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정문- 그리고 유교의 유형문화재

2005. 9. 9. 00:40상식

유교의 근본 사상은 오행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유교의 풍습중 무형문화재가 제사이고

유형 문화재가 인의예지신으로 대변되는 동쪽의 흥인지문,

서쪽의 돈의문, 남쪽의 숭례문, 북쪽의 홍지문, 그리고

중심에 보신각입니다. 智를 정북의 숙정문이 아닌 홍지문으로

적용한 것에 대한 설명이 아래에 자세히 실려 있음을 보실 수 있습니다.

 

 

 

 

 

숙정문(肅靖門)조선 태조 4(1395)년에 세운, 서울의 북쪽 정문. | 산성과 성곽

 

숙정()[―쩡―][명사] 조선 태조 4(1395) 세운, 서울 북쪽 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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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명칭
     숙정문(肅靖門)은 서울 도성의 북쪽 대문으로 처음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이었다. 숙정은 '북 방 의 경계를 엄하게 하여 도성 안을 평안하고 정숙하게 한다'는 뜻으로, 숙청은 '도성 북쪽의 경계를 엄하게 하여 도성 사람들이 정숙하고 맑은 세상에서 살 수 있게 한다'고 해석할 수 있어 그 뜻이 통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 초 성문의 이름을 붙일 때 유교 덕목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가운데 오행(五行)에 따라 방향을 잡아 동쪽은 인(仁), 서쪽은 의(義), 남쪽은 예(禮)를 취하였으나 북쪽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북쪽인 지(智)는 18세기 초 숙종 연간에 탕춘 대성(蕩春臺城)의 성문인 '홍지문(弘智門, 일명 漢北門)'으로 보강된다. 그리고 중앙의 신(信)은 19세기 말 고종 연간에 종루의 이름을 보신각(普信閣)이라 하면서 오행이 갖추어졌다.
     숙청문(肅淸門)은 태조 5년(1396) 9월 도성의 제2차 공역이 끝나고 도성 8문이 준공되었을 때에 함께 이루어져 이름이 붙여졌으며, 속칭 북문(北門)이라 불리었다. 그런데 태조 13년 6월 풍수학생 최양선(崔揚善)이 습揚풩오 창의문과 관광방(觀光坊)의 동령(東嶺)에 있는 숙청문은 지리학상 경복궁의 양팔과 다리 같으니 길을 내어 지맥을 손상시켜서는 안된다쉼 하면서 문을 막고 통행을 금지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숙청문과 창의문을 폐쇄하여 길을 막고 거기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
     그 후 숙청문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닫혀진 문으로 존재하게 된다. 북문이 열리는 때는 주로 가뭄이 들어 기우제를 행하는 시기였다. 숙청문 은 이처럼 폐쇄된 문으로 유지되었기 때문인지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주로 북문 으로 칭하고 있으며, 중종 18년부터 숙정문(肅靖門)이라는 표현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이후 로는 두 명칭이 혼용된다. 이름이 달라지기 시작 한 연유를 알려주는 기록은 없다. 다만 한자 표기를 달리 하여 중종 26년 북정문(北靖門)이라는 표현과 선조 20년의 숙정문(肅靜門)이라는 표현 이 있는 것과, 북문이 주로 기우(祈雨)를 위하여 열리면서 소음을 피하기 위하여 시장을 옮기고, 북 치는 것을 금지하는 것과 관련하여, 정숙한 기운을 진작시키는 의미에서 발음이 조용한 숙정문으로 바뀌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해 보게 된다.

