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풍천 임씨
2008. 10. 8. 17:46ㆍ자랑스런 선조
13. 풍천 임씨 | ||||||||||||||||||||||||||||||||||||
주말에 읽는 문중 그뿌리를 찾아서 | ||||||||||||||||||||||||||||||||||||
| ||||||||||||||||||||||||||||||||||||
세종의 발자취 마을 곳곳에 고스란히
왕이 머물렀다하여 주왕리로 불리는 이곳은 세종대왕이 두 차례 방문해 117일을 머물러 잠시 임시수도의 기능을 했지만, 이곳은 풍천 임씨의 세거지이기도 하다. 풍천은 황해도에 있던 옛 마을로, 중국의 임온이 고려 때 우리나라로 건너와 풍천에서 자리잡는다. 이후 후손들이 풍천을 본관으로 삼아 가계를 잇는다. 온의 6세손인 임주가 고려 충렬왕 때 경상도 안찰사를 거쳐 장군을 역임하면서 이후 인물을 배출하며 가문을 일으킨다. 이들 문중은 그러나 고려 공민왕 말년에 임향이 신돈에게 쫓겨 홍성으로 유배되었는데, 귀양살이가 풀려 돌아가던 중, 보령에 터를 잡으며 집성촌을 이뤘다. 청원군 주왕리와는 광해군 때 참판 벼슬을 지낸 임지후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자리에서 내몰리고 숨어지내야 하면서 인연을 갖게 된다. 당시 아버지의 외가인 청주 한씨의 도움으로 정치적 변두리에 터를 잡게 되는데, 바로 그곳이 주왕리이다. 정치적 피해자인 임지후는 후손들에게 절대 벼슬길에 오르지 말 것을 당부함으로써 후손들은 정치가보다는 학자들이 많다. 몇 년 전 만해도 20여호 씨족들이 뭉쳐 살았다는 주왕리는 지금은 세거지가 불분명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외지로 떠나고 없다. 다만 유적으로만 문중의 흔적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왕이 머물렀다는 자부심을 보여주듯 마을 입구에는 주왕리라는 커다란 비석이 나오고, 작은 개울을 지나는 다리에는 임씨 문중의 사당인 주왕사를 알리는 비석이 나온다. 그리고 초정을 가기 위해 세종이 넘던 고개에는 3명의 문중 효인을 기리는 정려각이 가을 햇살에 나란히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정려각 앞으로는 사당인 주왕사를 지어 해마다 10월 1일 시제를 지내고 있다. 텅빈 들판에 가득 내려 앉은 햇살과 도리깨질로 콩을 터는 전형적인 농촌 풍광이 가득한 주왕리. 그러나 아직도 마을 곳곳에는 왕이 말을 타고 고개를 넘었다는 마고개 또는 망령고개, 소금으로 몸을 씻었다는 염티, 집현전 학자들이 머무른 서당골 등이 지명으로 남아있다. 행궁의 자리도 사라진지 오래지만 세종대왕의 흔적과 풍천 임씨 문중의 씨족역사가 하나되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다. 집성촌은 북이면 주왕리와 보은군, 옥천군 동이면 등이다. ◆ 인물 & 인물 고려조 자송·자순 형제… 명문가 발판 마련 사명대사 임응규, 임진왜란때 구국의지 불태워
학자 가문으로 청렴을 내세우며 명문가로 자리매김하던 문중은 연산군때 어처구니 없는 사건으로 풍랑을 맞는다. 발단은 연산군이 연회를 베풀 때 마침 벽에 임희재의 시 한편이 걸려 있었는데, 백성을 괴롭히는 진시황의 폭정을 비방한 구절을 두고 연산군을 빗대어 비방했음이 발각되어 문중이 고초를 겪는다. 그런가 하면 문중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인물로 임응규를 들 수 있다. 이름보다는 사명대사로 더 유명한 그는 형조판서 임수성의 둘째 아들이다. 서산대사의 제자이기도 한 그는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승복을 벗고 의병장으로 나서 구국의 의지를 불태운다. 사명대사는 일본에 인질로 잡혀간 동포를 구하기 위해 왜장과 담판을 벌여 3500명을 구출하는 등 두둑한 배짱을 보여주기도 했다. 또 보기드물게 조선의 여류학자 윤지당 임씨는 총명하고 학문이 깊었다. 어릴적부터 총명해 훗날 성리학에 통달, 학문을 연구한 글을 그가 죽은 뒤 '윤지당유고'로 묶어 간행했다. 고종이 정려를 내린 임기백은 주왕리 마을에 세워진 효자각의 주인공이다. 그는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산에서 약초를 캐고, 물고기를 낚았으며, 15세 때는 아버지의 목숨이 위독하자 단지로 부친을 구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시묘살이로 몸이 쇠약해져 병들어 죽자, 고종이 효행을 기리기 위해 정려를 명하고 효자각을 세웠다. 근세 인물로는 명필가 임수적과 그의 아들 임정은 시가에 통달하고 글쓰기에도 능해 실력을 인정받았고, 또 주기설을 확립한 임정주는 후세까지도 명성이 이어지고 있다. 글과 학문적 조예가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가문의 역사는 지역의 교육자 가문으로 인정받고 있다. 각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물로는 임응순 서예가, 임흥빈 전 교육자, 임흥빈 초등학교 교장, 임홍빈 음성삼성초 교장, 임창재 청주농고 교장, 임현빈 전 청주시 재무국장, 임찬순 소설가, 임상빈 중앙대교수, 임승빈 청주대 교수, 임태빈 청대 강사 등이 있다 |
출처 : 풍천 임씨
글쓴이 : 구절초# 원글보기
메모 :
'자랑스런 선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출지 (0) | 2008.10.08 |
---|---|
[스크랩] 친구의 과거 급제를 취소당했다는 소식을 듣고-권필(權韠) (0) | 2008.10.08 |
사명대사 (0) | 2008.10.08 |
우리의 자랑스런 선조 - 사명대사 (0) | 2008.09.17 |
풍천임씨 선조 제단비 제막식 참석 (0) | 2008.09.17 |