년 燕이 패전하고도 連雲島에 주둔하여 造船하고 전쟁준비하므로 추격하여 격파하고 | ||||
장수를 쏘아 죽이다. | ||||
350년 北莫酋長 厄尼車吉이 연나라 칠것을 주장. 장수 申不私로하여 協攻하여 上谷을 | ||||
공격하고 성을 쌓다. | ||||
343년 燕나라의 和解를 허락하고 造陽의 西를 경계로 삼다. | ||||
342년 크게 가물다. 죄 없이 옥에 갇힌 사람을 풀어주고 기우제를 드리다. | ||||
제46대 | 보을(普乙) | 341 | 番朝鮮王 解仁이 燕의 자객에 시해 당하니 五加가 다투어 일어나다. | |
325년 邑借 箕詡가 자칭 番王이라 칭하고 允許를 구하니 허락하다. | ||||
304년 도성에 큰 불이나 단제는 海城 離宮으로 피난하다. | ||||
298년 북막추장 尼舍가 음악을 바침. | ||||
296년 韓介가 宮侵하여 스스로 왕이 되려하니 대장군 高列加가 의병으로 쳐부수다. | 조선국 대장군 고열가 | |||
제47대 | 고열가(古列加) | 295 | 282년 王儉檀帝의 廟를 백악산에 세우다. | 고열가는 단군 勿理의 玄孫 |
252년 연나라가 사신을 보내다. | ||||
247년 10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북막추장 阿里當夫가 연나라 정벌요청 | ||||
단제가 불허하자 원망하며 이후 공물을 바치지 않았다. | ||||
239년 解慕漱가 熊心山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켰는데 그의 선조는 藁離國 사람이다. | ||||
238년 3월 五加들과 대해모수는 수유와 약속하고 白岳山을 습격하고 天王郞이라 | 高句麗의 胎動 | |||
칭하다. 箕丕를 권하여 番朝鮮王으로 삼고 운장을 지키게하다. | ||||
주) 단군왕검의 이름이 왕검이 아니라 檀國의 君王 儉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봄. | ||||
고려국 공민왕시기에 작성된 檀君世紀 참조.. | 정리 心濟 2008.04 | |||
출처 : 잃어버린 역사,보이는 흔적
글쓴이 : 心濟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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