     2. 위치와 기능
     숙정문은 종로구 삼청동 산 2-1번지 즉, 서울 도성의 북쪽에 위치한다. 북악의 산줄기에서 동쪽으로 좌청룡을 이루며 내려오다가 [휴암 부엉바위, 현장 정보장교의 말에 의하면 산줄 기의 끝에 있는 바위라 하여 말(末)바위라 부른 다고 함]과 응봉(鷹峰, 성균관대학교 뒷봉 우리)에 못 미쳐 위치하고 있다. 삼청터널이 있는 산언덕에서 북쪽으로 오르면 숙정문을 만나며, 삼청각에서 서쪽으로 바라보면 서울성곽과 함께 숙정문이 보인다.
     한편 연산군 10년 7월에 숙청문을 오른쪽으로 약간 옮기라고 명령한 기록이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군사상 도성 방 위와 순찰에 있어 지대가 높고 험하여 통행 하기 불편하였으므로 보다 편리한 곳으로 옮겨 지은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때는 연산 군이 폐위 1년여를 앞둔 시절로 여러 가지 방탕하고 난폭한 일을 저지르면서 성균관을 폐쇄하여 놀이터로 삼고, 그 북쪽에 있는 숙청 문도 아주 막아버리고
오른쪽으로 새 문을 만들게 한 것이다.
     그러나 연산군 말기에는 각종 공사를 벌이는 명령과 지시가 남발되지만 이행 여부를 확인하는 내용이 별로 없는 것으로 보아, 숙청문 의 이설 문제도 지시만 있었고 실행되지는 못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이는 현장 검증 등을 통 하여 구체적인 판단이 필요한 사항이라 하겠다.
     숙정문은 도성의 북문으로 그 기능은 서울 에서 의정부를 거쳐 원산과 함경북도로 이어 지는 관문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숙정문 은 4대문·4소문을 갖추고자 했던 조선왕조 도성의 성문 체제에 따라 축조되기는 하였지만 실질적인 기능은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인근에 사람이 살지 않았고 교통로가 필요하지 않은 험준한 산악지역에 위치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문의 기능은 동소문인 홍화문(후에 혜화문)과 동대문인 흥인문이 대신하였던 것이다.

 

 

성북동 계곡 막바지에서 능선을 따라 올라가면 도성 4대문의 하나인 속칭 북문이라 하는 숙정문이 나온다. 이문은 서울의 정북에 위치한 문으로 4소문의 하나인 창의문과 함께 양주와 고양으로 왕래하는 통로로서 태조때 다른 성문과 함께 축성되었으나 연산10년(1504)에 원래 위치에서 얼마간 동쪽으로 이전되었다.

이 문은 건립된지 18년뒤인 태종 13년(1413)에 풍수지리학자 최양선이 풍수지리학상 경복궁의 양팔이 되는 창의문과 숙정문을 통행하는 것은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상소를 올리자 조정에서는 이 두문을 폐쇄하고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 시켰다한다. 다만 가뭄이 심할때만 비를 오게 하기 위하여 숙정문을 열고 남대문을 닫았다한다.

이 풍속은 태종16년(1416)부터 있었다하는데 이는 음양오행설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외에도 오주연문장전산교란 책자에 따르면 이문을 열어놓으면 장안의 부녀자들이 풍행이 음란해 지기때문에 항상 문을 닫아 두었다는 속설도 아울러 전해 오고 있다.

그리고 음력정월대보름때가 되면 민가의 부녀자들이 대보름전 숙정문에 3번 가서놀다오면 그해의 재앙을 면할수 있다하여 많은 부녀자들이 이곳을 찾았다 하며, 그리고 또 오래토록 비가 오면 국가에서 4대문에 나아가 영라는 비를 그치게 하는 기청제를 거행하였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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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사대문은 지금과같은 위치로 성벽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의 동 서 남 북의 대문구실을 한것입니다.

서울의 사대문:

동대문(흥인지문:興仁之門) : 동쪽은 오행상 木이요, 仁을 상징한다.
동대문만 유일하게 흥인지문이라 하여 之자가 첨가된 것은, 옛부터 동쪽이 낮아
왜구의 침입을 많이 받으므로 동쪽의 기운을 높이는 뜻에서 산맥을 뜻하는
之자를 첨가함.

서대문(돈의문:敦義門) : 서대문은 본래 흥인지문에서 광화문을 통과하는 일직선상에
있었으나, 그 문밖의 경사가 가팔라 통행에 지장이 많다하여, 세종 연간에 약간 남쪽으로 옮겨 문을 새로 내었다.
그래서 오늘날 ‘새문안’이니 ‘신문로(新門路)’니 하는 지명의 흔적을 남기고,
그나마 일제에 의해 헐리어 없어졌다. 오행상 金이요, 義를 상징한다.

남대문(숭례문:嵩禮門) : 오행상 火요, 禮를 상징한다.
숭(嵩)자는 원래 염(炎)자와 同一하며, 비상(飛上)을 상징한다. 이는 궁궐을 직면하는
관악산이 불산이라 그 불기운을 누르기 위함이다. (지금 광화문 앞의 해태상도
관악산의 불기운을 누르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북대문(홍지문:弘智門) : 북문은 오행상 土요, 智를 상징하며, 현재 삼청동 터널 위쪽에
복원해 놓은 숙정문(肅靖門)이다. 그런데 이 숙정문은 본래 방위에 맞추어 문을 내기는
했지만 문의 구실을 하지는 않았다. 숙종문 이후에는 풍수설에 의해, 북문을 열어 놓으면
음기(淫氣)가 침범하여 서울 부녀자들의 풍기가 문란해 진다 하여, 문을 만들어
놓기만 했을 뿐, 그곳을 통해 드나들지는 않았다. 대신 숙정문에 들어 서북쪽으로
약간 비껴 오늘날 상명대학교 앞쪽에 홍지문(弘智門)을 내고 그쪽을 통해 다니게 되었다.

->다른 곳에서 참고한 내용이지만 북대문은 그래도'숙정문'이다. 서울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의 성문인 '홍지문'은 원래 [한북문]으로 불리다, 숙종의 '홍지문'이라는 편액을 받고 이후 그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따라서 홍지문이 오행상 북문의 역할을 한것이지 서울도성의 북문은 '숙정문'이다.  홍지문은 탕춘대성의 성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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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대문:
조선조 초에 정도전(鄭道傳)은 한양의 성문과 중앙의 종루 이름을 사람이 살아가면서 늘 지켜야 할 다섯가지 도리, 즉 인(仁) 의(義) 예(禮) 지(知) 신(信)의 오상(五常:五行)을 따서 붙였다. 그리하여 흥인지문(興仁之門:동대문), 돈의문(敦義門:서대문), 숭례문(崇禮門:남대문), 홍지문(弘知門), 보신각(普信閣)이란 이름을 지었다.

그런데 서울의 4대문이라 하면 동대문, 서대문, 남대문만을 떠올린다. 어찌된 일인지 ‘북대문’하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은 흔치 않다. 이는 북대문이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곳에 있는데다 풍수지리설과 속설에 휘말려 창건한지 18년만에 폐쇄되었기 때문이다.

북대문인 숙정문(肅靖門:사적 10호)은 북한산 동쪽 산마루턱의 성북구 성북동 계곡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숙정문은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나라를 세운지 5년만인 1396년에 완공하였던 것. 그러나 당시 풍수학자 최양선(崔楊善)이 “동쪽, 서쪽 봉우리는 정궁인 경복궁의 양 팔과 같아 닫아 두어야 한다”고 건의, 축조한지 18년만인 1413년에 폐쇄하였다.

그 뒤 가뭄이 심하면 음의 기운이 강한 숙정문을 열어 비가 오기를 기원했으며 장마가 심하면 닫았다고 한다. 또 순조때 실학자 오주(五洲) 이규경(李圭景)은 저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篆散袴)’에 ‘숙정문은 음의 자리에 있어 열어두면 서울 장안의 여인네들이 바람난다’고 쓰고 있다. 이는 정월 보름 이전에 숙정문을 세번 오가면 액운이 없어진다고 해서 부녀자들의 나들이가 많아지자 남정네들도 모여들어 풍기가 문란해졌기 때문에 그와 같은 속설이 퍼진 것이라 한다.

어찌되었던 조선왕조는 왕도를 정하면서 철저히 풍수지리에 입각해서 도시계획을 구상했던 것이다. 때문에 서울의 도성이나 궁의 배치, 문루는 물론 심지어는 하천의 흐름, 산세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풍수와 관련지어 그 의미와 상징성을 부여하였기 때문에 풍수에 대한 이해없이는 서울의 유적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숙정문은 태종 13년에 폐쇄된 채 있다가 1504년(연산군 10년)에 동쪽으로 약간 옮겨 석문만 세웠던 것을 1976년 북악산 일대의 성곽을 복원하면서 문루를 짓고 ‘숙정문’이란 편액을 달아 오늘에 이른 것이다. 현재의 숙정문은 군부대의 바깥 쪽에 있어 보안상의 이유로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된 채 굳게 잠겨있다. 역시 숙정문은 예나 지금이나 폐쇄되게끔 되어 있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